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에 쿠데타음모 책임 덮어씌워 협박...군최고사령관직 이양받아 소련 유학파 장성-지식인 모조리 숙청
  • 김정일의 북한군 권력장악 비화 
      
    김일성을 보다 경악하게 한 것은 그 조직구성원이 적국인 미국이나 한국이 아니라 사회주의 소련과 결탁된 세력이라는 것이었다. 
    장진성  /시인, '내딸을 백원에 팝니다' 저자 /뉴데일리 객원논설위원

    김일성은 죽기 전까지 김정일에게 그 어떤 공식직함도 양보하지 않았다. 김정일의 당조직부 실무 권력이 김일성의 당 대회와 정치국 소집 및 결의권한을 초월하면서 1980년 6차 당 대회 이후로 당 중앙 기능이 비정상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김일성과 김정일과의 권력 갈등을 보여주는 이런 일도 있었다. 1985년 소련 군사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였다.

    김일성은 김정일에게 전화를 걸어 대표단의 숙소와 방문스케줄을 좀 더 격이 있게 조정하도록 제안했다. 전화를 끊은 김정일은 소련군사대표단의 현재 일정을 김일성이 어떻게 알 수 있었는지 확인하도록 했다. 조직부가 추적해보니 금수산의사당(주석궁) 군사무관인 대장 김두남이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 국장 김학산에게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김일성을 옆에서 보좌한 군사고문 김두남은 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남의 동생이다. 조직부의 그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격노하여 김학산은 물론 김두남의 사업권한을 6개월 동안 박탈했다. 이렇듯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전횡을 일삼는 김정일에게 김일성이 군 최고권력인 최고사령관 승계를 공식화 할 수밖에 없었던 계기가 있었다.

    김정일의 최고사령관 추대가 공식 발표된 날은 1991년 12월24일이다. 그 의미를 더 부각시키자면 북조선만의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2·16이나 4·15일, 혹은 4·25같은 인민군 창립절도 있었지만 북한이 고작 전국중대장대회에서 기습적으로 발표한 그 까닭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김일성은 전국중대장대회를 앞두고 김정일로부터 문건하나를 받아보게 된다.
    그 문건에는 최근 인민군 무력부 내에서 쿠데타를 목적으로 치밀하게 조직화되고 있는 반정부 동향이 담겨 있었다. 김일성을 보다 경악하게 한 것은 그 조직구성원이 적국인 미국이나 한국이 아니라 사회주의 소련과 결탁된 세력이라는 것이었다. 그 문건은 1980년대 말 당시 사회주의 해체를 예감한 구소련 국가안보위원회(KGB) 요원들이 북한에 거액의 돈을 받고 팔아버린 비밀정보였다.

    북한은 1980년대 중반부터 군 장성들의 현대전 지휘능력향상을 위해 장군 양성기지로 불리던 위르실로프 총참모부 아카데미아, 연대장 이상 간부 교육 양성 기지인 프룬제 아카데미아, 레닌그라드 군의대학, 전자대학, 공군대학 등 20개가 넘는 구소련 군사대학들과 관계기관들에 무려 700명에 가까운 지휘관들을 군사유학 보냈다.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줄타기를 계속해온 평양 정권내부에 친 소련파가 득세하기를 원했던 소련으로서는 그 기회를 그냥 지켜볼 수만 없었다.

    하여 미인계, 금품로비, 협박 등 온갖 방법으로 북한 군사유학생들을 상대로 포섭공작을 벌였다. 그러나 곧 구소련 공산당의 정치개혁 소용돌이와 함께 그 필요성이 희박해지면서 KGB가 포섭한 실제 인원은 불과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료를 받아본 김정일은 당시 인민무력부 보위국장이던 중장 원응히에게 인민 무력부가 그동안 대(對)소련 정책에 안일하게 대응한데 대한 의견도 첨부해 실체를 부풀리도록 지시했다. 김일성에게 최고사령관 직위를 요구하자면 사태를 심각한 수준으로 왜곡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었다.

    사실 그동안 절대적인 친소정책을 추진해온 장본인은 김정일이었다. 그 사례로 북한에 주둔 중이던 소련군의 라모나 기지를 들 수 있다. 냉전시기 소련은 미국의 포위 구상에 맞서 동아시아 전략의 일환으로 평양 근교에 소련 군사위성 통신결속소를 세우는 방안을 제기했다. 이미 1960년대 북한에서 소련군이 완전히 철수한 상황에서 김일성은 크든 작든 또 다른 형태의 주둔을 반대했지만 김정일의 완강한 고집에 결국 수락되고 말았다.

    그 이후에도 김정일은 군사 암호 ‘208조’로 불린 소련 위성 통신결속소 성원들과 208조 단장이던 백 러시아 군관구 부사령관 웨리드좌노프 중장을 위해 평양시 중심구역에 호화주택도 짓게 했다. 평양시 서성구역 4.25문화회관 뒤에 위치한 그 건물은 훗날 허담의 미망인인 민주조선사 김정숙주필의 개인저택이 됐다. 1980년대 중반 소련이 재정적 어려움에 처해 라모나 기지를 철수할 때에는 미림군사대학에 나와 있던 40여 명의 소련 군사대학 교수들까지 모두 목란관에 초청해서 파티를 열고 영원한 조소친선을 역설했던 김정일이었다.

    그랬던 그가 인민무력부 보위국장 원응히가 준비한 보고서를 근거로 김일성에게 오히려 모든 책임을 넘겨씌웠던 것이다. 한편 김일성을 압박하는 차원에서 김정일은 군부 내 친 소련파 쿠데타조직을 척결한다는 명목으로 만경대혁명학원 출신 장성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만경대혁명학원이란 주로 김일성의 항일빨치산동지들의 자녀들이 가는 학원이다. 김일성은 군 장악을 위해 만경대혁명학원 출신들을 군 장성으로 배치했는데 당조직부 13과를 통해 군부 인사권을 독점한 김정일도 그들을 쉽게 다를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김일성의 항일역사를 주체이념의 뿌리로 규정한 이념국가 특성상 그들에 대한 우대는 필수였기 때문이다. 하여 김정일은 프룬제 아카데미아 숙청 명목으로 인민무력부 총정치국 조직부국장 이봉원, 4군단 참모장으로 있다가 위르쉴로프 총참모부 아카데미아 2년제 과정을 마치고 인민무력부 부 총참모장으로 승진했던 상장 홍계성, 김일성의 외가 친척인 평양시당 책임비서 강현수의 아들인 인민무력부 작전국 교도지도국 담당 부국장 강운용, 소련 주재 북한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다가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 국장으로 있던 김학산 등 만경대혁명학원 출신 군 장성 수십명을 긴급 체포했다.

    다만 그 소탕작전에서 공군사령관 오금철을 비롯한 공군 출신들은 제외했다. 김정일의 최측근들인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며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인 조명록이 공군사령부 사령관으로 있을 당시 프룬제 아카데미아 조사를 책임진 보위국장 원응히도 공군사령부 정치위원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만 봐도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은 죄를 쫓는 소탕이 아니라 김정일의 철저한 군부 장악 의도에 따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피의 숙청은 군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무력부 보위국에 뒤질세라 국가보위부도 KGB가 군사대학 유학생들만을 상대로 공작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 하에 수사를 사회 전반으로 확대해 군사대학이 아닌 일반대학 유학생들도 경쟁적으로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북한의 지식인들은 우수한 유학인재들이 한꺼번에 숙청된 1990년대 초반을 평양의 문화대혁명이라고 한다. 그렇듯 유학생 숙청사건과 맞물려 1991년 8월18일 소련에서 비상사태가 선포되자 김정일은 냉전구도 해체를 새삼 열거하면서,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기 위한 군부의 재정립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 우선 조건으로 김일성에게 최고사령관 승계를 강하게 요구했고. 이미 아무 실권이 없는 김일성은 이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정일이 최고사령관으로 취임할 때 당시 북한 군부 내 장성들 사이에서는 조용히 이런 말이 오고 갔다.
    “군 복무는 둘째 치고 병사경험도 전혀 없는 사람이 최고사령관이 되더니 적군이 아니라 아군 장성들을 잡는 최고사령관이 됐다”


    장진성 / 시인, 본지 객원논설위원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북한 前(전) 통일전선부에서 근무하다 2004년에 脫北(탈북)해 남한에 정착했다. 저서로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서사시 ≪김정일의 마지막 여자≫가 있다.
    장진성의 블로그  http://blog.daum.net/nkfree

    <편집자 주>
    그는 김일성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면서 대남 공작기구인 통일전선부에 발탁됐다. 탁월한 필력으로 김정일의 각별한 관심을 받았다.
    이 글은 그의 통전부 근무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북 통전부서 근무하며 직접 겪은 경험에서 나온 글이다.
    따라서 그 누구의 글보다 생생한 관찰과 사실을 기초로 작성됐다고 평가할 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