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혁명 1세대 빨치산 특권층을 집중적으로 견제끝내 김일성을 사실상 주석궁에 연금시켜
  • 김일성 사후 침실에서 발견된 유품은? 
      
    김일성 사후 생존한 빨치산 출신 동지들이 수령의 유언을 지켜줄 것에 대한 공동명의로 된 제의서를 김정일에게 바쳤지만 묵살되고 말았다. 
    장진성 /시인,

    김일성 사후 북한은 김일성 침실에서 발견된 유품이라며 두 개의 물건을 공개했다. 하나는 김일성 금고 안에 들어있던 건국동지 김책의 사진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성산혁명열사릉을 향해 창문가에 세워져 있던 포대경이었다. 북한 정권은 이를 두고 김일성의 “위대한 동지애”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즉 금고 안에는 천만금보다 귀한 동지애가 들어있었고, 포대경으로 동지들을 마지막까지 보살폈다고 말이다. 실제로 김일성은 그 포대경으로 주석궁 맞은 편에 있는 대성산혁명열사릉의 흉상들을 자주 보곤 했다고 한다. 그 흉상의 주인공들은 한반도 분단의 원흉들로서 북한에서 혁명의 1세대로 우상화 되는 인물들이었다.

     김일성은 새해 때마다 측근들에게 자주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 소원은 죽은 다음 대성산 혁명열사릉 동지들 옆에 묻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주겠다고 김정일 당 조직비서도 내게 약속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그 소원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김일성 사후 생존한 빨치산 출신 동지들이 수령의 유언을 지켜줄 것에 대한 공동명의로 된 제의서를 김정일에게 바쳤지만 묵살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수령의 교시는 곧 법이라며 누구보다 충성심을 과시하던 김정일이 왜 김일성의 유언을 위반했을까? 그것은 김일성 측근들에 대한 김정일의 거부의식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북한의 국가이념은 주체사상의 뿌리를 항일전통으로 내세웠지만 김정일의 권력철학은 그들을 시종일관 배격하고 견제했기 때문이다.

     6.25전쟁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 북한 정권의 권력구조는 지금처럼 수령 유일지도체제가 굳어있지 않을 때였다. 김일성과 동등하게 다른 빨치산 출신 권력가들도 자기의 위업을 내세우며 각자 목소리를 높였고, 그래서 정권 안에 여러 계파가 형성돼 있을 때였다. 때문에 김일성도 자기 머리가 나이보다 일찍 백발이 된 원인은 당 안의 종파들 때문이었다고 늘 말했을 정도였다.

     그런 권력 혼동 속에서 김정일의 존재는 더욱 보잘 것 없었다. 중국에서 모택동의 부인 강청이 문화대혁명을 주도하자 북한에서도 빨치산 출신 특권층과 그 자녀들이 모두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에 줄을 서 김평일을 후계자로 내세울 때였다. 이를테면 김정일에겐 권력초기부터 김평일과 함께 그를 지지했던 혁명1세대들까지도 모두 정치적 적수로 대립된 셈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혁명1세대와 김정일의 권력 갈등이 절정에 달했던 계기는 1966년 김정일의 당조직부 책임지도원 임명을 위한 회의에서였다. 김영주 측근들까지 가세하여 김정일의 당조직부 입성을 세습정치로 비판하자, 결국 김정일은 당선전선동부 지도원으로 밀려나게 된다. 김정일은 그때부터 김일성 신격화와 항일역사를 왜곡하는 선전선동 조작으로 자기의 지위를 굳히고, 그 정치적 배경으로 1973년 다시 당조직부에 도전하게 된다.

     김정일의 당 선전선동 지도력에서 후계자로서의 정치적 수완을 발견한 김일성은 당시 당 조직비서였던 김영주를 설득하여 내각 부총리로 옮겨주는 조건으로 김정일을 당조직부 과장으로 임명하게 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김정일은 온갖 굴욕을 참으며 빨치산 특권층의 신임을 얻기 위해 항일전통에 근거한 국가이념화와 그 실천에 주력한다.

     그러나 당 조직비서로 임명되자 김정일은 자기 권력지반 강화를 위해 노동당의 유일권력화를 단행하게 된다. 그 전까지 북한의 권력기관주체는 노동당과 인민경제를 전담하는 내각, 이렇게 양대 구조로 돼 있었다. 김정일은 당시 안정됐던 경제를 지렛대로 김일성유일지도사상 명목의 사상제일주의를 주장하며 당 절대주의 정치를 하게 된다.

    그 주된 목적은 빨치산 특권층을 견제하고 무력화하기 위해서였다.

    김일성은 공산주의 과도기인 사회주의 완성을 위해서는 경제가 우선이라고 봤기 때문에 내각정치를 하였다. 그래서 대부분 최측근들도 내각에 배치돼 있었던 것이다. 김정일은 그러한 권력질서를 그대로 두고서는 자기의 권력을 지속 발전할 수 없었다.

     하여 세계의 중심을 사람으로 규정한 황장엽비서의 인본주의 주체철학을 수령이 우선이라는 수령주의 관념철학으로 왜곡하고, 그것을 이론적 근거로 당의 이념절대주의를 실현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어 당과 내각의 양대 기둥에 서 있던 북한 정권은 김정일이 당 조직비서가 되고나서 졸지에 당의 지도만 받는 절름발이 국가가 된다.

     김정일은 당조직부 인사권을 토대로 간부들의 비리를 추적하는 당조직부 검열 4과를 신설하고, 이 체계를 확대하여 마침내 당 조직비서 제의서 비준제도를 완성하게 된다. 나중엔 그 권력집중을 내각의 행정결정권까지 독점하는 유일지도체제로 발전시켰는데 그 과정에 가장 먼저 숙청 된 사람들이 과거 자기의 세습을 반대하며 김평일을 내세웠던 빨치산 출신 특권층이다.

     혁명1세대로 존경되어야 할 그들이 불만 특정세력으로 커지자 김정일은 빨치산 출신 자녀들을 아예 중앙당에 받지 말도록 당조직부 내부 간부원칙까지 만들도록 하였다. 김정일이 그 자녀들에 대해서까지 혐오감을 갖게 된 또 다른 이유는 동시대 인물들로서 김정일의 과거를 누구보다 잘 아는 증언자들이기 때문이다.

     빨치산 일가라는 동등한 특권층 의식 속에서 김정일과 함께 어울려 성장한 그들에게 김정일은 신격화할만한 존재도, 후계자감도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현재 김정일의 최측근들 중 빨치산 자녀들이 있다면 최현, 오중성의 아들들인 최룡해 오극렬밖에 없다. 그 둘마저도 최룡해는 청년동맹 비서를 걸쳐 황해북도 도당책임비서, 오극렬은 당 작전부장, 이렇게 중앙당이 아닌 외곽기관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자기 자녀들이 지방 당이나 내각, 군부로 밀려나는데 대해 불만을 갖고 있던 김일성의 동지들은 당 조직부 인사억제 규정 비밀까지 알게 되자 집단적으로 금수산의사당으로 찾아가 항의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김일성은 주석궁 주인일 뿐, 더는 당 총비서도, 주석도 아니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김일성은 빨치산 동지들을 만나는 것조차 사전에 김정일의 결제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돼 버린다.

     아마도 김일성은 말년에 그리움을 넘어 참회하는 심정으로 금수산 창가에서 포대경으로 대성산열사릉 동지들의 흉상을 자주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김일성이어서 유언도 절절했겠지만 김정일은 끝내 지켜주지 않았다.
    만약 김일성이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영구 보존된다면 혁명1세대들에 대한 상징적 의미가 더 커질 것이고,  그러면 그들을 견제하고 배격했던 자기의 정체성도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불안심리를 반영하듯 김정일은 김일성이 사망하고 나서 뜬금없이 “혁명1세들에 대한 존경은 공산주의자들의 숭고한 도덕”이라는 논문을 노동신문을 통해 발표한다. 동지들 곁에 묻어달라던 그 간절한 유언마저 이루지 못한 김일성은 죽어서도 편치 못한 채 지금도 금수산 기념궁전에 홀로 누워있다.

    장진성 /시인, '내딸을 백원에 팝니다'저자/ 뉴데일리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