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은 詩人의 카다피 美化, 레이건 저주 
      
     1989년 한겨레 기고문: "당신은 까딱했으면 레이건 람보한테 죽을 뻔했다"
    趙成豪(조갑제닷컴 기자)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高銀(고은) 시인은 1989년 1월15일字 한겨레신문에 <무하마르 카다피 대령에게>라는 칼럼을 썼다. 이 칼럼에는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과 카다피에 대한 일방적인 美化가 들어 있다.
     
     高銀 시인은 <무하마르 카다피 대령에게>에서 “당신(카다피)은 까딱했으면 지난해(注-1986년 4월15일, 당시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의 명령으로 미군기가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를 폭격했던 것을 가리킴) ‘레이건 람보’한테 죽을 뻔했다. … 레이건 씨는 당신한테 ‘천하의 미친 놈’ 이라고 욕을 퍼부어 대다가 그런 돌연한 공격을 안긴 것이다. (그렇데 된 데에는) 미국의 책임이 더 크다고 세상이 말하고 있다”고 썼다.
      그는 “이번에 또 한 번 ‘화가 치밀어’ 美 해군기가 리비아機를 격추시켰다. 자기네 화학무기는 제쳐두고 리비아 화학무기 생산을 트집 잡아 이런 폭행을 저지른 것”이라며 일방적으로 미국을 비난했다.
      高씨는 “카다피 씨,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고 미국과의 적대관계 청산을 제의하고 있다. 참 잘하는 일이다. … 당신이 아직도 대령 계급장을 고수하는 괴벽을 퍽 고무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라고 했다.
     
     高銀 시인의 미국에 대한 비난은 이어졌다.
      “미국이 ‘세계 경찰국가’의 못된 패권으로부터 그들 자신의 도덕을 회복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미국의 한 신문은 앞으로 미국은 아시아에서도 군사훈련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팀 스피리트 훈련이 해마다 실시되고 있는 터여서 東아시아 역사발전의 기초가 되는 긴장완화에 크게 해로운 것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며칠 전 파리에서 화학무기 회의(注-1989년 1월11일 파리에서 열린 파리 국제화학무기회의ㆍ화학무기금지선언문 채택을 가리킴)가 있었다. 리비아도 화학무기 생산의 오해를 씻어버리겠다고 했으니 마땅히 미국도 폐기해야 한다. 화학무기와 다름없는 한국의 악질, 최루탄 생산도 중지해야 한다”며 한국과 미국을 싸잡아 비난했다. 그는, 한국의 안보에 직결되는 팀 스피리트 훈련을 비판하고 합법적인 최루탄을 불법적인 화학무기와 같이 취급하였다.
     
     카다피는 1969년 쿠데타 후 아랍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혼합한 체제를 만들었다. 그는 ‘국민이 다스리는 나라’라고 주장하며 대령계급을 고수하기도 했다. 1972년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를 묶은 아랍공화국연합 결성시도를 했는데 실패로 끝났다.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고 팔레스타인과 적대관계를 유지하자 카다피는 이집트를 비난하며 反美ㆍ反이스라엘 노선을 걷게 된다.
     
     1979년 리비아 시위대가 미국 대사관에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은 1980년 리비아와 斷交(단교)했으며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렸다. 또한 자국민의 리비아 방문을 금지하기도 했다. 미국이 카다피를 테러의 배후세력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1986년 카다피는 테러리스트를 시켜 西베를린의 디스코텍을 폭파해 美軍 2명이 죽고 79명이 부상당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트리폴리를 爆擊(폭격)하였다. 카다피는 부하들을 시켜 1988년 12월21일, 런던에서 뉴욕으로 향하던 팬암機 103편 여객기가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을 지날 때 공중폭파 되도록 했다. 승무원과 승객 259명과 지상에서 11명 모두 270명이 사망했다. 미국과 영국은 테러의 배후를 카다피로 단정, 실행범의 신병인도를 요구했다. 카다피는 이 요구를 8년간 거부했다. 2000년, 결국 리비아는 팬암機 테러의 두 용의자를 영국에 인도했다. 테러의 배후가 카다피임을 인정한 셈이다. 2003년 리비아 정부는 270명의 사망자 가족들에게 모두 27억 달러를 배상하기로 약속함으로써 일단락됐다. 高銀 씨는 카다피가 저지른 이런 수많은 테러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책임을 미국에 轉嫁(전가)한 것이다.
      
     한편 高銀 시인은 2009년 8월24일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최보식 기자는 高씨에게 “선생의 시는 김정일의 칭찬을 받았고, 북한 풍경이나 人情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한 번이라도 북한 주민의 고통을 노래한 적이 있나”라고 묻자 그는 “서울의 달동네도 마찬가지다. 북한만 그런 게 아니라, 거기도 참담한 삶이 있다. 우리 대통령이 도시 빈민을 어떻게 다 해결하는가”라고 반문했다.
     최 기자가 “북한 주민의 참상에 대한 자료는 많고 자주 보도됐다. 당장 우리 주변에는 이를 증언할 탈북자들이 1만5000명이 넘는다”고 묻자 그는 “일일이 지적해서 남북 관계에서 무슨 기여를 하는가. 나는 정치인이 아니다. 개선해줄 아무런 힘이 없다”고 말했다.
     
     2011년 3월11일 일본 대지진 직후인 3월16일에는 중앙일보에 <일본인에게 부치는 편지>라는 글을 기고했다. 고은 시인은 기고문에서 “일본의 지진과 태풍이야말로 일본의 미덕인 인내와 결속의 가치를 삶의 유산으로 삼고 있다”고 썼다. 3월14일에는 한겨레 신문에 <일본인에의 예의>라는 시를 기고하기도 했다. 이 시에서 高銀 씨는 “일본은 새삼 아름답다. 결코 이 불행의 극한에 침몰하지 않고 범죄도 사재기도 없이 혼란도 없이 이 극한을 견디어내고 기어이 이겨낸다”며 대지진 참상 속에서의 일본인들의 모습을 노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