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9년 "햇볕정책을 역이용하자" 

    1999년 2월 초 통전부에 초비상이 걸렸다.
    남한과의 교전을 기획하라는 김정일의 극비지시가 내려졌던 것이다.
    통전부 실무자들은 처음에 당황했다. 당시로 말하면 현대그룹 정주영회장과의 투자합의가 어느 정도 실천단계에서 구체화 되던 때였다. 더욱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내세운 햇볕정책을 두고, 김정일이 남한의 경제협력만을 흡수하는 햇볕정책 역이용 전략을 지시하여 통전부의 모든 역량이 대북지원 유인전략을 준비하던 때였던 것이다.

    "김대중 시험 겸 체제내부 결속"

    그렇다면 김정일은 왜 하필 그 시점에 남한과의 교전을 지시했을까?
    목적은 크게 세 가지였다.
    우선 첫째가 햇볕정책 역이용전략을 앞두고 체제내부 결속을 위해서였다.
    남한의 대북지원으로 인해 적대감이 희박해지는 북한주민들의 의식변화는 ‘체제불만’을 넘어 ‘체제위협’이 될 수도 있는 요인이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남조선은 북침의 기회를 노리는 민족의 적’이라는 실체적인 증거가 필요했던 것이다.

    둘째는 당시 남한의 보수야당에서 햇볕정책에 대립하여 상호주의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북한정권은 고난의 행군시기 대량아사를 막기 위해서는 기필코 남한의 대북지원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만약 김대중 정부가 당시 보수야당의 이견을 받아들여 햇볕정책에 상호주의를 부분적으로 적용하게 된다면 그러지 않아도 극도의 체제불안을 느끼는 김정일 정권으로서는 그 쌀마저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 쌀은 받되, 체제는 양보할 수 없다는 강력한 군사적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통전부 '전쟁기획' 본 김정일 "획기적 아이디어" 극찬

    마지막 셋째는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남한은 줄 돈이라도 있지만 아무 것도 갖지 못한 북한은 평화협박의 방법만이 협상 가치를 최대한 높일 수 있는 유일한 출로였다. 그래서 통전부는 남한의 대북투자기업들을 육지로 안정적으로 유인하기 위해, 군사도발은 바다에서 벌이는 서해 교전 안을 기획하여 김정일에게 보고했다. 김정일은 그 기획안을 보고 남한기업들과 대북식량을 안정적으로 끌어들이면서도 다른 쪽에선 체제갈등을 계속 극대화 할 수 있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라고 극찬했다.


  • 전장은 바다 선택..."북방한게선을 국제 분쟁화"

    노동신문을 보면 김정일이 해군사령부를 방문한 자리에서 동서남해에 둘러싸인 한반도 지형을 강조하면서, 때문에 오늘날의 최전선은 비무장지대가 아니라 바다라고 말했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999년 6월 15일 북한의 도발로 발발된 1차 남북서해교전은 북한의 처참한 군사적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평화 인내심을 발견한 북한은 정치적 승리를 자신했다.

    하여 통전부는 대외적으로는 북 핵정치를, 대내적으로는 NLL정치를 고착시키기 위한 전략에 돌입하게 된다. 북한이 연평해전 직후 남북군사회담에서 서해 경계선 재설정 제안을 내놓은 것은 [도발단계]에서 [관리단계]로 이행하는 절차이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서해상 경계 문제를 남북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는데 활용할 수 있는 장기적인 카드로 만들어 나간다는 복안이었던 것이다.

  • 통전부가 2차 서해교전을 서울 월드컵이 진행되던 2002년 6월로 정한 것도 이러한 NLL전략의 연장선에서 북방한계선문제를 국제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2차 서해교전은 통전부의 기획안에 따라 북한 해군사령관 김윤심 대장이 총지휘한 사건이다.
    김윤심은 연평해전 주역으로서, 서해함대 사령관으로 근무하다 2차 서해교전이 발발하기 전인 2002년 4월 13일 김일철 인민무력부장의 뒤를 이어 갑자기 해군사령관으로 승진한 인물이다.  

    2002년 5월1일, 김정일은 국제노동절에 맞춰 정례화 하던 공장시찰 전통을 깨고 불쑥 해군사령부를 시찰하여 서해교전과 관련한 점검을 하게 된다. 노동신문 5월 2일자 사진을 보면 김정일 가까이 섰던 군인들 대부분이 연평해전 참전자들이거나 그 부대 지휘관들이다.   


  • 낡은 배에 방탄철갑? 무거워서 포기

    남포 해군사령부 관제실에 들어선 김정일은 전광판 안내를 맡은 지휘관이 “적군과 아군이 똑같이 점으로만 표시되어서 속도가 느린 점을 아군으로 파악하는 실정”이라고 설명하자 매우 불쾌해 했다고 한다.
    경비함이 낙후해서 대부분 선상에서 싸울 수밖에 없는 전투 환경 때문에 김정일은 함선에 방탄철갑을 입히라고 지시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럴 경우 중량문제로 대신 탱크 포를 내려야 하는데 T-34 탱크에서 포신만 떼어내 배에 부착한 이 포는 파도가 아무리 높아도 조준점을 변함없이 유지할 수 있어 북한 경비함의 장점으로 꼽히는 무기이다.

    결국 방어설비보다는 화력을 보완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소련제 다발식 고사총을 추가 설치하는 방식의 재무장을 한 채 북한은 2002년 6월29일, 한국과 터키의 서울월드컵 3, 4위전이 벌어지던 날 2차 도발을 감행하게 된다.

    문책했던 장성들, 영웅으로 내세워

    서울 88올림픽 때에는 은밀히 대한항공 소속 KAL기 테러폭파를 감행했다면 2002년 월드컵 때에는 아예 대놓고 군사교전을 벌인 셈이다. 국제비난이 집중되자 김정일은 통전부 실무자들, 김윤심 해군사령관, 경비함 함장만이 알고 있었던 그 모든 책임을 8전대사령관 등 애매한 장성 몇 명을 해임시키는 방법으로 돌렸다. 그들은 훗날 명예회복은 물론 영웅으로 내세워 남한에 대한 적대 선전의 주인공들로 활용하고 있다.

    만약  한국 정부가 그동안 대북지원은 대북지원대로, 원칙은 원칙대로 대북정책을 추진했다면 북한이 천안함, 연평도를 공격하는 상상조차 감히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 어느 탈북자보다도 과거 적화통일 주도의 통전부에 몸 담았던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에 죄책감이 많다. 그래서 지난 6월 천안함 1주기 범국민추모위원회에서 마침 추모시를 제안해 왔을 때 나는 서울광장에서 이렇게 첫 운을 떼었었다.
    “어뢰로/ 대한민국을 공격했던/ 그 땅에서 온 시인이/ 천안 함 영웅들이여! 한주호 준위시여!/ 그대들의 영전에 이 시를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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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탈북자 2만명 중 병원에 입원 치료중이었던 북한 서해교전 참전자들을 직접 만나 본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고 생각된다. 

    2002년 교전 보도가 나온 후 직장에 출근했는데 당비서가 나 외 3명을 급히 찾았다.
    그는 이제 곧 조선인민군11호병원으로 가야 한다면서 서약서를 내밀었다. 취재대상들의 발언을 외부로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평양시 대동강구역 문수동에 위치한 조선인민군11호병원에 도착하니 외과병동 중 건물 하나를 해군사령부 8전대 부상병들을 위한 특별병동으로 봉쇄하고 무력부보위사령부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 이유는 아군의 승리만을 선전하는 북한에서 처참한 상처를 가진 부상병들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단 교전 참전자들을 회의실에 모두 모이게 했다. 12명 정도였는데 18세~19세 군인들이 그 중 5명이나 되었다. 함께 갔던 국장이 통전부에서 나왔고 교전 경험을 위에 보고하기 위해서라고 간단히 설명했다.  그러면서 영웅담을 듣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니 교전소감을 솔직하게 말하라고 덧붙였다.

    이 때 문이 열리며 온 몸에 붕대를 감은 한 해병이 휠체어에 실려 왔다.
    그러자 그를 가리키며 모두가 합창하듯 말했다.

     “저 애는 온 몸에 맞은 파편이 230개예요”

    “???”

    경악하는 우리에게 군의관이 렌트겐 필름을 한 장 보여줬다. 교전 참전자들 중 군관이 말했다.

    “파열탄에 맞았습니다. 위에서 터지는데 파편 수백 개가 우박 떨어지듯 합니다.”

     가장 나이 어린 해병이 끼어들었다.

    “정말 솔직하게 말해도 됩니까?”

    “그래 그래, 그냥 너희들 생각을 편하게 말하면 돼”

    “사실 다 무섭지 않은데 그 파열탄이 제일 무섭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했다. 

     “놈들은 전투준비! 하면 모두 갑판밑으로 사라지는데 우리는 전투준비! 하면 모두 갑판위로 올라가요,
    그런 상황에서 저 파열탄만 터지면 전투능력이 우선 1차적으로 상실돼요.” 

     “영화에서 보면 전투 중 이름들을 서로 부르는데 당해보니깐 그건 완전한 거짓말이예요. 일단 포소리만 한번 울리면 귀에서 쨍-하는 울림밖에 더 없어요, 그래서 우린 서로 찾을 때 포탄깍지로 철갑모를 때리며 소통했어요”

    자기를 상사로 소개한 해병이 말했다.

     “한 가지 제기해도 좋습니까? 놈들 배는 부럽지 않은데 제일 부러운 게 방탄조끼입니다. 방탄조끼는 비싸니깐 우리에게 목화솜옷이라도 주면 파편이 덜 들어가겠는데…”

    내 옆에 서있던 국장은 그의 말을 특별히 줄까지 쳐가며 메모했다. 전투 전반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보라는 국장의 말에 군관이 입을 열었다.

    “그 날 함장이 평양에 갔다 온 날이어서 우리는 느슨하게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장이 그날따라 배에 기름을 가득 채우라고 지시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물었다.

    “평일엔 기름을 가득 안 채웁니까?”

    “사실 채울 기름이 없습니다. 그나마 기름이 정상적으로 보장되는 함선이란 것이 구축함뿐입니다. 현재 우리 해군에 소련 50년대 구축함이 두 대 있는데 한 대는 동해에, 한 대는 서해에 있습니다. 그런데 기름이 없어서 순찰을 못하고 작전지역에 진입하면 정박한 채 레이더감시만 하다 돌아오곤 합니다. 우리 경비함 같은 경우엔 기름공급이 더 부족한 형편입니다. 순찰이 아니라 한번 북방한계선 근처에 나갔다 오는 정도입니다. 그리고 항에 도착하면 남은 기름을 군관들이 몰래 빼서 난방용으로 집에 가져가기 때문에 처음부터 연유부에서 절반씩밖에 안 준지 오래됐습니다.”

    상사해병이 불만조로 보탰다.

    “우린 도색감도 받아본지 오래됐습니다.”

    “그건 뭔데요?”

    “배는 물위에 항상 떠 있기 때문에 선체에 골뱅이와 같은 해류들이 가득 달라붙습니다. 그럼 속도가 느려지죠, 도색감을 정기적으로 발라주어야 해류방지도 되고 속도에도 제한이 없겠는데 그것도 없다니깐요.”

    그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군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날 함장이 기름뿐 아니라 포탄과 탄약들도 만장탄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배 앞에 붙인 레일도 확인하더니 다시 더 단단하게 용접하라고 하였습니다.”

    “배 앞에 웬 레일이요?” 내가 물었다.

    “전번 1차 때 충돌싸움부터 시작했었는데 그 애들 철갑이 굉장히 단단해서 우리 배가 찢어지더라구요, 그래서 고심하던 함장이 창안한 겁니다. 레일을 붙이면 승산 있을거라면서요.”

    “그럼 그 철의 강도문제는 전번 1차 때 제기 안했었습니까?”

    “했죠, 장군님께도 보고돼서 장군님께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철갑으로 무장해주라고 지시하여 연형묵 자강도당책임비서를 비롯해서 자강도 군수공장 기술자들이 몇 번이나 우리 배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해결 안됐는가요?”

    “장갑을 두텁게 하면 함선이 기울기 때문에 대신 탱크포를 내려야 하는 문제가 제기됐습니다, 사실 우리 함선의 위력은 탱크포입니다. 아무리 파도가 심해도 정조준을 유지할 수 있고 또 포탄의 위력이 쎄서 놈들 함선에 구멍이 펑펑 납니다. 그런데 그런 위력을 없애면 속도도 상대적으로 느린데 싸움이 됩니까? 그래서 고심 끝에 철의 강도대신 화력을 더 보강하는 쪽으로 채택됐습니다. 놈들 자동포는 분당 3000발씩 나오는데 우리는 600발 정도거든요, 그래서 1차교전 후 소련 4구경 발칸포를 올려놨습니다. 그거면 우리도 분당 1500발을 쏠 수 있거든요.”

     이 때 나이 어린 해병이 재잘거렸다.

    “그것도요, 우린 다 갑판 위로 올라가서 쏘는데 그 놈들은 어디서 쏘는지 보이지도 않아요. 그 놈들 함선 무섭게 발전했어요”

    “조용 못해 이 xx야!”

    상사가 침대에 있던 베개를 집어던졌다.

    “야, 너도 찍소리 마!”

    군관이 상사의 과격한 행동에 이렇게 일침을 가하고나서 다시 이어갔다.

    “기름과 탄약들을 가득 채우고 쉬고 있는데 이상하게 배를 꼼꼼히 점검하던 함장이 이번엔 격노해서 기관장을 소리치며 불렀습니다. 보조조타가 고장났는데 당장 수리하라면서요, 보조조타란 기본조타가 고장 났을 때 수동적으로 배를 움직일 수 있는 장치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만약 함장이 그 보조조타 수리를 지시하지 않았으면 우린 살아오지 못했을 겁니다.”

    “왜요? 그 보조조타 덕이란 게 무엇인데?”

    “놈들 폭탄에 기관실이 맞았는데 기본조타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함선은 한동안 한 자리에서 빙빙 돌기만 했습니다. 아마 놈들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막내 해병은 이번에도 못 참고 끼어들었다.

    “그때 봤어요,? 놈들이 갑판에 나와 쭉 서서 구경하더라구, 아 그 때 쏴야 하는건데....”

    그 말에 옆에서 히히거렸지만 나이 든 해병들은 침통한 얼굴이었다.

     “전투상황을 좀 설명해주세요.”

    “우린 놈들 배에 접근해서 충돌을 시도했어요. 함장이 지시해서 발포도 우리가 먼저 시작했구요, 근데 놈들 첫 포탄에 함장이 먼저 죽었어요, 우리 함선 규정엔 싸움을 시작할 땐 함보위지도원의 동의가 있어야 합니다. 함보위지도원이 정치지도원을 겸하거든요, 그래서 함장 대신 그 때부터 보위 지도원이 지휘했습니다. 그날은 우리가 작심하고 나갔으니 놈들 배가 손실이 컸습니다. 작전이 더 길어지면 화력우세나 함선우세에서 우리가 밀리기 때문에 손실은 불가피했습니다. 마침 전대사령부와 실시간으로 통신하던 조타수가 달려와 전대의 철수명령을 전했고 우린 보조조타로 조종하며 돌아왔습니다. 이상한 것은 함장 딸이 세 명이거든요, 근데 죽은 함장 몸에서 세 개의 파편이 나왔습니다.”

    국장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이제 다시 싸우라면 싸울 용기가 있어? 어때? 할 수 있지?”

    해병들은 군인식으로 일제히 “예!”하고 합창했다.

    그러나 그 날 해병들의 용기에서 나는 다른 점도 엿볼 수 있었다.
    나이 어린 해병들은 영웅심리에 들떠 있었지만 나이 든 해병들일수록 한국군의 선진화에 당황하고 겁을 먹은 눈치였다.

    우리가 나올 때 군관은 따라 나오면서까지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정말 방탄조끼는 아니라도 좋으니 목화솜옷을 좀 해결해주십시오, 그것만 입어도 애들 저렇게까지 심하게 부상당하지 않습니다.”

    2차 교전 결과를 보고받은 김정일은 1차교전은 진 전투였다면 2차는 이긴 전쟁이었다며 8전대 해병들에게 감사와 선물을 보냈다. 함장은 공화국 영웅칭호를 받았고 보위지도원은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다른 해병들에게도 국기훈장 2, 3급과 함께 김정일 이름이 박힌 칼라TV가 선물로 하달됐다.

    그 후 함장은 세 딸에게 아버지가 남긴 복수의 유산이란 내용의 “세 파편” 연극의 주인공으로 부활했다.

    장진성 / 시인, 본지 객원논설위원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북한 前(전) 통일전선부에서 근무하다 2004년에 脫北(탈북)해 남한에 정착했다. 저서로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서사시 ≪김정일의 마지막 여자≫가 있다.

    <편집자 주>
    그는 김일성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면서 대남 공작기구인 통일전선부에 발탁됐다. 탁월한 필력으로 김정일의 각별한 관심을 받았다.
    이 글은 그의 통전부 근무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북 통전부서 근무하며 직접 겪은 경험에서 나온 글이다.
    따라서 그 누구의 글보다 생생한 관찰과 사실을 기초로 작성됐다고 평가할 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