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8일자 오피니언면 '동아광장'란에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쓴 '사적 폭력에 너그러운 정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 나라가 과연 근대화했는가, 했다면 얼마나 했는가, 선진사회로 진입할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가를 측정하는 데는 여러 가지 지표가 있을 수 있다. 달러로 표시된 1인당 국민소득은 그 가운데 한 가지일 뿐이다. 나더러 가장 보편적이며 유용한 지표 하나를 추천하라면 별로 주저하지 않고 한 사회로부터 폭력이 얼마나 말끔하게 국가로 회수됐는가라는 점을 들고 싶다.

    중세시대에는 사회에 폭력이 가득했다. 정의와 도덕의 이름으로 사적 개인에 의해 폭력이 행사됐고 법적으로 정당시됐다. 18세기 말의 일이다. 문장 사대가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떨친 양반관료의 집에서 종이 술에 취해 주인을 욕한 사건이 발생했다. 얼마 뒤 종은 시구문 밖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장안에서는 양반댁의 가풍이 얼마나 엄한가라는 평판이 나돌았다. 19세기 경상도 어느 고을의 이름 있는 양반 가문에서의 일이다. 젊은 과부 며느리가 집안의 머슴과 사랑을 나눴다. 일이 발각되자 사람들은 며느리를 광에 가둬 굶겨 죽였으며, 머슴은 관에 넣어 톱으로 썰어 죽였다. 역시 가풍의 엄함을 기리는 미담으로 남았다.

    불법 눈감는 건 정부의 배임

    근대사회에서는 사적 개인에 의한 폭력의 행사는 아무리 도덕적으로 정당할지라도 공권력의 처벌 대상으로서 불법이다. 사회에 잠재한 일체의 폭력은 유일한 정당적 폭력체인 국가로 회수된다. 개인이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정당방위인 경우에만 가까스로 인정된다. 나머지 일체의 사적 폭력은 국가권력에 대한 도전이며 불법이다. 사회과학적으로 이야기하면 국가와 사회의 분리 또는 공과 사의 분리가 된다. 근대화의 본질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공과 사의 분리이다.
    요사이 한국 정치와 사회의 행태를 보노라면 이 나라가 과연 근대화된 나라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적 개인과 집단에 의해 공공연히 폭력이 행사되는데도 정부가 그것을 용인하거나 심지어 조장까지 하는 현상이 버릇처럼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정부 초창기의 일이다. 부산에서 화물연대가 부두와 도로를 막고 농성을 할 때, 청와대의 사회수석이 조정을 한답시고 현장에 달려간 적이 있다. 나는 그때부터 이 정부의 장래가 밝지 않음을 미리 알았다. 사회적 약자라 하여 폭력을 너그럽게 봐 주는 모습은 중세의 도덕정치가나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폭력은 발생 현장에서 소방수가 불을 끄듯이 즉시 진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연후에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정책과 제도로써 치유함이 근대 정치의 기본 논리이다.

    5월 평택에서 발생한 폭력시위와 관련해 한명숙 총리가 관계 장관과 더불어 발표한 담화문은 2006년까지 한국의 정부를 지배한 정치사상이 중세적이었음을 후세에 알리는 사료로 남을지 모른다. 당시 한 총리는 불법 폭력시위를 가리켜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이라 했으며 “모두 물러서서 냉정을 되찾자”고 호소했다. 비슷한 일은 7월에도 반복됐다. 포항 건설노조가 포스코 건물을 불법 점거한 사건이 발생하자 한 총리는 “자진해산할 경우 교섭을 주선하는 등 최대한 선처할 계획”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정부가 폭력의 현장을 방치하는 것은 사회의 평화를 위해 오로지 너만이 폭력을 사용하라고 국민에게서 부여 받은 위임에 대한 중대 배반이다. 그 결과 정부가 국민의 불신을 받는 일은 그리 안타깝지 않지만, 더 무서운 업보는 사회 자체가 서서히 폭력화한다는 점이다.

    죄책감 모르는 ‘주먹질 사회’

    무슨 시설의 유치를 둘러싸고 같은 지방민끼리 폭력으로 대립한 일, 정책 공청회에서 이해 당사자 집단이 폭력으로 회의 자체를 무산시킨 일 등 지난 몇 년간의 예를 들기란 별로 어렵지 않다. 이윽고는 대학 캠퍼스 내의 학술회의에까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난입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어디 물리적인 폭력만이 폭력인가. 무례의 폭언으로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정신적 폭력은 어떤 실정인가. 우리는 아직도 사회에 폭력이 잠재한 중세와 근대의 문턱에서 방황하고 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