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1일자 오피니언면에 전 국방대 총장인 김희상 명지대 교수가 쓴 '미·북 평화협정의 함정'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18일 하노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핵 포기를 전제로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문제를 논의했다고 한다. 보도대로라면 미국 측에서 먼저 제의하고 한국 정부도 여기에 적극 호응하고 있는 눈치다. 내외의 많은 전문가들도 미국의 진일보(?)한 유연한 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듯하고, 만약 북한이 여기에 조금만 유연하게 대응해 오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갈 태세다.

    물론 이것이 어제오늘 처음 제기된 문제도 아니니 우리 정부도 나름의 충분한 검토와 대책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이것이 과연 우리가 그렇게 환영해도 좋을 사안인지 좀 더 신중히 살펴봐야 할 것이 많다.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서는 우선 미국과 북한 간에 더 이상 적대관계에 있지 않다고 하는 평화협정을 맺게 될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동란의 종전(終戰)을 선언’하겠다고 한 것일 게다. 그러나 미·북 간의 평화협정은 한·미 군사동맹과는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관계다. 한·미 군사동맹은 어떤 형태로든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핵 문제 해결이라는 핑계가 좋다지만 한·미동맹은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될 사항이다. 실은 9·19 합의 때도 왜 거기에 평화체제 논의가 연결되어야 하는지 그것을 의심하고 불안해하는 전문가가 많았다.

    또 이렇게 남과 북이 ‘분단된 평화체제’를 구축하면 한반도 영구분단의 비극은 차치하고라도 항구적 평화는 보장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나의 민족국가가 분단된 상태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상태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갈등과 분쟁이 이어질 수밖에 없고 항구적 평화의 유지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인류 역사의 교훈이다. 온 세계가 미래의 새로운 가치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데 우리만 민족이 분단된 채 동족 간의 갈등에 민족적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으면 결국은 우리 민족이 세계사에서 낙오하고 말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북한이 진심으로 이런 ‘남북 평화공존’에 만족할 것인가, 특히 평화공존을 위해 핵까지 포기할 것인가 하는 것은 더더욱 의문이다. 이 시점 적화통일은 북한 체제의 최고 존재이유이고 핵은 북한 체제유지와 적화통일의 핵심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적화통일 말고는 오늘 북한 김정일의 체제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없지 않은가? 더욱이 북한 핵은 이제 완성단계에 이른 상태다. 평화공존이든 핵 포기든 어느 것도 가능해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제의도 아무런 실익은 없이 북한에 핵무기 완성을 위한 시간과 자원 획득의 기회만 주고 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도대체 이 시점에 미국이 왜 저런 제의를 했을까? 미국과의 불가침 조약은 오래전부터 북한이 줄곧 요구하고 미국은 거부해 오던 사안이 아니던가? 그 점이 또 하나의 의문이다. 중국에만 정성을 쏟으며 로버트 아인혼(미국 전략문제연구소 고문)의 말처럼 ‘북한의 수석 변호인’역할이나 하고 있는 한국과의 동맹에서 희망적 미래를 기대하기가 어렵다고 보고, 차라리 북한 핵 문제의 해결과 맞바꿀 수 있는 협상카드 정도로 활용한 것 아니냐, 말하자면 한국과의 동맹을 버려도 좋을 카드로 본 것 아니냐 하는 우려인 것이다.

    결국 아무리 생각해도 미국은 몰라도 우리 한국으로서는 기대보다는 우려가 더 큰 제의일 수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잘 돼도 장기적으로 한반도의 항구적 갈등상태와 민족적 쇠망(衰亡)을 예약하게 될지 모르고, 자칫 이래저래 시간을 끌며 보다 정교한 핵의 개발과 보유를 기정사실화하려는 북한 나름의 ‘대화전술’에 멍석이나 깔아 주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인 것이다. 실로 온 국민이 정말 지혜로운 눈으로 직접 살펴보고 확인해야 할 사안인 것이다.김희상 · 명지대 교수 · 전 국방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