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인들이 유럽인과 유럽 문명을 본격적으로 대한 것은 언제, 어디에서였을까? 시기는 1543년 8월, 장소는 일본 최남단 가고시마(鹿兒島) 앞 바다에 떠 있는 섬 다네가시마(種子島)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때 일본인들은 좌초하여 해안으로 떠밀려온 배에 타고 있던 괴상한 옷차림과 생김새의 인간과 맞닥뜨렸다.
    당시의 일본은 절대 권력자 부재가 불러온 군웅할거의 난국(難局), 그런 탓이었던지 이 사상 첫 서양인 접촉에 관해서도 여러 이설(異說)이 전해진다. 우선 문제의 배가 포르투갈 선박이었다는 주장과, 중국 배에 포르투갈 상인이 타고 있었을 뿐이라는 주장으로 나뉜다. 말이 통하지 않아 배에 타고 있던 중국인과 필담을 하여 간신히 의사소통을 했다는데, 그 중국인이 당대의 해적 두목 왕직(王直)이었다는 설과 유생(儒生) 오봉(五峰)이었다는 설로 갈리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시기에 일본인들이 서남만종(西南蠻種)이라고 훗날 기록한 포르투갈 장사치를 만났으며, 그에게서 총 두 자루를 구입했다는 사실이다. 당시로서는 최신식 무기였던 총의 일본 전래는 갈래갈래 찢어져 싸움으로 날을 지새우던 일본 국내의 전황(戰況)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을 뿐더러, 반세기 뒤의 임진왜란에서는 왜군이 한반도를 초토화시키는데 일등공신 노릇을 했음을 우리는 잘 안다.
    일본인의 손에 쥐어진 총은 서양 과학과의 첫 만남이나 다름없었다. 1607년에 난포 분시(南浦文之)라는 이름의 선승(禪僧)이 쓴 <철포기(鐵炮記)>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들은) 손에 한 가지 물건을 휴대하고 있었다. 길이는 두세 척(尺), 길쭉하고 속이 비어 있었다. 하지만 밑동은 밀폐되었고 옆쪽에 불이 통하는 구멍이 있었다. 사용할 때에는 묘약(妙藥)을 넣고 조그맣고 둥근 납덩이를 채운다. 구멍에다 불을 붙여서 쏘면 벼락 치는 소리가 나서 귀를 막지 않을 수 없으나 조그만 표적조차 영락없이 맞힌다.
    당시 다네가시마의 도주(島主)였던 도키타카(時堯)는 이 희대의 진품의 이름이 무엇이고, 어디에 써먹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감탄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여 만금(萬金)을 주고 두 자루를 샀다. 그는 화약 제조법을 가신(家臣)에게 배우도록 한 뒤 스스로 사격술을 익혀 백발백중의 기량에 도달했다. (중략).
    한편 도키타카는 휘하의 대장장이 몇 명에게 명을 내려 똑같은 물건을 만들도록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해도 밑동 부분(=방아쇠를 가리키는 듯)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이듬해 서남만종 장사치가 다시 찾아왔다. 그들 일행 가운데 한 명의 대장장이가 있었던지라 도키타카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그에게 가르침을 받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1년여 만에 수십 자루의 철포가 만들어졌다.”
    일본인들이 난생 처음 구경한 총을 그렇게 빨리 복제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토양이 구비되어 있었던 덕택이다. 총이 전해진 다네가시마 지역이 사철(砂鐵) 산지여서 예로부터 솜씨 좋은 대장장이들이 많았던 점을 먼저 들 수 있겠다. 게다가 좀 부풀리자면 온 나라가 전쟁터인 전국시대(戰國時代)였던지라 신무기를 필요로 하는 수요 또한 얼마든지 있었다. 위의 <철포기>에도 “불과 몇 년 사이에 순식간에 66개 나라(=여기서는 독자 세력을 갖춘 각 지역을 뜻한다)로 철포가 전해지면서 그 제조법까지 터득하기에 이르렀다”고 나와 있다. 그러니 고작 10년 만에 30만 자루의 총이 보급되어 유럽 전체의 보유량보다 많아졌다는 소문이 결코 허튼 소리는 아니었던 셈이다.
    내친 걸음에 당시의 일본 전사(戰史)를 잠깐 들추어보자.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라는 맹장이 있었다. 그가 이끄는 기마부대는 가히 천하무적이었다. 전광석화 같은 기동력과 일기당천(一騎當千)의 용맹스러움을 앞세워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적진을 유린했다. 말발굽 소리만 들어도 상대편 병사들이 오금을 못 펴던 전설적인 이 기마부대를 괴멸시킨 것이 바로 3천 자루의 총으로 무장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철포부대였다. 1575년의 일이었다.
    망령이 나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가 죽고 나자 일본에서는 동쪽과 서쪽의 두 패로 나뉜 대전투가 벌어진다. 서기 1600년 9월15일, 천하를 거머쥐고자 일본열도 중부의 조그만 분지 세키가하라(關が原)에는 20만 대군이 집결했다. 하지만 승부는 불과 한나절 남짓한 시간에 싱겁게 갈렸다. 최대의 내전으로 일컬어지는 이 세키가하라 전투에 투입된 철포의 숫자가 무려 5만 자루였다니 단순 계산으로도 병사 4명 중 한 명이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던 셈이다.
    동군의 승리로 일본에는 에도시대의 막이 올랐고, 다시 250년 세월이 흘렀다. 이번에도 당연히 바다를 통해 나타난 또 하나의 서양 과학에 일본인들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떠야했다. 선체에 검은 칠을 했다고 하여 일본인들이 흑선이라 불렀던 배, 미국 해군제독 페리 휘하의 동인도함대가 그것이었다. 일본인들이 놀란 까닭은 이들 4척의 함선이 소문으로만 들었지 생판 본 적조차 없던 증기선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자극 받은 에도 막부는 서둘러 유일하게 국교를 맺고 있던 서양국가인 네덜란드에 두 척의 목조 증기선을 발주했다. 그 중 먼저 건조된 ‘간린마루(咸臨丸)’(배수량 약 700여 톤 추정)는 전장(全長) 163피트, 전폭(全幅) 24피트에 12문의 대포를 장착한 군함이었다. 간린마루는 나중에 통상조약 비준서 교환을 위해 미국 군함에 승선한 일본 사절을 호위하여 사상 최초로 태평양 횡단 항해에 성공함으로써 일약 유명해지기도 했다.
    그로부터 정확하게 4반세기가 흐른 1878년, 가와사키 쇼조(川崎正藏)라는 사람이 참다못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서양인들이 가진 것과 똑같은 선박을 만들기 위해 회사를 세운 것이었다. 현재의 가와사키중공업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일본 깃발을 단 증기선들이 꼬리를 물었다.
    한 걸음 나아가 이 회사에서는 일본 역사상 첫 잠수정까지 건조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둔 직후인 1906년의 일이었다. 전장 23.25미터, 전폭 2.15미터, 잠항(潛航) 배수량 63톤이며 가솔린과 2차 전지를 동력으로 삼았다. 원자력 잠수함이 해저를 누비는 지금 시각에서 보자면 하찮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당시로서는 놀라운 기술력의 산물이었다.
    가와사키중공업에서는 잇달아 1911년에는 첫 증기 기관차를 생산했다. 또 1918년에는 항공기 제작에도 손을 뻗쳤다. 그것은 라이트 형제가 인류 최초로 동력을 이용한 날틀에 올라 하늘을 비행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경탄시킨 지 불과 15년만이었다. 그렇게 축적한 기술로  개발한 최신예 전투기로 인해 미군들이 식은땀을 흘렸다는 이야기는 다음 항에서 따로 다루기로 한다.
    일본에서 초보적인 형태의 로켓 수평 발사 실험이 행해진 것은 1955년이었다. 도쿄대학이 자체 연구의 일환으로 행한 것이었다. 그 후 1969년에 우주개발사업단(NASDA)이 발족되고 부설 우주센터가 세워졌다. 일본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로켓 발사기지”라고 자랑하는 그 우주센터가 세워진 곳은 바로 저 옛날 포르투갈 상인이 총을 전해주었던 섬 다네가시마였다. 860만 평방미터에 달하는 우주센터에는 대형, 소형의 두 로켓 발사장이 들어섰다.
    일본이 첫 정지(靜止)위성 ‘국화 2호’의 발사에 성공한 것은 1977년이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30차례가 넘게 로켓을 쏘아 올렸다. 2001년 여름에는 높이 53미터, 무게 300톤의 신형 H2A 로켓 발사에 성공했다. 이후로도 H2A 로켓 발사는 거듭되었다.
    그 동안 일본에는 세 개의 우주관련 기관이 있었다. 앞서의 도쿄대학 연구소가 발전적으로 개편된 것이 우주과학연구소(ISAS)로, 우주 및 혹성 연구가 중심이다. 항공우주기술연구소(NAL)는 차세대 기술 개발에 주력한다. 나머지 하나가 우주개발사업단(NASDA)이며 로켓과 인공위성, 우주정거장 개발을 주축으로 삼아왔다.
    그러던 것이 2003년도에 이들 3개 기관을 통합한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가 출범하였다. 보다 효율적인 우주개발을 겨냥한 포석인 셈인데, 그래서인지 그 해 일본정부가 책정했던 관련 예산 가운데 JAXA에 배당된 것이 2천여 억 엔으로 전체의 3분의 2를 넘었다.
    다네가시마 우주센터에서는 2005년 2월26일 오후 6시25분, 박수와 환호성이 올랐다. 전장 53미터, 직경 4미터의 H2A 7호기가 성공적으로 발사되었던 것이다. JAXA 출범 후 첫 개가라고 할 이때의 성공으로 일본의 우주개발 야심은 다시 불붙게 되었다.
    당장 그것은 H2A 발사 성공으로부터 채 한 달이 지나기 전에 ‘유인 우주선 개발계획’으로 나타났다. JAXA가 우주정거장으로의 시험 비행을 계획하고 있는 무인 보급기(HTV)를 유인 우주선용으로 개조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해마다 현재의 JAXA 예산보다 더 많은 연구개발비를 계속 쏟아 부어야 한다는 이 계획이 성공을 거두게 된다면, 일본은 늦어도 2025년까지 러시아의 소유즈와 같은 유인 우주선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했다.
    대장장이를 시켜 유럽산 총 한 자루를 복제하던 섬, 4백여 년 만에 로켓 발사 기지를 갖춘 우주센터로 화려하게 변모한 일본 본토 최남단의 섬 다네가시마가 상징하는 의미가 자못 크다 하겠다.

    페리 매튜(Matthew C. Perry 1794~1858년).
    한자 이름 피리(彼理). 미국의 동(東) 인도함대 사령관. 미국 대통령 특사자격으로 기함 미시시피호에 올라 1853년 일본의 우라가(浦賀) 항구에 들이닥쳤다. 물과 식량, 석탄을 보급할 수 있도록 항구를 개방하고, 저장소 설치권 등을 주도록 도쿠가와 막부에 요구했다. 이듬해 미일 화친조약 체결에 성공했다.

    H2A 로켓
    지상에서 약 3만6천 킬로미터 상공의 정지(靜止)궤도에 무게 2톤급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일본의 주력 로켓. 직경이 4미터이고, 전장은 17층 빌딩의 높이와 맞먹는 53미터이다. 액체연료를 사용하는 2단식이고, 발사 직후 가속을 위해 대형 고체 보조로켓(SRB) 2기를 장착하고 있다. 7호기의 발사 비용은 94억 엔이었으나 앞으로 85억 엔까지의 코스트 다운을 목표로 삼고 있다.

    무인(無人) 보급기(HTV) 
    물과 식료품 6톤을 운반할 수 있는 직경 4.4미터, 전장 9.2미터의 보급기. 로켓 최상단부에 장착하여 발사한 뒤 우주 스테이션 가까이에서 자력으로 항행한다.

     

    도서출판 기파랑 펴냄 '일본 상식문답' 중에서
    도서 문의 : 기파랑 02-763-8996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 y2cho88@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