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원' 입국금지...소련선 스탈린상-레닝상 수여6.25때 그린 '한국의 학살'그림은 한국 고교 교과서에
  • 공산당원 피카소를 입국(入國)금지 시킨 미국 
      
    미국 정부는 예술이 반역의 면허증이 아님을 천명한 것이다.
    예술엔 국경(國境)이 없지만 예술인엔 국경(國境)이 있다. 


    趙甲濟   

     
    1950년 3월 미국 정부는 프랑스 공산당원인 피카소가 '평화 빨치찬 세계 총회'란 단체의 대표 12명을 이끌고 미국에 들어오려는 것을 입국(入國) 금지시켰다. FBI(연방수사국)는 피카소를 안보에 위해(危害)한 공산주의자로 분류, 그가 죽을 때까지 감시 파일을 유지하였다. '평화 빨치산 세계 총회'는 소련 공산당 간부 주다노프가 조종하던 공산당의 선전 조직이었다.
     
    피카소는 미국에 가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원폭(原爆) 제조 금지를 설득하고, NATO 창립에 항의하며, 미국의 공산당을 지원하고, 할리우드의 10인을 체포한 데 항의하려고 입국(入國)을 신청하였던 것이다.
     
    피카소가 미군(美軍)이 양민을 학살하는 장면(실제로 이런 학살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을 <한국에서의 학살>이란 제목의 그림에 담은 것은 방미(訪美)가 좌절된 이듬해였다. 세계공산주의자들은 이 그림을 반미(反美) 선동에 악용하였다. 이 선동 그림은 미국에서 그의 인기를 떨어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미술적으로도 악평(惡評)을 받았다.
     
    피카소는 1944년에 프랑스 공산당에 들어가 1973년에 죽을 때까지 열성 당원이었다. 수백만 프랑의 기부도 했으며 당(黨)의 선전에 필요한 그림도 그려주었다. 그림 '비둘기'는 세계 공산주의자들의 평화공세에 악용되었다. 소련과 중공의 우표에도 실렸다. 휴전회담 때 판문점에도 등장하였다.
     
    살바도르 달리는 이렇게 말하였다.

    "피카소는 화가이고 나도 그렇다. 피카소는 스페인 사람이고 나도 그렇다. 피카소는 공산주의자이고, 나는 그렇지 않다!"

    피카소는 프랑코의 독재를 비판하였지만, 그보다 심한 스탈린의 독재엔 침묵하였다. 그는 1950년에 스탈린 평화상을, 1962년엔 레닌상을 받았다. 소련 당국은 그러나 피카소의 그림을 '타락한 것'으로 규정, 전시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미국이 공산당원 피카소를 입국(入國)금지시켰다고 해서 미국을 욕하는 이는 없다. 미국 정부는 예술이 반역의 면허증이 아님을 천명한 것이다. 예술엔 국경(國境)이 없지만 예술인엔 국경(國境)이 있다.

    윤이상과 이응노의 반국가적(反國家的) 행위를 음악과 미술의 이름으로 덮으려는 수작은 상식에 반(反)한다. 피카소의 반미(反美)선동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을 고교(高校) 한국사 교과서에 넣은 경위에 대한 국가기관의 조사(또는 수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