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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2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대중 고문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역학(力學)이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한국의 안보상황도 따라서 크게 달라지고 있다. 북한 김계관의 미국방문으로 미·북관계가 급작스럽게 호전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은 베트남에서 북한과 관계조정을 위한 협상을 했다(비록 당분간 결렬된 상태이지만). 미국의 국무·재무부의 고위층이 잇달아 중국을 방문, 중국의 한반도 중재 역할에 무게를 실어주는 인상을 주고 있다. 북의 김정일은 느닷없이 평양의 중국대사관을 찾아 새삼 우의를 다지는가 하면, 남의 이해찬 청와대정무특보가 평양을 찾아 남북정상회담을 타진했다.
이 같은 일련의 움직임은 2·13 6자회담 합의를 계기로 ‘핵을 가진 북한’의 지위가 부상하면서 한반도 주변의 전통적인 동맹·적대관계가 교차하며 재조정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에 있어 북한이 어제의 적대 국가가 아닌 것처럼 한국이 어제의 ‘친구’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취임 이후 지난 6~7년간 입만 열면 북한을 ‘악의 축’이니 독재국가니 인권탄압의 나라니 하면서 매섭게 공격해오던 부시 미국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보여줬듯이 요즘 북한과 김정일에 입을 다물다시피 하고 있다. 불과 몇개월 전까지만 해도 집어던졌을 2·13 합의를 ‘성공적’이라며 칭찬하고 있다. 달라져도 크게 달라졌다. 부시는 더 이상 ‘원칙’의 정치인이 아니다. 그는 북한핵에 사실상 굴복한 셈이다.
급한 것은 대한민국의 사정이다. 우리는 지난 50년간 안보에 관한 한, 무임승차해왔다. 미국이 전적으로 도왔다. 게다가 북한의 국력이 약했다. 중국이 자체 경제부흥에 여념이 없었고, 일본도 세계 경제대국으로의 이미지관리에 매달려 있었다. 그 바람에 우리는 안보를 의식하지 않고 비교적 순탄하게 경제발전에 힘쓸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사정은 달라졌다. 핵을 가진 북한이 미국을 상대할 만큼 커졌다. 경제에 탄력을 얻은 중국은 아시아의 패권에 향수를 느끼며 기지개를 펴고 있다. 일본은 미국과의 굳건한 관계를 배경으로 중국에 맞서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대리인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무엇보다 미국이 한국에서 떠나고 있다. 이런 상황이기에 우리의 안보무임승차 기간은 끝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한국의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 정권 사람들은 북핵을 자초하면서 미국의 철수를 구체화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작금의 미국의 태도는 무책임하게 여겨질 정도다. 미국이 한국에서 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노무현 정부가 바라던 바고 또 우리가 반대한다고 더 머물 상황도 아니다. 그동안 동아시아 정세가 크게 변했고 미국도 변했다. 한국에 대해 정이 떨어진 면도 있다. 그래도 나가려면 단계적 안전장치를 하는 것이 동맹관계국에 대한 예우다. 작전권 문제와 기존의 북핵을 처리하는 부시 정부의 태도를 보면 미국이 한국의 장래와 한국의 안보에 어떤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지 의아스럽다. 벨 주한미군 사령관이 지난 7일 북한이 2009년 핵보유국이 될 수도 있다며 한국군의 병력규모와 복무기간의 단축을 우려하는 발언을 한 것은 ‘우리가 나가는데 그래도 되겠느냐’는 것처럼 들려 우리를 은근히 약오르게 한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우리를 지킬 수밖에 없게 됐다. 누구의 탓이건 오늘의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우리도 살기 위해서는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 외교 역량을 배가하는 한편, 국방력을 강화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세금도 더 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우리도 북핵에 대비한 대등한 안전장치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핵에 대한 우리의 기존의 입장과 고정된 생각을 재고할 필요가 있음을 뜻한다.
우리 주변은 사방이 핵을 가졌거나 가질 수 있는 나라들이다. 북은 핵을 가져서 살아남고 미국 등 강대국과 교섭할 수 있었다. 물론 중국도 핵을 갖고 있다. 재처리 공장까지 갖고 있는 일본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순식간에 핵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로 돼 있다. 여기에 미국 ‘핵우산’의 억지력 뒷받침마저 기대할 수 없게 된다면 우리는 ‘핵이 난무하는 동아시아 네거리’에서 우리만 순진하고 착한 척, 속수무책으로 남게 된다. 북핵이 공격용이 아니라는 남쪽 대통령의 근거없는 추론만 믿고 손 놓고 앉아있을 수 없으며, 병력의 숫자와 복무기간만으로 국가안전이 보장될 수도 없는 일이다.
북의 핵을 용인하는 한, 미국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세계 어느 나라의 핵 프로그램도 저지할 명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