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이 북한·파키스탄의 核개발 후원자!

    2009년 기사를 다시 읽었다.
    미국 핵폭탄 설계자가 중국 핵시설을 10년간 방문 조사하고 쓴
    화제의 책 <核특급〉

    趙甲濟   

    ⊙ 1982년에 鄧小平이 이슬람과 공산국에 核확산하기로 결정 
    ⊙ 중국, 파키스탄에 핵기술과 핵폭탄 설계도 제공, 이란-북한의 미사일 거래 방조 
    ⊙ 북한의 핵개발 막는 척하면서 배후 조종
    ⊙ 북한이 지난 4월 5일 대포동 2호 미사일을 발사할 때 15명의 이란 대표단 참관
  •   李明博(이명박) 대통령은 폴란드를 방문 중이던 지난 7월 7일 바르샤바 영빈관에서 유럽의 유력 뉴스전문 채널 ‘유로뉴스(Euro News)’와 인터뷰를 갖고 “지난 10년간 막대한 돈을 (북한에) 지원했으나 그 돈이 북한 사회의 개방을 돕는 데 사용되지 않고 核(핵)무장하는 데 이용됐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고 밝혔다.
      
      金大中·盧武鉉(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 북한에 들어간 현금이 핵개발에 轉用(전용)됐을 것이란 대통령의 주장은 기자나 논평가들의 주장과는 차원이 다르다. 안보 관련 정보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이고, 안보상의 不法(불법)행위를 알면 대응조치를 취해야 할 책임자이기 때문이다. 
      
      敵(적)의 핵개발을 지원하는 행위가 정권적 차원에서 이뤄졌다면 이는 집단적 반란이다.
    그런 지원세력이 아직도 활동 중이라면 이는 ‘현존하는 명백한 위험’이다.
    이 지원세력이 지금도 金正日(김정일) 정권의 핵 및 미사일 개발을 옹호하고 있다면
    이는 신속한 대응조치를 요구하는 긴급사태다. 
      
      정부 여당은 이명박 대통령의 문제 제기에 후속 조치를 취해야 할 의무가 있다.
    정부는 먼저 좌파정권의 北核(북핵) 개발 자금 지원 의혹에 대한 汎(범)정부적 조사를 시작해야 한다. 이 조사를 근거로 하여 수사 착수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김대중 前(전) 대통령은 김정일과의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현대그룹을 통해 5억 달러(5000만 달러어치의 물건 포함)를 조성, 간첩 잡는 국정원을 시켜 해외의 김정일 비자금 계좌 등으로 보내주었다. 간첩 두목에게 거액의 불법자금을 건넨 정부가 국민들에겐 간첩 신고하라고 했던 시절이다. 
      
      제1차 평양회담에서 나온 6·15선언은 북측의 연방제(赤化)통일 방안을 상당 부분 수용했다.
    이에 따라 남한의 친북좌익 세력은 연방제 통일, 즉 공산화를 공개적으로 주장해도 감옥에 가지 않게 됐다. 
      
      노무현 정권은 공산화를 주장하는 利敵(이적)단체에 국가예산을 지원했다.
    6·15선언은 北核(북핵) 개발 자금 지원과 親北(친북) 좌익 세력 비호라는 두 가지 반역적 현상을 결과했다. 한국을 위협하는 김정일의 두 가지 무기 북핵과 친북은 6·15를 매개로 하여 결합됐던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한 말의 무게는 엄청나다.
    그가 제기한 의혹의 眞僞(진위)를 국민들이 알아야 한다.
    북한에 들어간 돈이 국민 세금에서 나왔기에 알 권리가 있다.
    적절한 후속 조치가 없다면 국민들은 이 대통령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리역 폭발사건의 참상
      
  • 중국 핵시설을 10년간 관찰했던 토머스 리드와 B.스틸만이 지은 <핵특급>.
    ▲ 중국 핵시설을 10년간 관찰했던 토머스 리드와 B.스틸만이 지은 <핵특급>.
  1977년 11월 전북 이리역(현 익산역)에서 폭발 사건이 있었다. 民需用(민수용) 화약을 싣고 광주로 가기 위해 下行線(하행선)에서 대기 중이던 화물열차에 실린 다이너마이트 등 폭약 25t이 폭발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사망 49명, 실종 7명, 중상 293명, 경상 717명, 가옥 전파 675채, 반파 1289채, 재산피해 80억원, 이재민 9000여 명이 발생했다. 화약 수송원 신무일씨가 소주를 마신 후 열차 내에 촛불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다가 촛불이 다이너마이트를 포장한 마분지 상자로 옮아 붙으면서 일어난 사고였다. 
  
  필자는 이 현장을 취재했다. 이리역 부근이 폭격을 당한 듯
초토화되어 있었다. 5t은 넘을 것 같은 기차의 쇠바퀴가 수백 m까지 날아가 떨어져 있었다.
  
  2006년 10월 북한 정권이 핵실험을 했는데, 폭발력은 TNT 환산 400t이었다. 이리 폭발 사건 때 폭약의 약 13배였다. 핵실험치고는 폭발력이 너무 작았다. 전문가들은 설계 미숙에 의한 불완전 폭발이라고 평가했다. 
  
  지난 5월의 2차 핵실험은 달랐다. 미국의 핵 전문 연구소들은 이 실험의 폭발력을 4000t으로 추산했다. 1차 때보다 폭발력이 10배 이상 늘었다. 3년간 북한 정권이 핵폭탄 기술을 발전시켰다는 증거였다. 그래도 미사일에 실을 만큼 小型化(소형화)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고 하여 안도하는 이들도 있다. 핵전문가들은 막연한 낙관론을 경계한다. 
  
  북한 정권은 핵폭탄을 미사일이나 폭격기로 운반할 수는 없어도 배나 차량에 실어 부산항, 고리 원자력 발전소 부근, 혹은 광화문으로 잠입시켜 터트릴 수 있다. 피해는 어느 정도일까?
  
  1993년 2월 알 카에다 요원들이 트럭에 폭발물 630kg을 싣고 뉴욕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 건물 지하로 들어가 폭파시켰다. 트윈 타워 중 하나를 쓰러뜨려 다른 타워를 밀어붙이게 하여 두 타워가 다 무너지도록 기획한 것이었다. 다행히 타워는 기울지 않았다. 그래도 6명이 죽고 1000명 이상이 다쳤다. 
    
  5000t의 핵폭탄이 광화문에서 터진다면?
  
  이 트럭에 만약 핵폭파 장치가 실려 있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예컨대 남아프리카가 개발한
핵폭탄(TNT 환산 5000t짜리로서 작은 트럭에 실을 만한 크기) 같은 것을 트럭에 싣고 와서 폭파시켰다면 피해는? 미국의 핵연구소들이 가상 시나리오를 썼다. 
  
  1. 길이 약 10km 타원형 지역, 즉 월스트리트에서 센트럴파크까지의 지역 내 건물들은 거의
다 파괴되고 거주자들은 사망한다. 
  
  2. 125街(가) 남쪽의 100만 이상 거주자들은 방사능에 노출되어 죽는다. 
  
  3. 100만명 이상의 맨해튼 지역 거주자들이 방사능 병에 걸린다. 
  
  4. 맨해튼, 브루클린, 호보컨 지역 집들이 불탄다. 
  
  북한이 보유한 핵폭파 장치를 맨해튼만큼 인구밀집도가 높은 광화문 지역에서 터트린다면? 100만명 이상의 서울시민이 사망할 터인데, 이런 기습을 당하고도 국가 지도부가 결사抗戰(항전)을 결심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항복하거나 휴전을 요청할 것인가?
  
  북한 정권은 지금 이런 수단을 확보한 것이다. 김정일과 북한군 장군들은 자신만만해 있지 않을까? 만약 김정일이 오늘밤 이 핵폭파 장치를 쓰기로 결심했을 때 북한에서 이를 저지할 사람이 있을까? 없다면 대한민국의 운명이 한 미친 자 손에 달려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 <핵특급>의 저자 토머스 리드.
    ▲ <핵특급>의 저자 토머스 리드.
  •   요사이 미국과 한국의 핵전문가들 사이에 화제가 되어 있는 책이 있다. 토머스 C 리드와 대니 B 스틸만이 共著(공저)한 <核特級>(핵특급·The Nuclear Express)이다. ‘핵폭탄과 확산의 政治史(정치사)’라는 책이다(미국 지니스 프레스 출판). 
      
      이 책이 관심을 모으는 것은 秘話(비화)가 많고 필자들이 핵폭탄 제조에 직접 관여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리드는 로렌스 리브모어 국립연구소에서 핵폭탄 설계에 종사했고, 포드 및 카터 행정부 시절엔 공군장관을 지냈으며 레이건 대통령의 안보 특보였다. 
      
      스틸만은 미국 최초의 핵폭탄을 만들어냈던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에서 핵폭탄 설계 등 업무에 종사했고, 13년간 핵관련 기술정보국을 이끌었다. 그는 10년간 중국의 핵관련 시설을 방문 조사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미국 핵폭탄 연구소의 정보책임자가 핵실험장, 핵폭탄용 플루토늄을 만드는 원자로 등 중국의 핵시설들을 10년에 걸쳐 방문 조사하도록 한 것인데, 그 배경은 무엇일까?
      
      스틸만은 “중국이 자신들의 높은 핵능력을 보여줌으로써 미국이 誤判(오판)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고 했다. 
        
      중국의 핵시설을 10년간 방문 조사한 사람의 보고
      
  • 미국의 원폭 비밀을 소련에 빼돌린 클라우스 푹스는 중국의 핵폭탄 개발도 도왔다.
    ▲ 미국의 원폭 비밀을 소련에 빼돌린 클라우스 푹스는 중국의 핵폭탄 개발도 도왔다.
  •   그는 팀을 만들어 1990년 4월에 처음 중국의 핵시설을 시찰했다. 중국 정보기관들은 그들의 一擧手一投足(일거수일투족)을 추적, 감청했다. 스틸만은 중국의 핵폭탄 기술 개발이 높은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몇 분야에선 미국보다 앞서 있었다. 
      
      그는 여행 중 많은 과학자를 만나면서 중국이 1982년 이후 정책적으로 중동과 아시아 국가를 상대로 핵기술을 확산시켜 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고 한다. 1994년 방문 때 그는 “중국 원자력연구소장이 이란·이라크·파키스탄 과학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과학 장비들을 파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990년대 말 중국 방문 때는 중국이 오랫동안 프랑스와 핵개발에서 협조해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스틸만의 중국 여행은 1999년에 끝났다. 美(미) 하원 정보위원회가 중국이 미국의 수소폭탄 설계 정보를 훔쳤다는 요지의 보고서를 발표하자 중국 측이 대응조치를 취한 것이다. 
      
      이 책에서 스틸만은 10년간의 중국 핵시설 방문으로 얻은 정보를 공개하고 있다. 그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미국을 포함해 어느 나라도 혼자 실력으로 핵폭탄 개발에 성공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미국이 뉴멕시코州(주)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에서 최초의 핵폭탄을 연구하고 있을 때 영국·캐나다·이탈리아 등 외국인 과학자들이 많았다. 프랑스는 이스라엘의 핵개발을 도왔고, 이스라엘은 남아프리카의 핵개발을 지원했다. 파키스탄과 북한의 핵개발엔 중국의 지원이 있었다.
      
      중국이 1964년에 핵실험에 성공하게 된 데도 소련 간첩과 프랑스 과학자 등의 도움이 있었다. 미국 로스 앨러모스 연구실에서 핵폭탄 설계에 종사했던 클라우스 푹스는 독일인으로 공산주의자였고 일찍 소련 정보기관에 포섭된 스파이였다. 
      
      그는 나치의 압제를 피하려고 영국으로 건너가 물리학자가 됐는데, 미국의 원폭개발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던 것이다. 여기서 얻은 고급정보를 소련 측에 보낸 그는 영국에서 체포되어 징역형을 살고 나와 1959년 東獨(동독)으로 달아났다. 
      
      여기서 그는 중국 핵개발 책임자를 만나 미국이 최초로 개발한 원폭의 설계 개념뿐 아니라 수소폭탄에 대한 정보도 주었다고 한다. 푹스는 로스 앨러모스에서 일하던 1948년에 벌써 수소폭탄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 정보는 소련으로 넘어가 소련의 水爆(수폭) 개발을 도왔다.
        
      북한·파키스탄 핵개발 적극 지원
      
      중국은 1964년 10월 16일 우라늄 원폭 실험에 성공했고, 1967년 6월 17일엔 3.3메가톤(TNT 환산 330만t)짜리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미국 과학자들은 중국이 원폭에서 수폭으로 가는 데 32개월밖에 걸리지 않은 것에 놀랐다. 미국은 그 단계에서 7년이 걸렸던 것이다. 
      
      문화대혁명의 狂風(광풍)이 몰아치던 중국에서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가?
    스틸만은 10년간의 현지 조사로 이런 결론을 내렸다. 
      
      1. 간첩 클라우스 푹스의 정보 제공. 
      
      2. 연구자들의 높은 數學的(수학적) 분석 능력.
      
      3. 높은 해외 기술정보 수집 능력. 
      
      4. 서방에서 교육받은 과학 인력. 
      
      스틸만은 중국이 1980년대에 네 번의 실패 끝에 중성자탄 개발에도 성공했다고 썼다.
     그는 중국의 핵기술은 미국과 거의 同級(동급)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 책에서 중국의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이 중국의 핵 및 미사일 기술을 파키스탄 등 이슬람 국가와 공산국가(북한)에 확산시키기로 결정한 것은 1982년이었다고 주장했다.
    책의 일부를 인용한다. 
      
      <중국은 알제리와 비밀 협정을 맺고 원자로를 지어주기로 했다. CSS-2 미사일을 사우디아라비아에 팔았다. 북한에 대하여는 전폭적인 핵지원을 했다. 특히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중국은 라이벌인 인도의 宿敵(숙적) 파키스탄이 핵무기 개발에 나서자 기술자들을 초빙해 교육도 하고 CHIC-4라고 불리는 단순구조의 원자폭탄 설계에 대한 정보를 건네주었다. 
      
      파키스탄의 핵개발 책임자이고 요새는 ‘죽음의 핵상인’으로 불리는 A. Q. 칸 박사는 이 자료를 리비아에 팔았다. 리비아가 수년 전 핵개발 포기 선언을 할 때, 양복점용 하얀 플라스틱에 들어 있는 이 설계도의 존재가 알려졌다. 
      
      당시 파키스탄의 실력자는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지아울 하크 장군이었다. 그는 미국 편에 서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에 대한 저항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親美的(친미적)인 파키스탄이 중국으로부터 핵개발 지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겠지만 눈 감아 주었을 것이다.
        
      파키스탄의 핵실험 대행해 주기도
      
      중국은 파키스탄의 핵실험까지 代行(대행)해 줬다고 스틸만은 주장한다.
    중국이 ‘35번’으로 이름 붙인 핵실험은 1990년 5월 26일 신장위구르자치구 롭 누르 실험장에서 있었다. 우라늄탄이었는데, 폭발력은 10kt 정도로 추정됐다. 스틸만은 이 실험 때 쓰인 핵폭파 장치 CHIC-4는 8년 후인 1998년 5월 28일 파키스탄이 自國(자국) 내에서 실험했던 原爆(원폭)과 同型(동형)이라고 주장한다. 
      
      파키스탄은 인도가 핵실험을 하자 17일 뒤에 대응 핵실험을 했다. 이렇게 빨리 대응하고 또 미리 실험계획을 발표할 정도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1990년 중국에서 실험한 자료가 있었던 덕분이란 것이다. 
      
      미국도 1990년대에 영국을 위해 네바다 사막에서 핵실험을 한 적이 있다. 이스라엘과 남아프리카도 대서양에서 공동 핵실험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스틸만은 중국이 대행실험 때 기폭장치의 中性子(중성자) 발생 기술을 제공했다고 했다. 
      
      스틸만은 <핵특급>에서 파키스탄이 북한과 미사일-핵기술 교환 협정을 맺은 것은 베나지르 부토 총리 때였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노동 미사일 기술을 판매하고 파키스탄은 농축우라늄 기술을 북한에 제공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북한노동당 국제담당 비서이던 黃長燁(황장엽) 선생은 필자에게 이런 증언을 한 적이 있다. 
      
      <1990년대 초반 金日成(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에도 핵무기개발 책임자(노동당 군수공업부장) 전병호가 핵실험 계획을 세워 허가를 받으려 했습니다. 전병호는 “우리는 핵실험 준비가 다 되어 있는데 왜 주석께서 허가를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불평도 했어요.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후엔 나를 찾아와 “러시아에서 플루토늄을 얻어올 수 없을까”라고 묻더군요. 내가 “왜 아직도 충분하지 않은가”라고 했더니 그는 “몇 개를 더 만들어놓아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 얼마 뒤 전병호가 나타나더니 “이젠 됐다. 파키스탄과 협력하기로 했다”고 말했습니다.>
      
      파키스탄은 1998년 5월 28일에 다섯 차례, 30일에 여섯 번째의 핵실험을 했다고 발표했다. 미국은 여섯 번째 핵실험을 한 지역에서 플루토늄을 검출했다. 파키스탄은 우라늄 농축 방식의 핵개발을 하고 있었기에 이 플루토늄彈(탄)을 두고 소문이 많았다. 북한에서 가져온 플루토늄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 실험을 북한의 기술자들이 현장에서 참관했다는 정보도 있었다. 
        
      북한, 중국의 原爆 설계를 개량
      
  • 파키스탄 핵개발 책임자 A.Q.칸 박사.
    ▲ 파키스탄 핵개발 책임자 A.Q.칸 박사.
  •   스틸만은 자신의 책에서 여섯 번째 핵폭파 장치에 들어간 플루토늄은 파키스탄 측이 원자력발전소에서 불법적으로 빼낸 핵연료에서 재처리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스틸만은 북한의 핵개발에 중국의 지원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중국의 친구들’이 북한은 중국의 CHIC-4型(형) 원폭 설계도를 개량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했다고 소개했다. 이 설계도는 중국이 핵개발 도상국들에 대한 일종의 ‘수출용’으로 설계한 것으로 핵탄을 만들기 쉽도록 되어 있다. 
      
      스틸만은 파키스탄·북한·리비아·이란에 이 설계도가 넘어갔다고 본다.
    스틸만은 2006년 10월 9일의 북한 핵실험에 사용된 설계도는 우라늄탄인 CHIC-4를 플루토늄용으로 변형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이 형이라면 12kt의 폭발력이 나와야 하는데 설계치의 약 4%인 400t에 그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1. 폭파장치의 설계 미숙.
      
      2. 중성자 발생장치의 고장. 
      
      3. 설계 변경 시의 착오. 
      
      스틸만은 북한이 농축우라늄이나 원시적 형태의 핵폭탄을 만들면 미사일처럼 외국에 팔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2000년에 리비아는 50개의 중거리 노동 미사일을 수입하는 데 6억 달러를 지불했다. 북한은 2006년의 핵실험으로 유엔의 제재를 받는 가운데서도 시리아에 영변식 원자로를 지어주다가 이스라엘의 폭격을 自招(자초)했다. 
      
      북한이 지난 4월 미사일을 발사하는 현장에는 이란 참관단이 와 있었다고 한다. 중국-파키스탄-북한의 핵개발 트라이앵글과 함께 북한-이란-시리아의 핵 및 미사일 거래 트라이앵글이 작동하고 있다. 
      
      스틸만은 이렇게 썼다. 
      
      <중국은 핵 및 미사일 기술을 이란·시리아·파키스탄·이집트·리비아·예멘에 파는 데 있어서 북한을 再(재)이전의 포인트(re-transfer point)로 이용해 왔다. 중국은 북한-파키스탄 사이의 미사일 및 핵장비 거래를 지켜보면서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중국과 북한의 장교들은 1998년 및 2006년 미사일 발사 실험 전 긴밀하게 정보를 교류했다.>
      
      북한은 파키스탄에서 우라늄 농축용으로 만든 왕복 가스 실린더에 제6불화 우라늄을 채워 리비아에 밀수출한 적이 있다. 당시 리비아는 파키스탄의 칸 박사에게 1억 달러를 주기로 하고 원폭용 우라늄 농축 시설을 만들고 있었다. 
        
      중국은 말리는 시늉만 할 뿐
      
  • ‘리틀 보이’라는 별명의 우라늄 원폭이 B-29폭격기에 실리고 있다. 이 최초의 핵폭탄은 1945년 8월 6일 오전 히로시마에 투하됐다. 무게는 4.4t.
    ▲ ‘리틀 보이’라는 별명의 우라늄 원폭이 B-29폭격기에 실리고 있다. 이 최초의 핵폭탄은 1945년 8월 6일 오전 히로시마에 투하됐다. 무게는 4.4t.
  •   스틸만은 이런 핵 및 미사일 거래는 중국의 묵인이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핵물질과 미사일 수출에는 중국 영공을 지나는 항공편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틸만은 북한이 차베스가 좌경화시킨 베네수엘라나 反美的(반미적)인 멕시코에도 접근할지 모른다고 했다. 
      
      2006년 북한의 핵실험 직후 북한을 방문, 김정일을 만난 중국의 국무위원 탕자쉬안(唐家璇)은 김정일에게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 자리에서 김정일은 “추가 핵실험은 없다. 금융제재를 풀면 6자회담에 돌아가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스틸만은 중국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사실상 지원해 왔으므로 ‘갑자기 진지해져서’ 김정일에게 개발 중지를 주문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너무 도발적인 행동은 삼가라는 충고가 있었을 것이라고 평했다. 
      
      스틸만은 1982년에 덩샤오핑이 제3세계, 특히 이슬람과 공산권 국가들의 핵개발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이후 중국이 일관된 행동을 해왔다고 본다. 중국은 이들 국가의 핵 관련 과학자들을 훈련시켜 주고, 기술을 넘겨주고, 핵운반 수단을 팔고, 그런 목적을 위한 기초공사를 해주었다. 이렇게 핵기술을 확산시켜 놓은 중국이 북한의 핵개발 저지에 나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중국과 북한은 共犯(공범)이란 이야기다. 
      
      스틸만은 미국의 핵관련 전문가들 사이에서 북한은 ‘聖域(성역)’이나 ‘자유무역지대’로 불린다고 했다. 북한은 다른 핵개발 국가(주로 이슬람 국가)를 위한 창고, 수리창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라크와 같은 이슬람 국가와는 달리 북한은 비밀이 보장되고 어느 나라로부터도 공격을 받지 않는다는 보장이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때는 후세인이 미국의 침공 이전에 핵개발 시설을 북한으로 옮겼다는 소문(가능성이 거의 없지만)이 돌 정도였다는 것이다.
      
      미국 의회조사국(CRS)의 한반도 전문가인 래리 닉시 박사는 북한의 제2차 핵실험에 대한 유엔의 對北(대북)제재 결의 1874호가 公海(공해)상에서 의심 가는 북한의 선박을 세우고 수색하는 데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히 명시한 반면, 항공 화물의 검색에 관해서는 모호하게 해놓는 바람에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북한의 대량살상무기는 항공로 통해 반출
      
      닉시 박사는 지난 7월 10일 자유아시아방송(RFA)과 한 전화통화에서 북한이 대량살상무기와 그 관련 기술을 수송하고 관련 과학자나 기술자를 교환하는 주요 경로는 해상교통이 아니라 항공교통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북한과 이란을 오가는 항공기에 실린 북한 화물을 검색하는 것이 열쇠라는 설명이었다. 문제는 이 항공 검색의 열쇠를 중국이 쥐고 있다는 점이다.
      
      닉시는 북한이 여러 나라에 미사일이나 관련 기술을 수출해 매년 15억 달러가량을 벌고 있는데 이의 최대 수입국은 이란이며, 북한이 지난 4월 5일 대포동 2호 미사일을 발사할 때도 15명의 이란 대표단이 참관했던 사실을 들었다. 
      
      이 같은 북한과 이란 간 미사일 협력은 중국 당국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란과 북한의 항공기들은 중국 당국의 領空(영공) 통과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닉시 박사는 “최근 필립 골드버그 국무부 조정관이 이끄는 미국의 대북 제재 전담반이 중국을 방문해 중국의 외교부, 인민은행, 세관 등 관계자로 구성된 정부 합동대표단을 만났을 때, 중국 측에 대해 북한으로부터 미사일 등 무기를 이란으로 반출하는 항공기의 영공 통과를 허가하지 않도록 촉구하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중국이 유엔 안보리의 제재 결의보다 그 범위나 강도가 높은 항공수색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란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유아시아방송은 보도했다. 
      
      스틸만과 리드의 책을 읽으면 중국이 핵확산 장려에서 핵확산 금지라는 전략적 대전환을 하지 않는 한, 북한에 대한 국제제재에 협조하기는커녕 협조하는 척하면서 방해만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중국이 1983년에 알제리에 지어준 15메가와트 重水爐(중수로)는 원폭용 플루토늄 생산을 위한 것이라는 의심을 사고 있다. 매년 3kg 정도의 플루토늄을 생산하는데, 이는 나가사키급 핵폭탄 하나를 만들 수 있는 양이다. 이 시설이 발각된 것은 착공 8년 뒤였다. 
      
      중국은 1980년대에 사우디아라비아에 CSS-2 중거리 미사일을 팔았다. 이 미사일은 목표물에서 1.6km나 빗나가는 일이 많아 재래식 무기나 화학무기 운반용으로는 적당하지 않다. 이 미사일은 중국이 개발한 CHIC-4형 원폭 운반용이라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에 자금을 대고, 개발한 핵탄두를 얻는다는 구상을 실천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왔다. 사우디아라비아가 50개의 CSS-2 미사일에 장착할 핵탄두를 파키스탄으로부터 구입하는 데는 1주일분의 기름 수출액이면 족하다고 한다. 
        
      중국에서 새 지도부 등장해야 핵확산 멈출 것 
      
  • 사이판 옆 티니안 기지에서 ‘뚱보(fat man)’란 별명을 지닌 플루토늄 원폭을 폭격기에 싣고 있다. 이 폭탄은 1945년 8월 9일 오전 나가사키에 투하됐다. 무게는 4.6t.
    ▲ 사이판 옆 티니안 기지에서 ‘뚱보(fat man)’란 별명을 지닌 플루토늄 원폭을 폭격기에 싣고 있다. 이 폭탄은 1945년 8월 9일 오전 나가사키에 투하됐다. 무게는 4.6t.

      중국은 이란에서 原油(원유) 수입량의 14%를 수입한다. 중국은 이란에 재래식 무기를 팔고 핵 및 미사일 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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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이 이런 식으로 핵을 확산시키려는 목적은 무엇인가. 덩샤오핑은 19세기식 세력균형을 추구하려 했던가? ‘중국의 敵(적)의 적’은 중국의 친구가 될 것인가? 핵무장한 파키스탄이 인도를 견제하고, 핵무장한 북한은 미국을 흔들 것인가? 
      
      덩샤오핑이 이런 핵확산을 추구하는 것은 그렇게 하여 핵전쟁이 일어나도 오히려 중국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것인가? 인구가 많은 중국은 그런 핵전쟁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는 존재가 된다고 믿는 것인가? 그런데 중국이 도와준 파키스탄의 핵은 과연 관리 가능한 존재인가?
      
      이 책의 共著者(공저자) 리드와 스틸만은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중국 지도부에서 새로운 세대가 등장해야 핵 확산에 대한 중국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스틸만과 리드는 이 책에서 세계의 골칫거리인 舊(구) 소련의 핵물질 관리에 대해 무시무시한 계산을 했다. 소련이 갖고 있던 핵물질의 0.1%가 실종됐다면 이는 1200kg의 농축우라늄과 140~170kg의 플루토늄이 북한이나 알카에다 같은 조직에 넘어갔다는 뜻이 된다. 이 양은 16개의 우라늄 원폭이나 23~27개의 플루토늄 원폭을 만들 수 있는 양이다. 
      
      북한은 2000년부터 황해북도 평산군 평화리의 남천화학연합기업소를 확장했다. 우라늄 原鑛(원광)을 캐 와서 이를 精鍊(정련)하여 옐로 케이크를 만들고 다시 이를 6불화우라늄으로 변화시키는 공정을 가진 공장이다. 
      
      북한은 여기에다가 파키스탄에서 밀수한 가스 확산-원심분리 방식의 농축 우라늄(핵폭탄용) 시설을 추가해 일관체제를 갖추려고 했다. 원심분리를 하려면 고속 모터를 많이 만들어야 하는데, 이는 기술적 장벽으로 남아 있어 아직은 무기급 우라늄을 농축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 脫北(탈북) 과학자는 김대중-김정일 회담 이후 이 우라늄 농축 시설이 확장된 것은 對北(대북)송금과 관계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남천기업소를 확장하는 데 적어도 2억 달러는 들었을 것입니다. 3억 달러가 없어 흥남비료공장 현대화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인데, 갑자기 남천기업소를 확장하게 된 데는 남한 등 외부로부터 들어온 돈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영변 핵연구 단지에서 플루토늄 핵폭탄 개발에 종사하는 인력은 약 3000명, 남천기업소에도 약 3000명의 기술자가 일하고 있습니다. 간접 인원까지 치면 약 1만명의 기술인력이 핵개발에 투입되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미사일 제조에 참여하는 인원은 1만5000명쯤 됩니다.”
        
      對北 금융봉쇄로 돈줄 말려야
      
      그는 북한이 연간 15억 달러 정도를 미사일 수출로 벌어들인다는 미국 측의 추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좀 많이 잡은 것 같습니다. 미사일 輸出價(수출가)는 사정거리 1km당 100만 달러 정도입니다. 사정거리가 500km이면 500만 달러입니다. 原價(원가)는 25% 정도인데, 이 가운데 상당부분은 수입 부품 및 자재 값입니다. 
      
      따라서 국제사회가 무기용 부품 및 자재의 수입을 차단하고 미사일 수출을 막는다면 현금 경색에 시달리게 되고 이는 핵개발도 어렵게 할 것입니다. 농축 우라늄식 핵개발에는 고압 알루미늄관 등 핵심 기자재의 수입이 필요합니다. 다만 중국이 어느 정도 협조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북한은 1980년대에 이라크와 싸우는 이란에 각종 무기를 팔아 적어도 30억 달러를 벌었다. 1990년대엔 공산권의 붕괴로 외화 조달에 큰 애로를 겪었고, 이 시기에 대량 餓死(아사) 사태가 일어났다. 2000년부터는 좌파정권이 집권한 한국으로부터 현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식 집계만으로도 좌파정권 10년간 약 30억 달러의 현금과 약 40억 달러의 물건이 南(남)에서 北(북)으로 들어갔다. 
      
      2008년부터 이명박 정부가 대북 실용정책을 취하면서 이런 지원이 끊어졌다. 그럼에도 올해 들어 북한 정권은 18발의 미사일을 발사하고, 두 번째 핵실험을 했다. 여기에 들어간 돈을 정부 측은 약 7억 달러로 추산한다. 
      
      미국은 유엔의 대북제재 결의에 따라 지금 북한 정권에 대한 전면적인 금융봉쇄망을 만들어 가고 있다. 북한은 김정일의 重病(중병)으로 사령탑이 흔들린다. 김정일 정권은 달러가 돌지 않으면 기능에 큰 장애가 생긴다. 
      
      김정일 정권은 체제유지를 위해 年間(연간) 30억 달러 이상의 外貨(외화)가 필요하다. 미사일과 핵개발, 黨(당) 및 軍(군) 간부들을 위한 선물비, 그리고 對南(대남)공작 자금에 들어가는 체제유지비다. 
      
      2007년 국정원은 미국 CIA와 합동으로 김정일의 해외 비자금 규모를 추적한 적이 있었다. 兩國(양국)의 국가정보기관이 이런 작업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국정원 관계자들에 따르면 미국 측이 정보 공유를 꺼려 이 작업이 마무리되진 못했으나 김정일의 해외 비자금 규모를 추정할 수는 있었다고 한다. 그 규모는 15억 달러 정도였다고 한다. 그때까지는 40억 달러로 추정됐다. 
     
  • 사이판 옆 티니안 기지에서 ‘뚱보(fat man)’란 별명을 지닌 플루토늄 원폭을 폭격기에 싣고 있다. 이 폭탄은 1945년 8월 9일 오전 나가사키에 투하됐다. 무게는 4.6t.
    ▲ 사이판 옆 티니안 기지에서 ‘뚱보(fat man)’란 별명을 지닌 플루토늄 원폭을 폭격기에 싣고 있다. 이 폭탄은 1945년 8월 9일 오전 나가사키에 투하됐다. 무게는 4.6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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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무기를 만들었다가 폐기한 나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뿐이다.
    백인 지배층이 인종차별로 세계에서 고립된 상황에서 체제를 지키려고 이스라엘의 도움을 받아 핵폭탄 6개를 만들었으나 백인지배가 흑인지배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핵무기를 포기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했다.  
    [출처: 월간조선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