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류근일 칼럼>
                                          
                           또 음모론
   
  또 음모론이다.
무인기(無人耭)가 북한에서 날려 보낸 것이 "아닐 가능성 높다"는 것이다. 그것이 북한 것이라고 한 국방부 발표는 너무 허술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가까이는 천안함 폭침 때도, 멀리는 6. 25 남침 때도
 “그게 북한 소행일 리가 없다”는 음모론이 어김없이 출몰했다.
 
 공통된 것은 이들 음모론들은 대한민국의 정직성과 선의(善意)를 100% 불신한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이 주장하는 것은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지 않겠다는 것이다.
 왜? 그들의 ‘이론’인즉 헐리우드 범죄영화 급(級)이다.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실세 중 실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막후 권력이다.
 이는 미국 CIA, 한국 CIA, 군(軍)정보기관, 극우 마피아, 매판재벌을 한 데 합쳐놓은
흑막 속 ‘괴력(怪力)’이다. 이 ‘괴력’이 정계, 경제계, 미디어, 군부, 경찰, 검찰, 법원, 문화계,
사회단체, 통반장까지 모든 부문을 틀어쥐고 그것을 배후에서 조종한다. 
 ‘괴력’의 지배 수단은 폭력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안 되기 때문에 그것을 호도할 각종 음모극과 조작극을 연출한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처럼, 적(敵)의 수괴나 침략도 실은 조작인 것이다. 당국이 발표하는 ‘북한소행’ ‘종북소행’ ‘안보위기’ 운운은 그래서 무조건 믿지 말아야 한다.”
 
 미신, 맹신, 광신 같은 음모론이다.
웃지 못 할 노릇은, 권위주의 시대엔 각종 음모론들이 그럴싸하게 먹혀들었다는 사실이다.
권위주의 정권이 워낙 공작, 음모, 조작의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파헤쳐야 할 언론이 제 구실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실의 흔적이라도 건지기 위해선 ‘바람이 전하는’ 소문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땡전 뉴스’보다는 ‘카더라 방송’을 더 믿었던 것이다. 신문사 논설위원들까지도
그 무렵엔 밖에 나가 들은 귀엣말로 겨우 12. 12 사태가 뭔지를 알게 됐으니까.
 
 그러나 민주화가 이룩되고, 은폐의 차단막이 걷히고, 권력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고,
 시민사회가 활성화 되고, 정규언론이 되살아날수록, 음모론자들이 설 땅은 급속히 쪼그라들었다.
‘카더라 방송’의 약발도 당연히 떨어졌다. 그렇다고 음모론이 영 말라죽게 된 건 아니다.
민주화를 전후해 그들이 먹고 살 새로운 공간이 열렸기 때문이다.
 
 민주화 운동이 체제변혁 운동으로 극단화 하면서 우리 사회엔 RO라는 시장(市場)이 생겨났다. RO는 아니더라도, 건국세력이 한 일을 ‘반(反)민족적’이라 몰아 부치는 시장도 생겨났다.
 “1%냐, 99%‘냐”라는 선거용 격투기장도 만들어졌다. 갑(甲)의 횡포도 있고 이에 대한 을(乙)과 병(丙)의 비명(悲鳴)도 있다.
 
그래서 이런 적의(敵意)들이 사회 곳곳에 파열음(破裂音)을 내고 있는 게 오늘의 우리 현실이다. 민주화 이후의 음모론자들은 바로 이 남-남 갈등 현장에서 그들의 새로운 먹 거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 시장에서, 음모론자들은 고객의 수요에 맞춰 “저쪽이 하는 말은 순전한 조작, 자작극, 거짓이고, 그 반대가 진짜”라는 ‘뒤집기 시리즈’를 출시(出市)했다.
 
 “김현희는 안기부가 만들어낸 가짜” “무장공비 앞에서 이승복 소년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했다는 건 조선일보의 조작” “미국 쇠고기 먹으면 뇌 송송, 구멍 탁” “연평도 포격은 남쪽이 자극해서, 북은 쏴야지...” “이승만과 김노디 사이엔 사생아 있었다” “교학사 역사교과서는 김구, 류관순을 테러리스트라고 기술...” 등등..
 
 이 ‘뒤집기’들은 결국 선동이고 모략이고 조작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음모론자들과 그들의 고객에겐 자신들의 ‘뒤집기’가 진실이냐 아니냐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진실이 아니더라도 우기면 된다”는 게 그들의 전략이다.
자신들의 우기기를 불문곡직 사주는 인구가 30%는 되고, 거기다 부화뇌동까지 합치면
45%는 족히 되리란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그들을 향해 “어떻게 저렇게 철판 깔고 떠벌이지?”라며 기막혀 하는 건 순진한 반응이다. 그들은 그런 순진파의 시선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패거리와 자기 고객만을 바라보고 살면 된다. 세상이 짝 갈라져 있기 때문에 그래도 본전은 된다는 속셈이다.
 
 소크라테스 당대에도 소피스트(궤변학파)의 영업은 따로 잘나갔다.
오늘의 소피스트들은 이렇게 떠든다
“무인기는 이쪽에서 만들어 갖다놓은 것.”
“무인기를 북한 것이라 떠든 사람들은 코 다칠 날 있을 것.”
소크라테스가 이걸 들었다면 뭐라 했을까?
쿵 딱 하고 “얼씨구?” 했을 것 같다.
 
류근일 /뉴데일리 고문, 전 조선일보주필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