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선진화포럼 /선진화포커스 제156호]
    교육이란 혼(魂)을 나누는 소통이다

    박 일 영   /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겸 김수환추기경연구소장
     
      30여 년 전 유럽 유학 시절에 시청했던 TV 중계의 한 장면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 때 스위스에서 페더레이션 컵(Federation Cup)이라는 여자 테니스 국가대항전이 열리고 있었다. 당시 시합에 참가한 한국 여자 선수가 시합 중 휴식 시간에 감독으로부터 작전 지시를 받는 장면이 화면에 비쳐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건장한 체격의 남자 감독은 앉아서 장황하게 지시를 하고, 가냘픈 몸매의 여자 선수는 땀을 뚝뚝 흘리며 선 채로 묵묵히 듣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시청자들이나 해설자들이 감독의 권위주의적이고, 비교육적(?) 처사를 비난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위에 묘사한 풍경과는 달리, “선생은 서서 배우고, 학생은 앉아서 배운다.”라는 말이 있다.
    사실, 일상적인 교실 혹은 강의실의 풍경이다. 이렇게 보면, 교육이란 어느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만 가는 단일로(單一路)나 일방통행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육의 요체란 진리에 다가가기 위하여 마주 보고 소통(communication)하는 일이다. 대개는, 가르친다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서서, 배운다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앉은 상태로 주고받으면서 나누는 것이다. 그와 같은 자세의 대비는 배우기보다 가르치기가 그만큼 더 어렵고, 그만큼 더 겸손한 자세로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이치가 아닐까?

      그럼, 교육에서는 무엇을 주고받는가? 무얼 나누는가? 그걸 필자는 혼(魂)이라고 말하고 싶다. 본래의 나를 찾아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전적으로 나누는 것이라고 해도 되겠다. 혼 또는 자기 존재에 해당하는 순 우리말 개념은 바로 ‘얼’이다. 한국 전통사상 속에서 얼은 전인적 인간인 ‘몸’ 속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나가기도 하는 요소로 상정된다. 그렇다면 얼이 나간 이가 바로 ‘얼-간-이’가 된다. ‘생각’ 없이 죽은 지식만을 주입하는 교육은, 시험문제 하나 더 맞히는 정량화로 기울어진 교육의 결과는 얼간이의 양산을 초래하게 된다. 뜻 있는 이들이 우려하는 바와 같이, 왜곡된 우리 교육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그것이 가정교육이든 학교교육이든, 사교육이든 공교육이든 말이다.

      대책 없는 얼간이의 양산 대신 우리는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라는 들숨날숨의 긴 호흡으로 진리를 캐고, 사랑을 키우며, 봉사를 체화(體化)하는 ‘얼-온-이’들을 키워내야 하겠다. 얼이 나간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얼이 들어온 사람이 바로 얼-온-이다. ‘어른’은 바로 ‘얼온이’에서 나온 말이다. 덩치[지식의 양]만 크고 마음[얼, 혼]은 작은 기형아들을, 얼간이들을 양산해 내는 일을 중단하고, 몸과 마음이 균형 잡힌 인간, 즉 어른을 키워내야 한다. 그럴 때에라야 교육의 진정한 희망이 보일 것이다.

      사람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옛 어른들이 말하곤 했다. 얼굴은 본래 ‘얼-골’이었다. 오래 된 우리글들을 읽어보면 ‘얼골’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얼굴은 그러니까 ‘얼이 박혀 있는 골짜기’로서, 그 사람의 인품을 드러내 보여주는 바로미터이다. 얼이 제대로 박힌 얼굴을 지닌 어른의 모습에서 풍기는 기품(氣品)은 성형수술로 급조된 인조미인들 보다 얼마나 더 아름다운가! 이미 돌아가신 분들이지만, 마더 데레사의 얼굴에서 그리고 김수환추기경이나 이태석 신부의 얼굴에 피어나던 미소에서 우리는 얼마나 아름다운, 인간다운 모습을 발견하는가!

      세상에서 ‘가장 높은[宗] 가르침[敎]’을 베푼다는 종교의 교조들이 훌륭한 교육자로 숭앙 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 하겠다. 종교유형론에 따르면, 동양종교[불교, 유교, 도교]들은 ‘스승형’ 종교이다. 즉, 진리를 먼저 깨우친 스승이 앞 장 서서[pro-] 보여주고 고백한다[-fessor]. 그래서 선생[professor]이고 스승이다. 불교에서 승려를 일컫는 용어인 중이나 스님도 여기서 나온다. 사실 중, 스님, 스승이란 표현은 무당을 지칭하는 용어에서 유래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두 번째 임금 남해왕은 하늘에 제사를 정성스레 잘 드려서 모범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왕을 칭송하는 의미로 무당을 뜻하는 ‘차차웅’ 또는 ‘자충’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말이 줄어들어서 중이 되었다. 보통 사람들을 가르치는 교육자가 ‘중’이라 불렸고, 그런 교육자 역할을 고대에는 무당이, 불교의 도입 후에는 승려가 하게 된 셈이다. 그래서 함경도에서는 무당들의 결사체를 ‘스승청’이라고 하였다.

      예수는 3년 동안 공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을 ‘가르쳤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예수는 자기 스스로를 교사나 스승이라고 내세운 적이 별로 없다. 많은 경우 오히려 학생으로 자처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나오며 아버지로부터 배운다는 점을 밝히면서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요한복음 8,28)고 하였다. 그리스 교부 오리게네스가 했다는 “신은 인간을 영원히 교육시키는 존재”라는 진술도 이러한 맥락에서는 무색해 진다. 예수의 교육자로서의 정체성은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분명한 비전(vision)을 갖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끝까지 노력한 인물로 묘사된다. 전문가들의 견해에 의하면, 그와 같은 비전 내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예수가사용한 교육의 원리는 ‘개별성, 자율성, 독창성, 공동체성 그리고 케노시스(kenosis)’라는 다섯 가지이다.

      이상의 다섯 가지 원리 중에서 특별히 필자의 눈길을 끄는 것은, 스스로를 낮춘다는 자기비허(自己卑虛) 또는 자기방하(自己放下)로 번역되는 케노시스의 원리이다. 필자가 ‘케노시스’에 주목하는 것은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세계종교사의 맥락에서 볼 때에도 이와 같은 교육원리의 적용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존(至尊)한 존재가 이 세상에 강림하여 온갖 간난고초를 겪는 지저(至低)의 존재가 됨으로써 오히려 만민을 구원하는 구원자, 구세주가 되는 ‘돌아온 영웅’(héro revenant) 그리고/혹은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의 메커니즘을 세계종교 도처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케노시스’는 동서고금의 인류가 함께 꿈꾸는 이상적인 교육의 전형은 아닐까? 참된 인간을 기르기 위하여 이렇게 세계종교가 축적해 온 인류의 지혜를, 옛것을 본받아 새 것을 이루어내고자 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교육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 계승하기를 바래본다. 필자 역시 교육에 몸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동시에 자식을 기르는 아비의 심정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의 교육이 올바로 일으켜 세워지기를 기원한다. 특히, 천민적 교육정책과 무한 경쟁의 입시제도로 멍들어 가고 있는 장래(將來) 세대에게 삶의 절대적 의미와 영성적 풍요로움을 제시해 줄 수 있는 헌신적 교육자들이 많이 나와서 케노시스의 교육이 실현되기를 희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