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9일자 오피니언면에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가 쓴 시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그것은 핵실험에 의해 촉발되었다. 잘못된 행동에 보상할 수 없고 양자협상은 하지 않겠다던 부시 정부는 180도 돌변하여 직접협상을 통해 북한에 정치·경제적 보상을 약속했다. 북한의 화답도 놀라울 따름이다. 최근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장시간 키신저 전 국무장관과 만났다. 그의 발언은 귀를 의심하게 한다. 미·중 관계개선에 대한 깊은 관심과 함께 미국이 북한에 대해 ‘전략적 관심’이 있는지 물었다. 또 “한반도는 중국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외세의 침략대상이었다. 미국과의 전략적 관계는 북한에 도움이 되고 지역을 안정시킨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70년대 초 미·중 접근은 두 가지 측면에서 시사점을 갖는다. 하나는 미국이 소련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의 전략적 가치를 활용하고자 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미국이 대중(對中)수교를 위해 대만과 단교를 했다는 점이다. 김계관의 발언을 미·중 접근의 시사점에서 유추하여 평가하면, 북한은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전략적 이해에 협력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북한은 대중 경제 의존도가 높아지고 내정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내심 우려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핵실험 이후 중국이 북한지도부 교체를 시도할지 모른다는 소문과 관련해 미국을 끌어들여 이를 견제하려 한다. 또 하나는 미국이 대중수교를 위해 대만을 버렸듯이, 대미 전략관계를 통해 한국을 고립·견제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결국 김계관의 발언은 미국을 끌어들여 한국과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미국 때문에 핵무기를 개발했다던 북한이 왜 한국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에 목매달고 있는가? 중국은 80년대 이후 자본주의체제를 도입하여 북한체제와 정권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되어왔다. 더욱이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북한을 버리고 한국과 수교를 하였다. 고도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민주화도 달성한 대한민국의 성공은 북한에 흡수통일의 위협으로 다가왔다. 한국에 흡수되지 않고 중국의 위성국가가 되지 않기 위해, 북한은 두 가지가 필요했다. 하나는 핵무장이고 또 하나는 미국과의 전략적인 관계 설정이다.

    지난 17년간의 핵 협상 과정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북한의 의도가 명확해진다. 협상대상은 오로지 미국이다. 사실 부시 정부는 직접협상을 했던 클린턴 정부와는 달리 중동의 신질서 창출을 최우선과제로 하면서 북핵 문제를 중국에 거의 맡기다시피 해왔다. 이란 근해에는 2척의 항공모함이 있지만, 동해에는 북한이 미사일을 쏘고 핵실험을 해도 단 한 척의 항공모함도 온 적이 없다. 북한은 핵실험으로 중국을 제치고 대미 직접협상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둘째로 미국이 제한적인 핵무장을 묵인해 준다면 절대로 미국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미국을 공격할 수 있는 장거리 미사일은 포기할 수 있고 제3자나 테러리스트에게 절대 핵무기나 핵 물질을 이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셋째로 주한미군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91년 초 미·북 고위급회담에서 김용순은 주한미군을 인정하고 미국의 맹방이 될 수 있다고 전한 바 있다. 그리고 이제 미국의 대중(對中)전략에 협력할 수 있다는 점까지 추가하였다.

    이러한 북한의 시도가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했던 것은 대미 전략관계와 핵무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가지려 했기 때문이다. 핵 문제 해결이 전제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미국이 북한의 입장을 수용하기 어려웠다. 북한이 대중 견제에 협력하겠다는 것은 미국에게 매우 흥미로운 사태의 진전일 것이다. 미국이 북한의 핵무장을 묵인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돈다. 핵만 제외하면 미국은 북한의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한반도의 비핵화와 운명을 가름할 매우 중대한 시점에 서있다. 북한이 핵무장과 외세를 통해 생존의 틀을 구축하려 하는데, 우리는 정상회담과 평화협정이 누구에게 유리한지 국내정치적 해석만이 난무한다. 핵무기를 절대 불용한다는 우리의 원칙이 혹시 있을 미·북 타협의 불리한 구도를 예방하는 길임을 인식해야 한다. 북한도 정권의 생존과 주민들의 행복한 삶이 미국이 아니라 한반도 인구의 3분의 2와 경제의 99%를 차지하는 대한민국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는 점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