• "募兵制는 傭兵(용병)을 양성하고 국민국가를 해체할 것"

    趙甲濟   


軍內(군내) 사고를 다루는 언론이 무책임한 처방을 제시한다.
사병들에게 휴대전화를 허용하잔다.
비밀유지가 생명인 군대를 벌거벗겨 敵(적)을 이롭게 하자는 생각이 아니라면
지능이 모자라는 사람의 망언이다.
지금도 軍 부대엔 공중전화가 있어 가족과 연락을 할 수 있다. 
사고를 줄이기 위하여 국민 皆兵制(개병제)를 모병제, 즉 지원병제로 바꾸자는 이야기를 하는 자칭 언론인도 있다.

한 軍 간부는 이렇게 비판하였다. 
  
   "예산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근본의 문제입니다. 국민 개병제는 국민 모두가 병역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국민 국가를 공동으로 운영하자는 개념입니다.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국민 개병제라는 토대 위에 서 있습니다. 군대 경험의 공유가 공동체 유지의 핵심입니다.
모병제로 나가면 傭兵(용병)으로 전락합니다. 가난한 집안의 자녀들이 군대에 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류층 출신이 군대를 장악하면 국가질서에 대한 反感(반감)이 반란이나 쿠데타로 표출될 수도 있습니다. 어느 나라이든 장교단은 上流(상류) 지도층에서 배출되어야 안정적입니다. 상류층이, 국방 의무를 돈으로 계산하여 저변층에 맡겨놓고 웰빙에 빠지는 나라는 반드시 무너집니다." 
   
   국군은 건국의 초석, 호국의 간성, 근대화의 기관차, 민주화의 울타리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 과정에서 약 20만 명이 목숨을 바쳤다. 대한민국은 이들이 흘린 피 위에 세워진 건물이다. 5000만 이상의 인구를 가진 나라가 1인당 국민소득(구매력 기준) 3만 달러 이상을 달성하고,
 민주화도 이룩한 나라는 세계에서 일곱뿐이다.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그리고 한국이다.
이들 중 국가발전 과정에서 다른 나라를 침략하거나 식민지로 만들지 않았던 나라는 한국뿐이다. 
  
   지난 100년간의 국민국가 건설 경쟁에서 단연 최우수선수상(MVP)을 받을 만하다.
이런 대성공은 개병제 국군이 있었으므로 가능하였다.
軍內 사고도 지난 40여년 간 거의 20분의 1로 줄었다.
이런 역사적, 수치적 진실을 무시하고 군대를 거의 해체 수준으로 공격하는 언론이다.
전쟁과 군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배운 무식자들'이 몰려 있는 곳은 언론이란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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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을 결심해본 적이 없는 나라의 위선과 타락
   
   김유신(金庾信)과 김일성(金日成)은 1천3백년이란 간격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갖고 있다.
두 사람은 통일을 위한 전쟁을 결심했던 한국 역사상 유이(唯二)한 지도자이다.
신라(新羅)의 김유신(金庾信)은 당(唐)과 연합하여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멸망시킨 뒤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려는 唐과 일전(一戰)을 벌여 평양-원산선(線) 이남 지역을 우리 민족의 역사 공간으로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가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으로서 1천3백여 년을 살아올 수 있도록 한 토대는 바로 金庾信의 이 전쟁의지였다. 동방의 한 작은 나라가 전성기에 있었던 세계적인 대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결단할 수 있었다는 것, 이로써 우리는 독립국가의 자격증을 얻은 것이다.
군대는 국가 요소의 하나이지만 국가는 그 군대를 딛고서만 존립(存立)할 수 있다. 
   
   한국이 독립국가의 자격증을 잃은 가장 중요한 요인도 효과적인 군사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고종(高宗) 19년(1882년) 임오군란으로 재집권한 대원군(大院君)에 대해 일본이 무력 간섭을 할 움직임을 보이자 청(淸)은 오장경(吳長慶)으로 하여금 3천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출동하게 하였다. 그 목적이 지원이든 간섭이든 일단 외국 군대가 주둔한다는 것은 독립성의 손상을 가져온다. 더구나 오장경(吳長慶)의 청군(淸軍)은 군영을 방문한 이 나라의 실권자인 大院君을 군란의 책임자라 하여 납치한 뒤 천진으로 호송해 버렸다. 한 국가로서의 붕괴, 그리고 식민지화는 여기서부터 결정된 셈이다.
   
   신라 통일 이후 한국은 국가체제를 유지하면서 특이한 기록을 남겼다.
수많은 침략을 당하고 강요된 전쟁을 치렀지만 우리가 스스로 전쟁을 결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왕건(王建)이 치른 내전(內戰), 월남 파병·대마도 정벌·여진족 토벌 수준의 전투를 국가 對 국가의 전쟁과 구별한다면>. 조선조 건국 이후의 6백년 동안엔 자주국방의 능력과 의지마저 잊어버렸다. 임진왜란 때는 명군(明軍)의 도움으로, 한국전쟁 때는 남한은 미군, 북한은 중공군의 지원으로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자력(自力)으로 나라를 지켜야 했을 때, 즉 병자호란과 개항기(開港期)에 우리는 실패했다. 
   
   전쟁을 스스로 결단해 본 적이 없는 국가는 결투를 해 본 적이 없는 남자와 비교될 수 있다.
전쟁이란 것은 지도층과 국민이 개인적 운명과 체제의 존망을 걸고 국가의 힘을 총동원하는
건곤일척의 승부이다. 
   
   그 사회의 가치관, 정부와 국민의 총체적 능력과 의지력, 그리고 민족과 국가의 명예를 거는
집단적 고뇌·각오·결단·희생·욕망이 전쟁인 것이다.
이기면 노예가 주인이 되고, 지면 남편이 아내도 지킬 수 없게 되는 전쟁을 통하여
국가와 민족이 탄생, 소멸, 성장, 성숙을 거듭해왔다는 것은 역사의 가르침이다.

전쟁을. 통해 민족적인 대각성을 이룬 나라는 선진국으로 성장했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한 인간이 어른으로 성숙하는 데 있어서 때로는 주먹다짐이 필요하듯
한 국가로서 존립하고 성장하는 데 있어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명제인 것이다.
  
   'No war no nation state, no rovolution no democracy'
(전쟁이 없으면 국민국가가 없고, 혁명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 
  
   그러함에도 한국은 이 명제를 직시하지 못하고 그로부터 도피해온 역사를 갖고 있다.
평화를 사랑한 때문이라고 설명하면 그만이지만 강요된 방어전을 하는 것과
자신의 철학·책임·계산·의지 하에 전쟁을 선택하는 것은 깊이가 다른 행위이다.

 [스스로의 전쟁 결심 없이 나라를 지켜왔다]는 한국 역사의 특이성은
우리의 민족성 형성에도 크나큰 그림자를 드리웠다. 
   
   *책임감과 명예심의 문제=목숨을 걸고 민족과 개인의 명예를 지키고 그 결과에 책임진다는 전통이 없는 지도층에 [노블레스 오블리제] (Noblesse Oblige)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가와 국민 관계의 문제=대외적(對外的)으로는 나약하여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권력은 대내적(對內的)으로는 가혹하게 행사되었다. 바깥에선 얻어맞고 집안에선 동생을 구박하는 형(兄)을 누가 따르겠는가. 국민은 무능하면서도 비열한 권력층을 불신·저주하면서 생존을 위한
요령을 터득해갔다. 
   
   19세기 말 한국을 여행했던 영국의 비숍(Bishop) 여사는
[한국 민중은 가난 속에서 보호를 구한다]고 썼다.
돈을 벌면 기다렸다는 듯이 관리들이 몰려와 착취해 가니
 [가난 속에 머무는 것]으로서 자신을 보호했다는 뜻이다.

신석기 시대의 패총에는 고래뼈가 발굴되지만 그 뒤 한국 어민들은 포경업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조선조 시대에는 고래가 바닷가에 표착하면 어민들이 몰려나와 바다로 밀어 넣어 보내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관리들이 알면 어민들을 동원하여 고래를 해체시키고 기름을 뽑아낸 뒤 아무런 대가도 주지 않기 때문에 고래를 돈벌이 대상이 아니라 원수처럼 여겼던 것이다.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면 권력의 정당성이 상실되고
그런 권력층과 국민 사이엔 착취·경멸·저주·불신만 쌓인다.
그런 가운데서 올바른 공직자-시민, 정부-국민 관계가 생길 리가 없다.
무사·기사 집단이 나라를 세우고 이끌었던 영국·독일·프랑스·일본의 공직자-국민 관계와
문약한 지식인들이 지배했던 조선의 공직자-국민 관계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의 지배층이 불신 당한 가장 큰 이유는 착취에만 있는 게 아니라
국민을 지켜주지 못하면서, 즉 주는 것 없이 가져가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위선의 논리=한 민족이 전쟁을 결심하거나 스스로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행위는 책임을 지는 행위다. 국가는 국가의 명예, 국민의 안전과 복지를 책임지고,
군인은 국민을 책임지며, 家長은 가정을 책임지고, 남편은 아내를 책임지는 것이다.
이 책임과 의무관계 속에서 국가는 국민에게 고통분담을 요구하고 국민은 국가에 따른다.
비로소 떳떳한 국가, 국민, 그리고 국가-국민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지배충의 생존 요령은 변명과 위선이다.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한 번도 외국을 침략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게 된다.

전쟁을 결심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평화를 선택했고,
그 평화란 것도 적국(敵國)의 평화이지 우리 민족의 평화는 아니었다.
(평화를 사랑한 민족이 왜 평화롭게 살지 못했나).

진정으로 평화를 사랑했다면 우리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결단했어야 할 경우가 많았으나 그것을 회피함으로써 평화가 아닌 고통을 맞아들인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한국의 역대 지배층을 이루어 온 지식인 사회에서 발견되는 위선적 명분론과 비열함,
그리고 산업·군사 경시사조는 자주국방과 전쟁이란 거국적 승부를 해 본 적이 없는
집단이란 점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전쟁은 무조건 악이요, 피하고 볼일이라는 사조(思潮)가
북한 핵 문제에 직면한 남한 사회를 풍미하고 있다.
위선적인 반전론(反戰論)이 절대가치처럼 횡행하고 있다.

한국 역사상 주된 지배층이었던 유교적 지식인들은
국제관계의 변동기 때 국방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나라를 유린당하도록 함으로써
아내가 겁탈 당하도록 방치한 남편의 신세가 되었다.
무식한 남편이었다면 아내에게 사죄하고 복수의 칼을 갈았겠지만
논리라는 무기를 가진 지식인들은 달랐다.
겁탈 당한 아내를 부정한 여자라 하여 내쫓거나 자살하게 하고
침략 당한 민족이 침략한 민족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며
전쟁은 무조건 惡이라는 위선적인 평화론을 개발하였다.
이 평화론과 맥을 같이 하는 분위기가 지금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