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옥계전투는 옥계해상에서 벌어진 옥계해전과 옥계일대 육상에서 벌어진 전투를 말한다. 한국전쟁 당시 우리 해군이 치룬 최초의 전투이자, 동시에 최초의 승전이다

      

  • ⓒ 옥계전투 전승기념비
    ▲ ⓒ 옥계전투 전승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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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6 25 4시. 북한군이 38선을 전면 남침한 바로 그 시각.
    강원도  옥계 해안과 정동진, 금진 등에 북괴 549 육전대 1800여명이 야음을 틈타 기습 상륙을 개시했다.  삼척, 임원 등에는 북괴 766 유격대 1300여명이 상륙했다.  

    이들은 정규군이 아닌 특수훈련을 받은 게릴라부대였다. 강릉일대를 방어하는 한국군 제8사단의 후방을 차단하고 삼척에 주둔한 8사단 21연대의 북진을 방해하는 동시에,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북한 제 5사단의 진격을 돕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들은 1000톤 급의 무장수송선 1어뢰정 4척과 함께 발동선 30척으로 구성된 상륙선단에 분승, 서서히 다가 왔다.  

  • 한편 북한군의 기습남침  소식이 알려지자동해안을 담당하는 묵호 경비부(현 제1함대사령부 전신) 사령관 김두찬 중령은 비상경보를 발령하고, 530분에 60명의 병력으로 수색대를 편성, 긴급 출동 명령을 내렸다.

    묵호 경비부 수색대는 지역 청년단과 경찰과 협동하여 작전을 펼쳐옥계 남방 도직리에서 적 1개 중대와 치열한 교전끝에 북한군 33명을 사살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는 해군이 거둔 승리 중 보기 드문 육상전투의 승리였다. 해군 수색대는 그 날 21시에 경비부로 귀대했다 

    한편 묵호에 정박 중이던 YMS-509 가평정은 새벽 5시에 해군본부로부터 긴급 전문을 받고 6시에 출항했다.

    묵호를 떠나 북상하던 중 2시간쯤 지나서 가평정은 배 한척을 발견,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발광신호를 보냈다.정체불명의 배는 발광신호에 응답하지 않았다. 가평정의 정장 김상도 소령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전투배치를 명령하고  괴선박으로 접근하던 중갑자기 공격을 받았다. 그것은 바로 북한군 PC급 함정이었다.

     

  • ⓒ가평정과 동급인 한국해군 YMS-515 운남정 (사진출처 :http://www.navsource.org)
    ▲ ⓒ가평정과 동급인 한국해군 YMS-515 운남정 (사진출처 :http://www.navsource.org)

     
    하지만 
    가평정은  목선이었다. 북한선박은 철선에, 다가 속도도 빨랐다. 가평정은 37밀리 대전차포와 12.7밀리 중기관총 등을 동원해 필사의 사격을 했지만,  북한군은 40밀리 2연장 기관포로 공격해왔다.

    포격에서 밀리던 가평정 정장은 37밀리 포의 조준이 정확하지 못한 점을 염두에 두고, 적선에 근접해서 포를 발사하기로 결심했다. 500야드까지 근접,  포탄 수발을 적선에 명중시켰다.

    근거리 교전이었던 탓에 가평정에도 적탄 1발이 명중되었지만, 천만다행으로 별다른 피해는 없었다.  그 50분간의 교전 끝에 북한 선박은 큰 피해를 입고 북으로 도망쳤다. 체급이 달린 가운데도 불구하고 일궈낸, 값진 승리였다.

    전투가 끝나고  가평정은 피격된 부위의 정비를 위해 묵호로 귀항했다. 수리를 마치고 다시 출동한 가평정은 옥계해안 일대를 수색하다가 옥계 북방에서 상륙 중이던 북괴군을 발견, 포격을 시작했다. 적들은 박격포로 악착같이 대응사격을 해왔다. 다행히 적들의 공격은 가평정에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이 전투에서 가평정은 북한군 상륙정 1척을 격파하고 해안에 버려진 발동선 1척을 노획하는 등 전쟁 초기에 북한군의 전진을 막아내는 큰 공을 이뤄냈다.  

    옥계 전투는 한국전쟁에서 우리 해군이 거둔 최초의 승전으로 기록됐다. 또 동해안에서 전쟁초기 적의 선제공격을 막아냄으로써 적군의 남진속도를 지연시켰고, 이를 통해 반격을 도모할 수 있는 중요한 '모멘텀'을 만들어 준 잊어서는 안될 전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