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한국이 전쟁에 가장 가까이 갔던 날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38 주년에 즈음하여

    趙甲濟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15명의 韓美(한미) 경비병과 노무자들이 남측 초소의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 가지를 자르고 있었다. 북한군 장교 박철이 부하들을 데리고 오더니 가지치기를 중단하라고 했다. 미군 장교 아서 보니파스 대위는 이를 묵살하고 작업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웨스트포인트 출신으로서 1년 기한의 한국근무를 3일 남겨두고 있었다. 
       
  • ▲ 미군 장교를 살해하는 북한군.(자료사진)
    ▲ 미군 장교를 살해하는 북한군.(자료사진)
  박철이 북한병력을 불렀다. 30여 명의 북한군이 트럭을 타고 왔다. 손에는 쇠몽둥이와 도끼를 들고 있었다. 이들은 가지치기를 하던 노무자들을 에워쌌다. 박철은 한국군 장교를 통역삼아 미군 장교에게 다시 작업중단을 요구했다.
   
  보니파스 대위가 이를 무시하고 등을 돌리는 순간 박철은 손목시계를 풀어 손수건으로 싼 뒤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죽여!”라고 고함치면서 보니파스 대위의 목을 손으로 쳐 쓰러뜨렸다. 
   
  동시에 북한군인들은 韓美 경비병과 노무자들을 덮쳤다. 보니파스 대위는 몽둥이와 도끼에 맞아 현장에서 즉사했다. 다른 미군 장교 마크 바렛 중위는 사병을 도우려다가 맞아죽었다. 미군 기동타격대가 도착했을 때는 북한군이 분계선을 넘어가 정렬을 끝낸 뒤였다. 
   
  이 뉴스가 워싱턴으로 전해졌을 때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캔자스시티에서 대통령 후보를 뽑는 공화당 전당대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는 로널드 레이건으로부터 공산당에 대해 너무 무르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다. 대통령이 부재 중인 관계로 키신저 국무장관이 백악관 지하 상황실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미국 CIA 요원은 이런 요지의 보고서를 제출했다(돈 오버도퍼 著 《두 개의 코리아》).
   
  <우발적인 사고는 아닐 것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기간에 주한미군에 대한 반대 여론을 조장하려는 의도로 추측된다.>
   
  합참을 대표해서 나온 해군참모총장 제임스 I. 할러웨이 제독은 “북한이 남침에 성공하려면 기습을 해야 하는데 이미 우리가 만반의 경계태세에 돌입한 이상 북한의 대규모 군사공격은 없을 것이다”고 분석했다. 이 회의에서 키신저 장관은 포드 대통령과 통화한 뒤 “북한놈들이 이번에는 반드시 피를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리처드 스틸웰 駐韓(주한) 유엔군사령관은 회의 전에 합참으로 문제의 미루나무를 베어 버리자는 보복案(안)을 냈으나 키신저는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는 태도였다. 
   
  긴급대책회의는 구체적인 보복방안을 결정하지 않고 먼저 한국으로 병력을 집결시키기로 했다. 오키나와 기지로부터 팬텀 편대를 한국으로 이동시키고, 아이다호州에 있던 F-111 전폭기를 한국으로 보내기로 했다. 괌에 있는 B-52 전략폭격기를 휴전선 상공까지 보내 폭탄투하 연습을 하도록 하는 한편 일본에 있던 미드웨이 항공모함 전대를 대한해협으로 이동시키기로 했다. 
   
  이날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소련과 중국을 의식하지 않고 상당히 강경한 보복안들을 쏟아 냈다. 
   
   ‘도끼만행’이 감정적 반응을 부른 점도 있었을 것이다. 북한 선박 나포에 이어 북한 해안선 인근 해역에 核폭탄을 터트리자는 案도 나왔다. 북한 측 휴전선의 동쪽 끝 부분을 폭격하자는 발상도 있었다. 美 합참은 미루나무를 베어 버린 뒤 초정밀 유도병기나 地對地(지대지) 미사일로 북한의 전략적 기간시설을 파괴하는 응징案도 냈다. 키신저도 미루나무만 자르는 행위는 너무 나약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온건론으로 귀착되었다. 美 국방부와 해군 측에서는 “강경한 조치가 또 하나의 한국전쟁을 부를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포드 대통령도 ‘한반도에서 지나친 무력과시는 자칫 전면전으로 확대될 위험성이 있다. 적정한 수준의 병력 사용으로 미국의 결연한 의지를 보이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북한은 자신들이 저지른 짓의 심각성에 놀라 먼저 전투준비 태세에 들어갔다. 평양에선 등화관제가 실시되고 요인들은 지하 방공호로 들어갔다. 全전선에서 북한군은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한국군과 주한미군도 경계태세를 데프콘(Defcon) 3으로 높이고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했다. 유엔군 측은 즉각 군사정전회의를 열자고 제의했다. 북한은 즉시 이에 응했다. 이것을 본 스틸웰 사령관은 “판문점 사건이 북한 측의 우발적 행동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 ▲ 판문점 한미경비병을 습격하는 북한군부대.(자료사진)
    ▲ 판문점 한미경비병을 습격하는 북한군부대.(자료사진)
  •   이날 朴대통령은 평상시처럼 집무했다. 오전에는 朴東鎭(박동진) 외무장관의 보고를 받았고, 오후엔 金龍煥(김용환) 재무부 장관으로부터 부가가치세제 도입에 관련한 보고가 있었다. 오후 4시20분부터 1시간30분간 朴대통령은 부가가치세제 도입에 대해 소극적이던 南悳祐(남덕우) 부총리를 불러 이 문제를 의논했다. 
       
      워싱턴에서는 이 시간 긴박한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지만 戰時는 물론이고 平時 작전통제권도 갖지 못한 朴대통령으로선 별로 할 일이 없었다. 
       
       '미친 개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
       
      이날 밤 朴대통령은 이런 일기를 남겼다.
       
      <오전 10시30분경 판문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나무 가지치기 작업 중인 유엔군 장병 11명이 곤봉·갈고리 등 흉기를 든 30여 명의 북괴군의 도전으로 패싸움이 벌어져서 유엔군 장교(미군) 2명이 사망하고, 한국군 장교 1명과 병사 4명이, 미군 병사 4명, 계 9명이 부상을 입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전쟁 미치광이 金日成 도당들의 이 야만적인 행위에 분노를 참을 길이 없다. 목하 스리랑카 수도 콜롬보에서 개최 중인 비동맹회의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정치 선전에 광분하고 있는 북괴가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하나의 계획적인 만행이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들의 이 만행을 언제까지 참아야 할 것인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이들의 이 만행을 언젠가는 고쳐 주기 위한 철퇴가 내려져야 할 것이다. 저 미련하고도 무지막지한 폭력배들아,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지어다. 미친 개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
       
      사건 다음날인 8월 19일 오전(9시50분부터 45분간) 청와대에서 대책회의가 열렸다. 徐鐘喆(서종철) 국방장관, 盧載鉉(노재현) 합참의장, 스틸웰 유엔군사령관, 金正濂(김정렴) 비서실장, 崔侊洙(최광수) 의전수석은 통역으로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朴대통령은 대화 내내 차분하고 사려 깊었으며 긍정적 태도를 보였다”고 스틸웰은 워싱턴에 보고했다. 朴대통령은 이런 요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북한 측에 사과 배상 재발방지 등 최대한으로 강력한 항의를 전달해야 하겠지만 나 자신도 이것이 통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북한에 교훈을 주기 위해 적절한 군사적 대응조치를 하되 화력을 사용하는 것에는 반대이다.>
       
      그 다음날(8월20일) 스틸웰 유엔군사령관은 청와대로 와서 오전 11시부터 45분간 朴대통령에게 워싱턴에서 결정된 보복계획을 보고했다. 
       
       “미군이 공동경비구역으로 들어가서 문제의 미루나무를 잘라 버린다. 만약 이때 북한군이 대응공격을 한다면 우리도 즉각 무력으로 대응하여 휴전선을 넘어 개성을 탈환하고 연백평야 깊숙이 진격하여 수도에 대한 서부전선의 근접성을 해결한다”고 스틸웰 사령관이 보고했다고 한다(배석했던 金正濂 비서실장 증언). 
       
       ‘두 개의 코리아’를 쓴 돈 오버도퍼가 美 국방부 문서를 인용한 내용은 좀더 구체적이다.
     미국 정부가 스틸웰 사령관에게 승인한 보복계획은 ‘북한군이 소총으로 미루나무 절단작업을 방해할 경우에는 작업팀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하여 박격포와 대포를 쏜다. 북한군이 (분계선을 넘는) 지상공격을 해올 경우엔 대기 중인 지원부대가 인근의 북한군 목표물에 대한 집중포격을 개시한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후자의 경우는 제2의 한국전쟁이 시작되는 것을 뜻했다. 이런 경우에는 유엔군과 한국군이 개성과 연백평야까지 진출하되 더 북쪽으로는 전선을 확대하지 않는다는 목표를 세웠던 것 같다. 
       
      스틸웰 유엔사령관의 보고를 들은 朴正熙 대통령은 “군사작전은 미루나무 절단에 한정하고 북한이 확전할 때만 우리도 확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朴대통령은 매우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때 한국은 중화학공업 건설이 궤도에 오르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평화만 깨지지 않는다면 체제경쟁에서 金日成에게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도끼만행에 대한 보복으로 그런 평화가 중단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朴대통령은 이해 1월24일 국방부를 연두순시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었다. 
       
      “공산당이 지난 30년간 민족에게 저지른 반역적인 행위는 우리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을 겁니다. 후세 역사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 온 것은 전쟁만은 피해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이 분단 상태를 통일해야겠는데 무력을 쓰면 통일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 번 더 붙어서 피를 흘리고 나면 감정이 격화되어 몇십 년간 통일이 또 늦어진다. 그러니 통일은 좀 늦어지더라도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고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참아온 겁니다. 우리의 이런 방침엔 추호의 변화가 없습니다.”
       
      이날 朴대통령은 스틸웰 유엔군사령관에게 주문을 하나 했다. 
       
      “공동경비구역이 미군 관할이라고 해서 우리가 가만 있을 수 없다. 미군 지휘관을 제외하고 절단작업, 경호, 근접지원 등 제1선 임무는 한국군이 맡고 미군은 제2선을 맡도록 했으면 한다.”(金正濂 비서실장 증언)
       
      1976년 8월21일 오전 4시쯤 美 2사단內 RC4 체육관. 한국 공수부대원으로 구성된 특공대원 64명이 출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朴熙道(박희도) 여단장은 특공대 장교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지시했다. 
       
      “일단 교전이 붙으면 누가 먼저 발포했느냐는 문제가 안 된다. 교전 결과가 중요하다. 일단 우리 편의 피해가 없어야 한다. 敵(적)의 공격이 예상되면 그 즉시 선제 기습이 이뤄지도록 특공대장 이하 간부들이 즉각 조치하라. 내가 현장에서 직접 지휘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특공대장의 판단하에 움직여라. 결과에 대한 책임은 모두 내가 진다.”
       
      朴熙道 여단장은 무기를 숨겨 가라고 지시했다. 방탄조끼를 입고 계급이 없는 철모를 쓴 특공대원들은 몽둥이(곡괭이 자루)만을 든 채 트럭 3대에 나눠 탔다. 방탄조끼 안에는 권총과 수류탄이 숨겨져 있었다. 이러한 무장은 공동경비구역內의 규정과 스틸웰 사령관의 ‘비무장 지시’와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한국 특공대 병력이 공동경비구역으로 가는 전진 기지인 키티호크 캠프(注: 이 캠프는 후에 8·18 도끼만행 사건으로 사망한 미군 대위의 이름을 따 ‘보니파스 캠프’로 바뀌었다)에 도착한 것은 잠시 후였다.
       
      이날 오전 7시 韓美호송 차량 23대가 북한 측에 사전 통보 없이 공동경비구역으로 진입했다.
     미군 공병대원 16명은 전기톱과 도끼로 미루나무를 베어 내기 시작했다. 공동경비구역 안에 북한이 멋대로 설치한 두 개의 바리케이드도 철거했다. 한국군 특공대가 이 작업을 엄호했다. 하늘에는 미군 보병이 탄 20대의 汎用(범용)헬기와 7대의 코브라 공격용 헬기가 굉음을 내면서 선회 중이었다. 상공에서는 B-52 전폭기 편대가 韓美 전투기의 엄호를 받으며 선회하고 있었다. 오산에는 중무장한 F-111 편대가 대기 중이었다. 해상엔 미드웨이 항공모함 전대, 판문점 가까운 전선에는 韓美 보병, 포병이 방아쇠를 만지고 있었다. 
       
      미루나무 절단작업이 시작된 직후 유엔군 측은 당직 장교를 통해 북한 측에 메시지를 전달했다.
       
      ‘유엔사 작업반은 8월21일 JSA(공동경비구역) 안에 들어간다. 그것은 지난 8월18일 당신네 경비병들의 도발로 마무리짓지 못한 작업을 평화적으로 완료하기 위해서이다. 우리 측 작업반은 유엔司 초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나무를 베어 낼 것이다. 작업반은 임무가 끝나는 대로 JSA에서 철수할 것이다. 이 작업반이 아무런 도발을 받지 않는 한 어떤 문제도 없을 것이다.’
       
      金正濂 비서실장과 崔侊洙 의전수석은 이미 오전 6시에 청와대로 출근하여 유엔군 사령부 지하 벙커에 있는 柳炳賢(유병현) 합참본부장과 전화 통화를 한 뒤 비서실장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유엔군 사령부와 연결돼 있는 핫라인을 통해 작전 진행 상황을 파악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 ▲ 판문점 미루나무 제걱작전.(자료사진)
    ▲ 판문점 미루나무 제걱작전.(자료사진)


  •   절단 작전이 시작되었을 즈음 朴正熙 대통령은 본관 2층 거실에서 아래층 집무실로 내려왔다. 金正濂 실장과 崔侊洙 수석은 유엔군 사령부에서 보고가 들어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첫 번째 보고는 ‘지금 작업반이 들어가 미루나무를 베고 있다’였다.
    崔侊洙 수석이 집무실로 가 朴正熙 대통령에게 이 내용을 보고했다. 崔수석은 작전이 끝난 오전 7시55분까지 두 번 더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오전 7시22분쯤 ‘敵 200여 명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 방향으로 오고 있다’라는 보고가 들어왔을 때, ‘敵이 다리를 넘어오지는 않고 사진만 찍고 돌아갔다’라는 보고가 들어왔을 때였다.
       
      이날 전방의 북한군 부대 통신을 감청한 미군은 “그들은 겁을 먹고 있었다”고 평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북쪽에서 북한군은 미루나무가 작전 개시 42분 만에 잘려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 20분 후 북한 측 군사정전위 수석대표 한주경 소장이 金日成의 친서를 전달하고자 미국 측 수석대표에게 비밀면담을 요청했다. 金日成이 유엔군 사령부에 편지를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내용은 ‘유감표명’이었다. 
       
      미국 측은 이를 사과로 받아들였다. 절단 작전이 끝난 뒤 金正濂 실장은 최종 보고를 하러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朴正熙 대통령은 서류를 보면서 보고를 다 듣고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래, 끝났다고, 알았어”라고 말했다.
       
      얼마가 지난 뒤 金正濂 실장은 朴正熙 대통령의 인터폰을 받았다. 朴대통령은 “金실장이 국방장관, 합참의장, 참모총장, 그리고 스틸웰 사령관에게 애썼다는 말을 전해 줘”라고 지시했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폭격·봉쇄 등 강경한 보복조치를 생각했다가 온건한 대응으로 물러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북한이 계획적으로 저지른 1967년의 청와대 습격사건과 푸에블로號 납치, 1969년의 미국 전자첩보기 격추 때도 미국은 무력시위에 그쳤다.
       
      북한이 一戰不辭(일전불사)의 자세를 취하니까 미국으로서도 제2의 한국전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강경대응이 어려웠던 것이다. 6·25 전쟁에서 미군이 뼈저리게 느낀 교훈이 하나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북한군과 절대로 육상전을 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 도끼만행 사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韓美공동작전을 위한 지휘체제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때부터 韓美연합사 설치를 위한 협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박정희 전집 12권에서 발췌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