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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7일 사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정부가 대한적십자사 채널을 통해 이산가족 화상상봉 장비 구입용으로 현금 40만 달러를 북측에 전달했다. 이를 위해 대한적십자사 관계자가 그제 돈가방을 갖고 대북(對北) 수해복구 물자를 수송한 선박을 이용, 북한 남포로 갔다고 한다.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돈세탁 은행으로 지정된 '방코델타아시아(BDA) 사태'로 대북 송금 루트가 막히자 이런 어처구니 없는 편법을 구사한 것이다.
원래 현금 40만 달러를 북한에 제공하겠다는 정부의 발상 자체가 무리수였다. 정부 스스로 설정한 원칙을 어겼기 때문이다. 통일부가 발간한 '북한 핵실험 이후 대북정책 설명 자료'에도 '대북 지원은 모두 현물이며, 현금 지원은 일절 없습니다'라고 분명하게 적혀 있다. 그럼에도 이 정권은 반성은커녕 오히려 '뭐가 잘못이야' 하는 식으로 고집만 부리고 있는 것이다.
국가 간의 외화거래는 관련 은행을 통해서 해야 한다는 게 국제사회의 기본이다. 투명성을 보장받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현금을 지원한다면 어떻게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겠는가. 그 돈이 평양 지도부의 비자금으로 사용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무엇보다 핵 무장한 북한의 위협에 마치 조공하는 식으로 비춰질 수도 있는 방법을 택한 것은 말이 안 된다.
정부는 '이산가족 상봉 확대'라는 인도적 문제 해결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해명한다. 북한이 관련 장비를 구비할 만한 능력이 없는 데다, 컴퓨터는 대북 반출이 금지된 품목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현금 지원을 트기 위한 구실에 불과하다. 한국 정부가 중국에서 컴퓨터를 구입해 전달한다든지, 미국과 협의해 개성공단 사례를 적용한다든지 하는 등 다양한 대안들이 있기 때문이다. 인도적인 명분으로 포장해 돈가방을 싸들고 북한에 들어가는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지 걱정이다. 이제 국민의 자존심이나 국제적 시선에는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선언인지 지극히 우려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