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투가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다
  • 영천대회전은 1950년 9월 5일부터 13일까지 경북 영천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당시 북한군 15사단은 9월 6일 새벽에 기습공격을 감행, 영천시내를 완전장악했다. 영천은 대구와 경주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영천을 장악한 북한군은 대구와 경주를 모두 압박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육군본부는 한국군 2군단에 영천전투를 위임했고 유재흥 2군단장은 영천이 적의 주공격로임을 간파,국군 1사단과 6사단에서 각 1개 연대를 차출해서 영천수복 작전에 투입키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당시 영천 뿐 아니라 낙동강 전선 북부와 북동부 지역 전체가 북한군의 공격을 받는 상황이어서 1사단과 6사단에서 1개 연대씩 차출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두 사단 모두 북한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어 위태롭긴 마찬가지였다.
    결국 어렵게 1사단 11연대와 6사단 19연대가 차출되어 영천으로 투입되었다.

    한편 유재흥 군단장은  미군 전차의 지원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아군의 사기진작을 위해 전차지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군 역시 사정이 좋지 못했기에 돌아온 대답은 신통치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유재흥 장군은 미군 전차 5대(전차소대 규모)를 지원받는데 성공했다. 영천전투에 투입된 미군 전차는 유장군의 예측대로 아군의 사기진작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영천수복에 큰 공을 세웠다.

    영천을 점령한 15사단은 경주방향으로 진격해 나갔고 영천에는 북한군 후속부대가 진입했다.

    하지만  6사단 19연대가 북한군 후속부대를 격파하고 이틀 만에 영천을 수복하는데 성공했다. 영천을 수복한 국군은 항공지원과 포병지원 속에 경주로 향하는 북한군 15사단을 역포위했다.
    한국군에 둘러싸인 북한군 15사단은 4천명 가까운 병력이 전사하고 300 명이 넘는 병력이 포로가 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고 전투력을 완전 상실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영천 외에 다른 곳에서도 많은 전투가 벌어졌지만 사실상 대한민국을 구원한 전투는 영천전투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 이유는 영천전투 당시는 미국이 한국을 포기할 계획을 세워둔 상태였다. 미국은 대한민국 정부와 군대 등 62만 명을 미국령 사모아로 이주시켜 신한국(New Korea)을 건국한다는 계획(New Korea Plan)을 세웠을 정도다.

    물론 이 계획은 극비사항이었으나 영천이 적의 수중에 들어간 직후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 정일권 총참모장에게 이 사실을 설명주었다. 이에 놀란 정총장이 영천을 탈환한다면 이 계획을 백지화할 수 있겠느냐고 묻자, 워커 장군은 당연히 영천만 탈환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만약 한국군 2군단이 영천전투에서 패했더라면 인천상륙작전은 해보지도 못하고 대한민국은 패망했을 것이다.

    한국전쟁을 잘 모르는 세대는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이 지리멸렬하고 유엔군이 여유있게 승기를 잡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한국군, 미군 모두 눈 앞에 몰려드는 북한군을 막기에 분주했고 다른 곳을 지원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많은 위기가 있었고, 그 중 가장 큰 위기는 영천전투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 위기를 극복했기에 인천상륙작전도 가능했던 것이고 대한민국이 패망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