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일본 NHK 위성방송에서 방영하는 ‘괴짜 시리즈’를 우연히 봤다. 매주 한 번씩 내보내는 프로그램인 듯 했는데, 그 날은 기차와 연관된 3명의 괴짜 이야기가 나왔다. 한 명은 일본 전국 기차역 가운데 깊은 산골이나 외진 마을에 있는 무인역(無人驛= 역무원이 한 명도 없는 곳)만 찾아다니는 사람이었다. 다른 한 명은 우리의 전화번호부처럼 두툼한 열차 시각표를 앞에 놓고 ‘무슨 무슨 역’하고 이름만 대면 금방 그 역이 나오는 페이지를 펼치는 재주를 부렸다. 그게 무에 대수냐고 의아해할지 모르나, 일본에는 자그마치 4천6백 개에 달하는 기차역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나머지 한 명은 ‘에키벤(驛弁)’ 애호가였다. 에키벤은 역에서 파는 도시락을 가리킨다. 역의 일본어 ‘에키’와 도시락의 일본어 ‘벤토’에서 합성한 말이다. 그 사람은 어느 역에서 어떤 종류의 도시락을 파는 지 또르르 꿰고 있었다. 이 또한 경부선을 타거나 호남선을 타거나, 혹은 새로 나온 고속열차 KTX를 타거나 판에 박은 듯 똑같은 도시락을 사먹어야 하는 우리로서는 금방 이해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러니 잠깐 설명하기로 하자.
    일본의 철도는 북쪽 홋카이도의 왓카나이(稚內) 역에서 남쪽 가고시마의 야마카와(山川) 역까지 최단 코스가 2천6백87킬로미터에 달한다. 그리고 대개 정거하는 역마다 그 고장의 향기가 스민 색다른 도시락을 판다. 대합이 많이 잡히는 곳에서는 대합구이, 연어로 유명한 동네에서는 연어초밥, 명물 토종닭이 있는 고장에선 닭찜이라는 식이다.
    이 같은 에키벤이 언제 등장했는지에 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1877년에 지금의 오사카 역에서 팔았다는 것과, 오사카 근처인 고베 역에서 팔았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통설로는 1885년 7월에 도쿄의 우에노(上野)와 우쓰노미야(宇都宮) 사이에 철도가 개통되었을 때, 검은 콩고물 묻힌 주먹밥과 죽순에 싼 노랑무, 그리고 ‘우메보시’(=매실장아찌)가 든 도시락을 5전에 판 것이 효시라고 한다.
    그렇다면 대체 가짓수는 얼마나 될까? 일본철도 구내영업중앙회라는 사단법인이 있다. 1946년에 설립된 이 단체 가입회원 중 에키벤 제조 및 판매회사는 1백31개였다. 한창 에키벤이 인기를 끌던 무렵의 5백 개에 비하면 엄청나게 줄어든 숫자이다. 여기서 밝힌 에키벤의 종류가 2천에서 3천 가지 사이라고 했다. 정확한 통계를 내지 못하는 이유는 과연 어디까지를 에키벤으로 쳐야 할지 정해진 규정이 없고, 또 소리 소문 없이 묵은 것은 사라지고 새 것이 등장하여 일일이 체크하기 힘들기 때문이란다.
    아테네올림픽이 막바지를 향하던 2004년 8월 말, <아사히신문>에는 남부의 조그만 도시 야마구치(山口) 역에서 20년 만에 다시 에키벤을 판다는 기사가 실렸다. 물론 ‘삿쵸 동맹 벤토’라는 이름의 그 에키벤이 과거 그 지방과 결부된 역사적 사건을 풍자하여 만들었다는 화제성 때문에 뉴스로 다루었겠지만, 그래도 그까짓 도시락 하나 새로 나온 것을 중앙 일간지가 보도하는 걸 볼라치면 그 만큼 에키벤이 그네들 생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문화현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판매량은 한창 피크를 이루었던 1960년대에 견주어 요즈음은 내리막길인 듯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국민소득이 올라 삶의 질이 높아지면서 항공로가 거미줄처럼 늘어나 여차하면 비행기를 타는 승객이 늘어났다. 게다가 신칸센을 위시한 고속열차의 속력은 점점 빨라져 어지간한 역은 본 체 만 체 휙 지나쳐 버린다. 에키벤을 먹고 자시고 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 바람에 에키벤 애호가들은 백화점이나 대형 슈퍼마켓의 에키벤 코너에 가서 입맛에 맞는 것을 사와 집에서 즐길 수밖에 없다. 어린이나 청소년들은 또 어떤가? 밀물처럼 밀려든 서양문화에 입맛이 길들여진 그들은 햄버거니 뭐니 하며 패스트푸드를 더 즐긴다.
    그래도 가장 철도 이용객이 많은 도쿄 역의 판매량이 연간 5백만 개를 넘는 등 에키벤에 대한 일본인들의 애정은 쉬 식을 것 같지 않다. 그런 에키벤의 역사를 지켜나가느라 10년 전 ‘에키벤의 날’까지 제정했다. 해마다 4월10일이 바로 그 기념일이다. 일 년 365일 가운데 유독 그 날로 정한 까닭은 ‘벤토’의 한자 ‘弁’의 생김새가 ‘4’와 ‘십(十)’을 연상시키고, ‘10’의 발음이 ‘토’이기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무리 판매량이 준다 해도 에키벤이 어엿한 하나의 전통문화로 살아 있는 일본이 참 부럽다. 다들 잘 아는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기차여행을 해 보라. 앞서 말한 대로 도시락은 천편일률로 한가지이고, ‘천안 명물 호두과자’는 굳이 천안역이 아니라도 어디서나 팔고 있다. 왜 우리는 호남선에서는 영광굴비 도시락, 전라선에서는 재첩 도시락, 영동선에서는 황태구이 도시락을 맛볼 수 없는 것일까? 안타까운 노릇이다.


    * 삿쵸(薩長)= 옛 일본지명인 사쓰마(薩摩)와 죠슈(長州)를 가리킨다. 사쓰마는 현재의 남부 가고시마 지역이고, 죠슈는 야마구치 일대이다. 서로 반목하던 이 두 유력 지방영주가 1866년에 도사(土佐= 현재의 고치 高知 지방, 도사견이란 이름의 개로 유명) 출신의 혁명아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중재로 서로 손잡고 당시의 권력기관인 막부 타도에 나선 것을 일러 삿쵸동맹이라 부른다. 그것은 2년 뒤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이루는 기폭제가 되었다.

     

    도서출판 기파랑 펴냄 '일본 상식문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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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 y2cho88@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