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선진화포럼 /선진화포커스 제127호>
    우체국에서 사회주의를 목격하다

    배 진 영   /월간조선 차장
     
      내가 어린 시절에는 우표수집이 유행이었다. 또래들처럼 한때 열심이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것도 시들해져서 체계적인 우표수집을 그만둔 지는 오래됐다. 하지만 대통령취임기념우표만은 계속 수집해 왔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하던 지난 2월 25일 대통령취임기념우표를 사러 9시 15분경 우체국에 갔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1987년 이후 대통령취임우표를 사러 가서 이렇게 길게 줄을 선 것은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우체국 직원들은 전지, 시트, 초일봉피 등을 엮은 기념우표첩은 이미 매진됐고, 1인당 전지 1매, 시트 2매만 구입 가능하다고 했다.

      이른 아침이라 기념우표를 파는 줄만 길게 늘어서 있었고, 다른 창구에는 손님이 전혀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기념우표를 파는 창구는 하나뿐이었다.

      줄을 선 손님 대부분은 조용히 기다렸다. 나는 책을 꺼내 들고 읽으면서 줄이 줄어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성마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줄을 정리하는 청원경찰에게 “왜 다른 창구에서는 우표를 안 파느냐?” “몇 개 창구에서 나누어 팔면 이렇게 줄을 서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아무 권한도, 죄도 없는 청원경찰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죄송합니다”만 연발했다. 그리고 창구직원들은 손님들이 그렇게 항의를 하고, 청원경찰이 절절매는 것을 보면서도 나 몰라라 였다. 창구마다 취급하는 우편물의 종류가 정해져 있고, 기념우표를 파는 것은 해당 창구 담당자의 일이지 내 일은 아니라는 태도였다.

      한참 후에야 기념우표를 취급하는 창구가 하나 더 늘었지만, 그때는 이미 30분 가까이 기다린 다음이었다. 아까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들은 우표를 사면서 창구직원들에게 다시 한번 따졌다. 창구직원들은 말로는 “죄송하다”면서도, 왜 진작에 취급창구를 늘리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따지기 좋아하는 인간 만나서 피곤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정말 미안해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대한민국 땅에서 사회주의를 목격하다

      문득 ‘대한민국 땅에서 사회주의를 목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우체국이 아니라, 민간 매장이었다면 어땠을까? 어느 코너에서 특정 상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면, 다른 물품을 취급하는 코너의 직원들이 팔짱을 끼고 있었을까? 손님들이 항의해도 나 몰라라 하고 있었을까? 또 사장이나 매장 관리자는 그런 모습을 보고만 있었을까? 아마 부랴부랴 해당 상품을 취급하는 창구를 늘리고, 손이 빈 직원들을 투입했을 것이다.

      우정사업본부는 정부기구이면서도 일정한 정도 내에서 경영 측면을 접목시킨 조직이다.
    본부장은 공모로 채용되며, 기관 운영계획과 목표로 하는 성과를 미리 제시하고, 그에 대한 평가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일선 우체국 직원들은 여전히 ‘공무원 마인드’인데…

      이렇게 우체국 서비스가 낙후됐기 때문에 민간 택배업자들이 나타나고, 성업 중인 것이다. 이에 대해 우정사업본부의 대응은 신문에 광고를 내서 일반 택배회사에서 서신을 취급하는 것은 관련법상 위법이라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더 나은 서비스로 경쟁할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케케묵은 법령을 끄집어내서 민간 택배업자들과 그들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국민들을 위협하면서, 최소한 ‘서신’ 영역만이라도 지키겠다는 몸부림은 가소롭다 못해 애처로웠다.

      정부조직 개편이 논의되는 와중에 야당은 우정사업본부를 우정청으로 승격시키자고 제안했었다. 전국 곳곳에 방대한 조직망을 가진 우정사업본부의 직원들을 우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독일, 도이체 포스트를 DHL에 매각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 취임기념우표를 사러 가서 느낀 것은, 그것은 해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해답은 우정사업본부의 즉각적인 민영화다.

      민영화에 반대하는 공무원들이나 노조, 일부 시민사회단체들은 흔히 ‘공공성’을 방패로 내세운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공공성’이라는 것은 ‘경쟁 없이 편하게 살고 싶다’는 말의 다른 표현으로 들린다. ‘공공성’이라는 말은 한때 나도 참 좋아했던 말이지만, 지금은 내가 가장 혐오하는 말 중 하나다. ‘공공성’이라는 방패 뒤에 숨은 이기주의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정부조직개편안에 따르면 우정사업본부는 미래창조과학부 소속으로 되어 있다. 이는 과거에 우정사업본부가 체신부, 정보통신부 소속이었던 것의 연장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경쟁에 뒤처진 낡은 조직이 대한민국의 미래 먹거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신설한다는 미래창조과학부 산하에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그래서 좋은 것은 산하 인원과 조직을 자신들의 파워라고 생각하는 관료들뿐이다.

      차제에 우정사업본부는 민영화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고 사회민주주의의 전통이 강한 독일에서도 우정사업부문(도이체 포스트)을 글로벌 특송(特送)회사인 DHL에 매각해 버렸다.

      우정사업본부를 바로 민영화하는 게 어렵다면, 우정사업본부는 그대로 둔 채 우정사업본부의 사업영역을 민간 부분에 대폭 개방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우정사업본부가 관련법을 들어 택배회사에서 서신을 취급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주장하는 일은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식으로든 우정사업 부문에 경쟁을 도입해 손님들이 아무리 아우성 쳐도 자리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는 우체국 직원들의 정신이 번쩍 들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취임기념우표를 사러 갔다가 장시간 줄을 섰다고 해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식의 태만과 비효율은 정부 부처나 공기업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는 제한된 자원을 낭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에 대한 수술 없이 대한민국의 선진국 진입은 요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