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5일자 오피니언면에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국제정치학 전공)가 쓴 시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제5차 6자회담의 3단계 회의에서 나온 2.13 합의는 2002년 10월 제2차 북핵위기가 불거진 이래 나온 구체적 시한과 행동계획을 담은 최초의 문건이다. 북한이 진행하고 있는 핵활동(영변 5MWe 원자로를 포함한 5개 핵시설)을 60일 이내에 폐쇄(shutdown)하는 조건으로 우선 중유 5만t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또 이들 핵시설을 반영구적으로 불능화할(disable) 경우 추가로 중유 95만t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제공한다. 여기에 덤으로 미국은 30일 안에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의 북한계좌 일부를 풀어주기로 약속한 상태다.

    합의된 규칙은 북한이 움직인 만큼 보상한다는 것이고 여기에는 북한 핵능력의 진전을 우선 막고 보자는 전략이 깔려 있지만 어디까지 움직일 것인가의 선택은 아직도 북한에 남아 있다. 당장은 기름과 전기가 아쉬워 가동 중인 원자로의 폐쇄단계까지는 가더라도 핵무기의 추가적 제조를 차단하는 불능화, 해체의 수순을 북한이 과연 순순히 취할 것인지는 지켜봐야 한다. 베이징(北京)을 나서기가 무섭게 북한 당국은 5개국과 약속해 놓은 불능화 대신 "임시 가동중단" 운운하고 있지 않은가.

    더 어려운 관문은 따로 있다. 핵시설의 해체는 북한이 핵무기를 추가로 만들지 못하게 하는 것일 뿐, 이미 만들어 놓은 핵무기와 핵물질을 폐기토록 하는 문제와는 별개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에서도 그랬듯이 이번 6자 합의에서도 북한 핵 프로그램의 과거는 일절 묻지 않았다. 13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핵탄두도 만들었고 핵실험도 했으니 북한이 청산해야 할 과거는 더욱 복잡해졌다. 기존 핵무기의 폐기라는 마지막 수순에 이르기까지 관련 의제와 이행시기를 잘게 쪼개 무리한 보상을 요구할 경우 북핵문제는 또다시 멀고도 험한 길을 갈지도 모른다.

    북·미 제네바 합의는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의 발각으로 깨졌고, 2005년의 9.19 합의는 지난해 11월의 핵실험으로 무력화됐다. 누차 북한에 속았다는 것을 상기하면 이번 합의도 마음이 놓이지 않을 것이다. 북한 핵문제를 낙관하기 어려운 이유는 합의 때마다 언급하는 '완전한 핵폐기'의 전제가 과연 북한의 진심인지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앞으로 발족될 5개 작업반은 비핵화와 대북지원 문제뿐 아니라 동북아 안보협력, 북·미관계와 북·일관계의 정상화와 같은 거시적인 주제도 다루게 된다. 북한이 미국·일본과 수교함으로써 개방된 글로벌 네트워크에 참여하려면 자신의 체제부터 개방하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북핵의 폐기는 궁극적으로 북한의 개방을 뜻한다. 북한 정권의 진정한 핵폐기 결단은 곧 체제 개방에 대한 결심이 선행돼야 한다는 말이다. 만일 김정일 위원장이 개방을 자신의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핵만 부둥켜안고 국제사회와 흥정하려 한다면 이번과 같은 호의적 합의는 다시 없다는 것을 인식시켜야 한다. 핵시설 및 핵무기의 신고 폐기 사찰 수용을 분명하게 실시하면 이에 대한 보상을 분명하게 해주고, 그 이행과정이 차질을 빚으면 지원을 중단하고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이것이 실용적 상호주의의 요체다.

    2.13 합의는 햇볕정책의 성과가 아니다. 북한의 극심한 에너지난·식량난이라는 내부 문제와 미국 주도의 대북 금융제재라는 국제적 압박이 상호 작용해 나타난 결과다. 현 상태에서 무분별한 대북 포용이 재개될 경우 북한의 오판을 불러올 공산만 크다. 남북 정상회담도 평화협정도 아직은 때가 아니다. 평화를 선언해야 북한 핵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북한 핵문제가 해결되어야 평화를 논할 조건이 마련된다. 정부가 북한의 행동 대신 북한이 합의한 내용을 좇아 대북 정책을 짤 경우 대선을 앞둔 한국 정치는 혼란에 빠지고 6자회담은 다시 위태로워질 것이다. 북핵 문제에 관한 한 이성이 이상에 우선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