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6일자 오피니언면 '만물상'에 강인선 논설위원이 쓴 <중국대사관에 간 ‘주체’>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올립니다.

    평양의 중국대사관 웹사이트 ‘최신 뉴스’ 코너엔 그제 중국대사관을 방문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진들이 올라 있다. 김 위원장은 류샤오밍(劉曉明) 중국대사 부부 사이에 앉아 와인 잔을 앞에 두고 환하게 웃고 있다. 최고 지도자가 외국 대사관을 찾아가는 것은 외교 관례로 보아 지극히 비상식적인 일이다. 더구나 4명의 인민군 대장을 비롯한 군 실세와 핵심 요인 10여 명을 대동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대사들은 주재국 외교장관 한 번 만나기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 나라 국가원수는 신임장을 제정할 때나 자기 나라 국가원수가 방문했을 때 따라가 만나는 게 고작이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만 7년 전인 2000년 3월 5일에도 중국대사관을 방문해 세계 외교가의 토픽거리가 됐었다. 저녁 7시쯤 불쑥 찾아온 김 위원장은 5시간을 머물며 중국대사관 관계자와 와인 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김 위원장은 2001년 ‘중국공산당 창건 80돌’ 때도 중국대사관을 방문했다. 2005년엔 러시아대사관을 찾아가 푸틴 대통령이 보낸 ‘조국전쟁(2차대전) 승리 60돌 기념메달’을 받았다. 그런 메달이라면 대사가 찾아와 전달하는 것이 당연한 예의다. 러시아와 중국 지도자가 비슷한 일로 모스크바나 베이징의 북한대사관을 찾아갔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장쩌민 주석이 1994년 베이징 북한대사관에 간 적이 있지만 그건 김일성에 대한 조문이었다. 

    ▶1960년대 냉전시대, 폴란드의 고무우카 서기장은 바르샤바의 하늘이 맑은데도 가끔 우산을 썼다. 사람들이 의아해 물어보면 그는 “지금 모스크바에는 비가 온다”고 했다. 늘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을 쳐다보며 거기에 ‘코드’를 맞추고 살았다는 얘기다. 요즘 외교관계에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국가적 자존심’ 개념이 사회주의 위성국의 지도자 머리엔 아예 들어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김 위원장의 중국대사관 방문은 중국의 6자회담 중재노력에 대한 감사와 우호관계 과시라는 해석이 나온다. 미국에서 진행 중인 ‘미·북 관계 정상화’ 작업에 대한 중국의 의구심을 덜어주려는 뜻도 엿보인다. 그러나 이런 ‘외교적 기행(奇行)’을 북한의 자랑대로 ‘통 큰 외교’라고 봐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자주와 주체의 나라’라는 북한, 그 ‘주체의 상징’이라는 김 위원장의 행적은 북한의 ‘주체’란 결국 중국 없이는 불가능한 허상임을 보여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