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청소년대표팀 훈련 때 아물지 않을 상처 줘귀화하며 할아버지 묘 앞에서 “이씨 성은 지키겠다”
  • 꿈에도 그리던 한국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의 첫 조국행을 내 일처럼 기뻐해줬다.
    꼼꼼히 옷가지며 물건들을 챙겨주던 부모님들은 “한국어를 더 연습했어야 하는데. 하지만 걱정 말아라. 모두들 잘 대해 줄 거야”라고 걱정 담긴 얼굴로 등을 두드려줬다.
    아직 어린 열여덟 살. 부푼 기대를 안고 만난 조국 한국은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2004년 태극마크의 꿈을 안고 달려간 파주 NFC.
    한국 청소년 국가대표팀 훈련캠프는 그에겐 너무나 낯선 공간이었다.
    배우느라고 애를 썼지만 어눌한 한국어 실력과 문화의 차이는 그를 겉돌게 했다.
    그리고 그에게 들려온 한 친구의 한 마디는 열여덟 살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자식, 한국말도 잘 못하는 반 쪽바리 주제에...”
    민족학교에서 일반 일본인 학교로 옮겨왔던 중학교 시절, 이지메를 각오하고 한국이름 이충성을 고집했던 그에게 ‘반 쪽바리’라는 말은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는 결국 일주일 만에 짐을 싸 일본으로 돌아갔다.

  • ▲ 이충성 선수의 가족 사진.ⓒ이충성 선수 블로그 캡처
    ▲ 이충성 선수의 가족 사진.ⓒ이충성 선수 블로그 캡처

    그리고 3년 뒤인 2007년. 그는 할아버지의 묘 앞에 선다.
    “할아버지. 어쩔 수 없었어요. 한국은 저를 받아주지 않았어요. 전 이제 일본으로 귀하합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이씨 성은 꼭 지키겠습니다.”
    그의 눈에선 굵은 눈물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리 타나나리. 가슴에 태국마크 아닌 일장기를 단 이충성은 하늘나라에 계신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켰다.
    30일 새벽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아시아컵 호주와의 결승전 연장전에서 결승골을 날린 그의 등에는 'LEE'라는 성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는 지난 22일 일부 한국 언론이 자신에 대한 보도를 본의와 다르게 보도했다며 블로그에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저는 지금까지 커오면서 한국과 일본 양쪽을 존중하며 존경한다는 신념을 아쉬워한 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게 있어서 조국은 한국・일본 둘 다입니다.
    저는 일본이라는 국적을 선택하고 지금은 축구 일본대표로 선발되어 아시아의 정점을 목표로 팀에게 힘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미디어 분들로부터 ‘한국과 시합할 때의 기분은?’이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번 대회, 한국과 경기를 한다고 하면 준결승. 토너먼트 중의 시합이라는 것도 있으며 어렸을 때부터 TV와 경기장에 발걸음을 옮겨 보러 갔었던 동경했었던 양국의 경기. 정작 자신이 이런 상황이 된 지금, 기대되는 마음과 마음이 아픈 기분. 양쪽의 기분이 되어 있습니다.
    일본과 한국. 저는 양쪽의 문화 속에서 자라온 것처럼 축구로 자라고 축구로 살아온 저이기 때문이 이런 기분이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시합을 진행하는 것에 있어서 한국을 존경하고 경의를 바친 다음에 한 명의 축구선수 '이 충성'으로서 시합을 희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리 타나나리 아닌 이충성은 이 글을 쓰면서 2004년의 파주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기대되는 마음과 마음이 아픈 기분’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아시아컵 우승의 주역으로 자신의 블로그의 30일 표현대로 ‘히어로’(영웅)이 된 그는 하지만 자신의 마음의 상처를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나처럼 되고 싶다고 동경하는 자이니치 아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북한 대표를 선택한 안영학, 정대세 같은 위대한 선배들도 있다. 그러한 길도 있다는 것을 알아두길 바란다. 두 가지 선택을 고려한 후 각자의 입장에서 결정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