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6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대중 고문이 쓴 '언제까지 북핵에 끌려 다닐 것인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2·13 6자회담 합의로 한국의 안전 보장은 잠재적 위기를 맞고 있다. 2·13으로 북한의 기존 핵과 핵물질은 여전히 남아있고 미국은 한국을 핵 위협에 방치하는 결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안보는 공중에 떠있게 된다. 미국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우리는 부시에게 배신당한 기분이다.

    미국에 북핵은 무엇인가? 북핵은 미국에 ‘딱총’에 불과하다. 성능이나 운반수단 등에서 미국을 위협할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북측은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거나 북한의 안보를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한 ‘담보’로 핵을 가졌다고 주장하지만 미국은 그럴 의사가 없다고 수없이 말해왔다. 북한도 미국이 그들을 공격하거나 그럴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부시는 왜 2·13 협상을 서두르고 그 어정쩡한 결과를 애써 ‘성공’으로 치장하고 있는 것인가. 지난 11월 중간선거에서 진 부시로서는 이란문제에 전념하면서 동시에 ‘호전적 이미지’를 ‘협상 이미지’로 전환하기 위해 2·13 합의라는 계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과거의 핵’은 접어두고 현존의 핵프로그램 폐기라는 가시적 성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 피해자는 한국이고 일본이다.

    부시의 정치적 받침대라는 미국의 네오콘이 2·13을 비판하면서 내세우는 논리는 이번 합의가 핵을 갖고 싶은 나라에 ‘나쁜 선례(先例)’로 남는다는 데 있다. 한국에 대한 핵 위협은 관심 밖으로 보인다. 그러지 않아도 노무현 정부가 스스로 그런 선에서라도 합의해 달라고 사정하는 판이니 불감청 고소원이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 북핵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안보와 직결되는 문제다. 애당초 북핵이 미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온 세계의 비난을 무릅쓰고 핵을 만들었겠는가. 북핵의 진짜 용도는 남쪽을 위협하고 장악하기 위한 것이다. 저들의 거듭되는 전쟁 위협과 ‘불바다’ ‘화염’의 언급은 북핵이 실질적인 무기가 될 수도 있고, 또는 남쪽의 안보를 ‘인질’로 잡는 협박 수단일 수도 있음을 공공연하게 내비치고 있다. 더더군다나 기존 핵의 계속 보유가 미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묵인(默認)하에 공개적으로 양해(?)된 이상 북한이 그것을 폐기할 리는 절대로 없다. 전 세계 언론이 이미 그것을 예견하고 있다.

    2·13 합의는 미국이 한국과의 관계를 새로운 시각에서 재정립하는 계기로 삼는 것 같다. 미국은 한국의 보호에 형식적으로 매여 있을 뿐 실질적으로 어떤 의무도 지고 싶지 않다는 것을 노골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지속적인 안정이 필요하다면 미국은 중국을 지렛대로 삼아 북한과 직접 상대하면 됐지 굳이 골치 아픈 한국을 매개로 하거나 경유할 필요가 없다는 완곡한 의사 표시로 봐야 한다. 미국 내에서는 벌써 북한과의 국교 정상화가 거론되고 있다. 전작권 단독 행사 시기를 3년간 연장해준 것은 기존의 북핵을 남겨둔 데 대해 한국 국민에 대한 약간의 보상일 뿐이다. 이제 한반도 문제의 중심 축은 기존의 한국·미국·일본의 3각구도에서 미국·중국·북한의 또 다른 3각구도로 옮겨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제 한국은 자신의 안보에 관한 한 미국을 신뢰하거나 의지하기보다 새로운 진로를 모색해야 한다. 미국이 한국의 목을 조르는 북핵을 그냥 남겨둔 채 (어쩌면 애써 모르는 척) 자기들의 이해만 추구하기로 한 이상 우리는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대한민국이 살아 남는 길은 우리도 핵에 대응하는 길을 찾는 것뿐이다. 우리는 이제 북핵 앞에 알몸으로 서있는 꼴이다. 우리 주변에 우리의 진정한 친구는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미국의 핵우산이 어떻고 누가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등의 허상에 안주해서는 안된다.

    금년 말 대선은 국민들 사이에 북핵과 우리의 안보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고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고 논의되는 마당이 돼야 한다. 더 이상 대통령 한 사람과 그 수하 세력에 이끌려 국민적 논의나 합의도 없이 우리는 북한에 돈과 물자를 대주는 ‘봉’이나 되고, 우리의 안보는 공중에 떠버리는 사태가 야기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런데 어느 주자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북핵과 안보 위기를 최우선적 과제로 거론하는 일이 없으니 우리 국민이 외롭고 불쌍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