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류근일 칼럼>2014/8/5
                     교가 탄원할 '정치犯'은 요덕에 있다.
     
    종교가 현재 한반도 상황에서
世俗에 좋은 스승 되는 길은
자유·인권·개인尊嚴 편드는 것.

형사被告人들인 이석기 일당을
양심囚 대하듯 풀어주라니...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 돼야

 4대 종단 지도급 성직자들이 형법상 내란 음모죄 위반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이석기 등 7명에게 '선처'를 베풀어 달라고 재판부에 '탄원'했다.
 이에 대해선 이미 많은 비판과 반론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이젠 그런 일차적 반응을 넘어, 그것이 함축한 근본적 이슈를 돌아볼 때가 되었다.
바로 종교와 세속의 관계, 특히 세속에 대한 종교인들의 멘토링(mentoring·스승 노릇)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때인 것이다.

 종교 지도자의 멘토(mentor·스승) 역할은,
멘토라는 이름을 가졌던 그리스의 한 캐릭터에서 유래한다.
그는 트로이 원정(遠征)길에 오른 오디세이의 친구였다.
주군(主君)이 온갖 시련으로 10년 넘게 집을 비우자
그의 아내 페넬로페 주변에는 수많은 찬탈자가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 아들 텔레마코스는 너무 어려서
무얼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허둥댔다.
그래서 멘토가 '현명하고 믿을 만한 카운슬러이자 스승' 노릇을 한 것이다.
멘토의 정신적 버팀목은 칼을 든 지혜의 여신 아테나였다.

 아테나의 자리는 중세기에 들어와선 주(主)님, 성경, 선지자, 성인(聖人)으로 넘어갔다.
이 시기엔 종교의 멘토링이 너무 막강해서 탈이었다.
나랏일에서 개인 일에 이르기까지 시시콜콜 감 놔라, 배 놔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근대 세속 국가가 출현하면서부터 정치와 종교, 세속과 성직(聖職)이 분리되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 일부 지역에선 종교가 다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가 대표적 사례다.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 키릴 1세도 푸틴 대통령에게
대(大)러시아주의, 전통주의, 권위주의, 반(反)서구주의를 훈수하고 있다.
세속에 대한 복고(復古)적 종교 권력의 멘토링인 셈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한반도에선 종교가 정교분리 원칙 아래서
세속에 대해 어떻게 '착한 멘토링'과 '좋은 멘토링'을 할 수 있을까?

답은 나와 있다. 자유냐 억압이냐, 인권이냐 인권 압살이냐, 개인의 존엄이냐 전체주의냐 하는
첨예한 대치(對峙)에서 종교가 자유, 인권, 개인의 존엄을 위한 멘토링에 나서는 것이다.
"웬 지당하신 말씀이냐?"고 할지 모르나, 오늘의 우리 종교계 이념 지형에선
이게 그렇게 '지당한 것'으로 돼 있지 않다는 데에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일부 종교인은 민주화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자기편 정권이 아니면
 '공포정치' 운운하며 '대선 불복(不服)'을 선동한다.
그러면서도 북한 세습 왕조의 진짜 공포정치에 대해선 이렇다 하는 말이 없다.

제주 해군기지를 '해적기지'라고 한 사람들과는 선을 그었나, 섞여 있었나?
2010년 지자체 선거 땐 "4대강에 찬성하는 후보들은 찍지 말라"는 현수막을 걸어놓은 적도 있었다. 이런 식은 종교계의 '누워서 침 뱉기'밖엔 안 된다.
종교인이 종교인처럼 행동하지 않고 광장의 광우병 선동가를 닮아가면,
그것은 종교인의 향기를 잃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나 이런 조악(粗惡)한 멘토링을 바로잡아 줘야 할 고위 성직자들까지
 더러는 거기 동조하고, 대부분은 골치 아프다며 "나 몰라라" 한다는 것이다.
4대 종단의 지도급 성직자들이 갑자기 '이석기 탄원서'를 들이민 것은
그간의 이런 격(格) 낮은 멘토링 풍조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더욱 고조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석기 탄원서' 서명자들은 무엇보다도,
누구나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라고 복창할 만한 멘토링을 한 게 못 되었다.
영 가당치도 않은 인물들을 골라 '가족들로부터 불쌍하게 격리돼 있는 자들'처럼 분칠했으니 말이다. 서명자들이 이석기 일당을 무슨 '양심수'쯤으로 간주했다면 그건 치명적 오인(誤認)이다.

 이들은 민주화된 국가의 기간 시설을 폭파하려 한 죄목으로 기소된 엄연한 형사피고인들이다.
고문(拷問)과 긴급조치와 군사재판을 받는 '양심수'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런 범죄 피고인들을 무턱대고 그냥 "풀어주라"니,
아니, 그럼 대한민국의 사법제도는 있으나 마나 하단 소린가?

 종교 지도자들이 감싸야 할 진짜 정치범들은
수원 구치소가 아니라 요덕 수용소에 있다.
부처님 예수님 제자들이라면 목소리 큰 이석기 일당보다는,
당연히 이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돼 주어야 할 것이다.
이게 '착한 멘토링' '좋은 멘토링'이다.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 전 조선일보 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  
[조선일보, 2014.8.5 '류근일 칼럼'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