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 출판 기념회 서평(書評) <발췌>

                       -1960~1979 좌익운동에 대한 안병직 교수 증언을 보고-                                                  류근일  
     일시 : 2011/5/26  장소 : 프레스 센터

      안병직 선생이 이 책에서 증언하신 사항에 대해 저로서는 각별한 소회가 없을 수 없습니다. 저 역시 안 선생이 언급하신 그 시대를 제 딴에는 고심참담하게 겪으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 ▲ <보수가 이끌다-한국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 출판기념회에서 류근일 본사 고문이 안병직이사장이 펴낸 책에 대해 논평을 하고 있다.ⓒ
    ▲ <보수가 이끌다-한국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 출판기념회에서 류근일 본사 고문이 안병직이사장이 펴낸 책에 대해 논평을 하고 있다.ⓒ

      그 시기의 쟁점은 물론 '권위주의적 근대화' 우선이냐, 아니면 '시민사회적 민주화' 우선이냐의 대립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중대한 쟁점이 있었습니다.

      

  • ▲ <보수가 이끌다-한국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 출판기념회에서 류근일 본사 고문이 안병직이사장이 펴낸 책에 대해 논평을 하고 있다.ⓒ

    그것은, 다소 진보적인 성향까지를 포함하는 '자유민주적 민주화'를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극좌 혁명'을 지향할 것인가의 대립이었습니다.

      이것은 반(反)권위주의 진영 내부의 노선갈등이었습니다. 이러한 내부의 노선갈등은 지금까지 세세하게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아주 최근에 이르러 박범진 전 국회의원의 고백적 증언이 나왔습니다. 제 1차 인혁당 사건은 당국의 조작이 아니라 실체가 있었다는 것, 자신이 북한산에 올라가 그 지하당에 입당선서를 했다는 것, 등의 충격적인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안병직 선생이 또 커밍아웃을 했습니다. 내용은 박범진 의원의 증언과 상통하는 것이었습니다.

      4.19 후와 5.16 직전에 학생운동 대열에 일부 주변부 극좌 그룹이 편승하려 한 정황은 저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포섭한 한 역사학과 학생을, 4.19 시위를 주도했던 문리대 학생운동 주류에 자꾸만 보내서 “이렇게 하자느니, 저렇게 하자느니” 하는 견인 작전을 펴곤 했습니다.

      저는 복학생 선배로서 후배들 주변의 그런 동향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몇 몇을 빼고는 학생운동 주류 다수파는 그들의 그런 침투를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교묘한 작전으로 4.19 1주년을 기념하는 ’4.19 제2 선언문‘ 집필을 어쩌다가 그 학생인지 아니면 그 배후인물인지가 맡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4.19 제2 선언문‘의 기조가 그들의 이른바 ’민족 민주‘ 혁명 운운하는 논리로 짜이게 되었습니다. 그 문건은 공식적인 독회(讀會)를 거치지 않고 발표된 것으로 압니다. 나중에 일반 학생들로부터 불평과 항의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이미 극좌 계열의 학생운동 침투 공작이 시작되었던 셈입니다.

      그 후 서울대학교 학생운동 내부에는 주류의 '비(非)극좌 노선'과, 일부 비주류의 '극좌 노선'이 첨예하게 갈등을 일으키는 양상이 터 잡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후 5.16이 났습니다. 저는 5.16 직전의 민통련 사건으로 교도소에 장기간 수감되었던 관계로 그 후의 사정과는 단절되었습니다. 그러나 운동 내부의 비(非)극좌와 극좌의 싸움은 교도소 안이나 밖이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저는 비(非)극좌의 입장에서 극좌 노선에 맞섰습니다.

      1960년대 당시의 교도소 밖의 극좌계열의 세밀하고 은밀한 민주화 운동 편승공작에 대해 생생하게 알게 된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나 박범진 의원과 안병직 선생의 증언을 접하고서였습니다.

      이 극좌 증후군은 1979년의 남민전 사건에 이르기까지 집요하게 지속되었음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증언을 접하고서 과연 어떤 결론을 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이제는 더 이상 모호하게 덮어두기를 해선 안 되리란 점입니다.

    어떤 것이 사실과 진실인가 하는 기준에서,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밝히지 않고 감추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샹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것이 옳은 길인가 하는 기준에서도, 민주화 운동을 ‘대한민국의 민주화’로 가져가려는 입장에서는, 그것을 '반(反)대한민국 혁명'으로 가져가려는 입장에 대해 더는 침묵해서도 안 되고 못 본 체 해서도 안 되고 파묻어 두어서도 안 된다고 봅니다.

      안병직 선생의 증언은 이점에서 올곧은 지식으로서의 정직하고 용감한 양심선언이었다고 평가하고자 합니다.

      둘째는, 극좌 흐름은 1960년대와 70년대 민주화 운동을 자기들 쪽으로 끌어가려 했지만 결국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 안병직 선생의 증언이 갖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당시 극좌계열의 민주화 운동 하이재크 기도는 실패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주류 민주화 운동에 막심한 위해만 끼쳤다는 것을 시사 합니다.

      제가 체험한 바에 의하더라도, 그런 요소들이 근처에 얼씬거린 것만으로도 주류 민주화 운동이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 모릅니다.

      이렇다 할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으면서도 그런 계열의 움직임은 주류 민주화 운동을 번번이 큰 곤경에 빠뜨리는 빌미가 되곤 했습니다.

      극좌 계열의 문제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른바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이 아닌 대한민국의 번영을 위한 자유, 민주, 인권, 복지, 개혁 운동이 준수해야 할 바람직한 원칙과 노선을 교란하고 왜곡하고 폄하한 중대한 잘못을 범했습니다.

      민주화 운동에는 물론 진보적인 날개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그 철학적 원류(源流)는 마땅히 자유 평등 박애의 근대 계몽사상에 두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 운동이 극좌 전체주의로 일탈해선 안 되리라 믿습니다.

      이런 요청에 비추어서도 안병직 선생의 증언은 귀중한 모멘텀을 던져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안 선생의 증언은 민주화 운동과 바람직한 진보운동을 극좌와 분리-단절 시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일깨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진보지향 세력이라면 이런 증언을 겸허하게 경청해서, 김정일 절대왕정의 3대 세습과 인권학살에 침묵하는 수구 종북주의자들과의 합작을 단호히 청산하고 그와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할 것입니다.

      1980년대 들어 민주화 운동이 그런 극좌 전체주의 노선에 의해 상당부분 하이재크 당한 양상을 드러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여기선 언급을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이 책의 출판이 우리의 지난 현대사를 보다 명료하게 규명하고, 앞으로의 보다 선진적인 민주화 시대를 여는 데 하나의 값진 이정표를 마련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저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 ▲ 왼쪽부터 윤평중 한신대교수, 이부영전의원, 류근일 본사 고문, 김세중 연세대교수.ⓒ
    ▲ 왼쪽부터 윤평중 한신대교수, 이부영전의원, 류근일 본사 고문, 김세중 연세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