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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학을 바탕으로 ‘仁義의 나라’를 꿈꾸었던 요코이 쇼난退溪學이 日本을 건질 뻔했다

     許文道 (前 통일원 장관)
     
    퇴계학을 바탕으로 ‘인의(仁義)의 나라 일본’을 꿈꾸었던 요코이 쇼난.

      메이지유신(明治維新·1868년)으로 등장한 근대국가 일본은 침략국가였다. 비(非)백인세계 ‘근대화의 우등생’이라 일컬어진 근대일본의 실상을 좀 엿본다.
     
      서양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양이(攘夷)는 혁명의 구호였을 뿐, 유신(維新)에 성공하자 그날로 집어치우고, 일본은 서양을 배우고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국가의 우선 과제로 하였다. 얽매이는 원칙 같은 것이 없으니까 변신이 빠르다. 일본은 서양국가를 복사함으로써 근대화를 달성코자 했다.

    유신혁명이 있은 지 3년 남짓한 1871년(메이지4년) 11월, 정변을 주도했던 핵심 실세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1830~1878년),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등 세 사람을 필두로 정부의 절반이 통째로 참여하는 구미(歐美) 시찰 사절단이 만들어졌다. 이들이 시찰을 모두 끝내고 돌아온 것은 1년10개월이나 지난 1873년 9월이었다. 고금동서(古今東西)에 유례없는 일일 것이다. 이들이 노린 것은 한마디로 서양의 근대국가를 이식(移植)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구미사절단이 서양에 가서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보려고 들었던 것은 각 나라의 군수(軍需)공장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절단 귀국 후 이른바 정한론(征韓論) 정변을 통해 독재권력을 쥐게 되는 오쿠보 도시미치가 시찰을 통해 마음에 찍었던 모델국가는 프러시아였다.

    말할 것도 없이 군주전제(專制)와 상무(尙武)가 강한 나라였다. 사절단이 방문했을 때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이겨 재상(宰相)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을 선언한 다음인지라, 그를 만나볼 수 있었던 사절단에게는 강렬한 인상이 남았다. 이후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마음속에 비스마르크는 롤 모델(role model)로 남게 된다.
    어쨌든 일본의 근대화는 침략무력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할 수 있다. 과학, 기술, 산업의 근대화나 제도, 문물의 근대화가 군사근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침략무력을 조성하고, 운용하고, 합리화하고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해도 과함이 없을 것이다.
        
      주자학 했던 나라가 침략부터 생각하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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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일본근대화를 앞두고 구미를 순방했던 이와쿠라 사절단. 오른쪽부터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이와쿠라 도모미, 야마구치 나오요시, 기도 다카요시.

      일본은 침략무력을 청일전쟁(1894~ 1895년), 러일전쟁(1904~1905년)을 통해 그들이 군사근대화에 성공했음을 세계만방에 과시했고, 이 같은 일본식 근대화의 총결산이 한일 강제병합(1910년)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떨쳐 버릴 수 없는 의문이 있다.
    전(前)근대의 일본은 조선처럼 주자학(朱子學)을 하던 나라였다. 막부(幕府)는 에도(江戶)에 우리 성균관과 같은 창평학(昌平學)을 두었고, 전국의 영주의 근거지에는 조선의 향교처럼 번교(藩校)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히데요시군(軍)의 포로로 잡혀갔던 조선의 관료 강항(姜沆)에 의해 주자학은 퇴계학(退溪學)으로 일본에 전해졌고, 당시의 일본정부가 이를 관학(官學)으로 받아들여 창평학을 연 것은 1630년, 메이지유신을 하고서 이를 문닫은 것은 1871년이었다. 전근대의 일본은 주자학을 한 200년 체제교학으로 삼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막부의 직신이나 전국 영주들의 자제가 교육대상이었으나 말기에는 전국적으로 말단 무사계층에서도 수재들이 도쿄로 모여들었다 한다.
     
      논의를 단출하게 하겠다. 주자학을 포함하는 유학의 핵심은 역사를 통해, 중국이나 조선이나 공자의 가르침대로 인(仁)을 근본에 두는 정치사상이었다. 한마디만 보태면 인의(仁義)에 의한 왕도(王道)정치가 강조점이었고, 그것은 치국안민(治國安民)의 민본주의 평화사상이었고, 어느 한 나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보편주의 사상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의문점이 생긴다. 200년이 넘게 체제 엘리트들이 유학(儒學), 주자학을 하고서, 어찌하여 서양바람 좀 불어오니까 일거에 그동안 유일하게 대등하게 교제하던 이웃을 침략하는 데 일본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하나 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일본사람들이란 원래 윤리적 인식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란 말인가. 아니면 평화사상이나 도(道)와 같은 추상개념이나 천명(天命)과 같은 초월개념은 생래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사람들이란 말인가.
     
      만일 이와 같다면, 지난날의 역사가 문제가 아니라, 오고 있는 역사가 문제가 된다. EU(유럽연합)처럼 동아시아의 역사에 지역협력공동체가 기다리고 있다 해도 인(仁)과 같은 보편윤리에 대해 감성이 없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함께하기는 어렵겠기 때문이다.
     
     
      이재(異才) 요코이 쇼난(橫井小楠)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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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설명 : 프러시아를 모델로 군국주의적 근대화를 추진한 오쿠보 도시미치.

      일본에 근대국가가 출범하는 메이지유신이라는 혁명에는 흔히 하나의 주도사상이 없다고들 한다. 이런 중에 단 하나의 정치인으로는 오쿠보 도시미치를 들고 단 하나의 사상가로는 요코이 쇼난(橫井小楠, 1809~1869년)을 꼽고 있다.
     
      유신 최대의 추동(推動)역으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들 수 있지만, 그를 뒤에서 움직이게 한 책사(策士)가 오쿠보였던 것이다.
     
      철두철미 주자학자였던 요코이는, 미국의 페리 내항 이후, 높아가는 위기의식 속에서, ‘공(公)’의식 내지는 ‘공공(公共)의 정(政)’이라는 기준을 제시하여, 그때까지 감히 쳐다보지 못했던 막부의 ‘사(私)’를 비판하고 부정할 수 있는 시각을 격동기의 운동량 높은 지사들 앞에 내어 놓았었다.
     
      오쿠보 쪽이나 요코이 쪽 모두, 위기 앞에서 전체 일본을 구하는 길이 막부를 들어내고, 천황의 정부를 만드는 것이라는 데는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 방법에서 요코이 쪽은 천황 주변의 조신(朝臣), 막부의 중신, 덩치 큰 영주 등 당시 지배계층의 공화(共和) 일치에 의한, 체제변환을 추진했고, 오쿠보 쪽은 어디까지나 무력에 의한 토막(討幕)을 지향하여, 서로 경합하고 있었다.
     
      오쿠보의 무력노선이 대국(大局)을 장악했다. 그리고 새로 출발한 메이지정부는 요코이에게 그 치국의 경륜을 높이 사서 각료자리를 주었다. 그러나 다음해(1869) 요코이는 그 개명성을 싫어하고, 천황에의 절대충성을 미심쩍어 하는, 칼밖에 모르는 무사집단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일본근대정치의 출발점에 기적처럼 끼어들었던 천명(天命), 천리(天理), 인심(仁心)을 종(宗)으로 하는 유학적(儒學的) 이상주의가 야마토(大和)족의 천지에서 자취를 감추는 순간이었다.  
      
      요코이 쇼난의 평화사상
       
      곧잘 인용되는 요코이의 인물 크기를 나타내는 어록이 있다. 앞서서 소개가 있었던 ‘달관의 사(士)’ 가쓰 가이슈(勝海舟)의 메이지 시대의 회고담이다.
     
      “나는 지금까지 두려운 자를 두 사람 보았다. 그것은 요코이 쇼난과 사이고 다카모리이다. 요코이는 서양에 대해서도 그렇게 많이 알지 못하고, 내가 알려주었을 정도지만, 그 사상의 높은 격조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사다리를 걸어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몇 번이나 있었다. … 나가사키(長崎)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끝도 없이 총명한 사람이라고 마음속으로 크게 경복(敬服)하고서, 자주 사람을 시켜 그 설을 듣게 했다. … 요코이의 사상을 사이고(西鄕)의 손으로 행하게 된다면, (막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과연 사이고가 나오고 말았다.”
     
      실제는 요코이는 가이슈(海舟)의 사상적 스승이었고, 위기 속의 일본의 갈 길을 두고 요코이의 생각을 사이고에게 전한 것은 가이슈였다 한다.
     


  • ▲ 이퇴계를 이어받은 일본 주자학의 거두 요코이 쇼난.

      유신 150년이 돼 가는 요새 와서 일본서 요코이 연구가 부쩍 많아지고 있다. 그의 주자학 사상이 21세기 동아시아 시대가 요구하는 현대성을 일찍이 보여줬다고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막부시대 말기 가이슈의 한·중·일(韓中日) 삼국동맹론이나, 사이고와의 에도 무혈개성(開城)이 모두 주자학자 요코이의 사상적 영향으로 가능했던 것이라고 연구자들은 추단(推斷)하는 데 주저치 않는다.
     
      지난번에 유신 전후에 있었던 일본의 조선침략사상을 보았지만, 19세기 초 전후(前後)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일본이 대륙과도 거리를 두고 자족(自足)체제가 굳어지면서, 고대 역사서 속의 신화를 그대로 사실로 믿는 데서 출발하는 야랑자대(夜郞自大)적, 국수주의적 침략사상이 일본 국학(國學)이다, 미토학(水戶學·‘미토’는 일본 국학의 발생지역을 말함)이다 하면서 팽배하게 일어나, 조선 침략주의자 요시다(吉田松陰) 등 지사라는 사람들의 혼을 사로잡았던 것을 알게 된다.  
      
      日本사회의 仁 사상 불감증
     
      일본의 체제 엘리트들이 200여 년간이나 그 본령이 인(仁)의 정치사상(형이상적인 관념장치가 따라 붙어 있지만)인 유학, 주자학을 공부한 결과가 침략사상뿐인가 싶으니, 솔직히 말해, 무엇보다도 일본사람에 대해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중에 한 줄기 구원과도 같은 강렬한 광망에 부딪혔다. 요코이 쇼난을 만난 것이다.
     
      요코이 사상의 골간을 알게 하는 시(詩)가 있다. 형이 먼저 죽어서 돌보고 있던 조카 둘을 그의 만년인 유신 2년 전에 미국유학을 보내면서 써준 것이다.
     
      明堯舜孔子之道
      요순 공자의 도를 밝히고
     
      盡西洋器械之術
      서양의 기계의 술(術)을 다 익힌다면
     
      何止富國何止强兵
      어찌 부국에 그치고 어찌 강병에 그칠 것인가
     
      布大義於四海而已
      대의(大義)를 사해(세계)에 펼칠 뿐이다.
     
      여기서 대의라 함은 운동 속에 있는 개인이 그가 속한 특수 상황 속의 헌신대상을 흔히 대의와 연관하여 일컫기 때문에, 다루기 쉽지 않다.
     
      그러나 요코이의 대의는 처음부터 보편주의다. 그리고 평화주의인 것을 알게 한다.  
      
      ‘제1등의 인의(仁義)의 나라 돼라’
     
      49세 때, 그를 유신사에서 활약이 많았던 한 거물급 영주가 빈사(賓師)로 초빙코자 보낸 사자(使者)에게 요코이는 그 시절 절대로 다른 데서는 듣기를 기약하기 어려운 말을 하고 있다. 뜻을 펼 찬스를 맞게 된 요코이가 그동안 갈고 닦은 포부의 일단을 드러낸 것이라 할 것이다.
     
      “여기서 일본에 인의(仁義)의 대도를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강국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강(强)이 있으면 반드시 약(弱)이 있다. 이 도(道)를 분명히 밝혀서 세계의 뒤 봐주기(世話やき)역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한 발에 만 명이나 2만이 전사하는 것과 같은 일은 반드시 그만두게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일본은 인도와 같은 식민지로 될 것인가, 세계 제1등의 인의의 나라가 될 것인가. 완전히 이 두 가지 길 말고 있을 수가 없다.”
     
      이 얘기가, 국수주의, 배타주의, 무단(武斷)주의가 폭풍처럼 일본천지를 휩쓸던 그 시절에, 정치무대를 사정권에 두고 있던 사상가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심히 놀라운 일이다.
     
      위의 얘기의 서두에서 요코이는 제시하는 원칙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다.
     
      “도(道)는 천지의 도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도라든지, 외국의 도라든지 하는 것은 없다. 도(道)가 있는 곳은 외이(外夷)라고 해도 ‘중국(中國)인 것이다. 무(無)도로 된다면, 우리나라(일본), 중국일지라도 바로 오랑캐(夷)인 것이다. 처음부터 ‘중국’국이나 오랑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때에 이미 요코이의 주자학은 도(道)와 인(仁)으로 글로벌리즘에 도달했던 것이다. 루스 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에서 지적하고 있는 일본인 일반의 무원칙적 상황주의 행동방식을 구제하고도 남을 사상가가 요코이였다. 하지만 유신 이듬해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메이지정부에서 제1의 경륜가였던 그가 살아 있었다면, 근대 일본이 침략국가의 길을 가는 것을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개명성이나 이상주의나, 문민적(文民的) 조리(條理) 같은 것은 거부하고 보는 것이 일본사회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사가(史家)의 요코이 평을 들어본다. “요코이가 막말(幕末)의 가장 뛰어난 사상가였던 소이는, 새 일본의 국가구상을 전개하는 것이 가능했던 단 한 사람의 사상가였던 데에 있다. … 막말의 이 시기에, 훗날 메이지정부가 궁극의 목표로서 추구하게 된 ‘부국강병’을 넘어서서, 그 저쪽에 있는 대의를 생각한 사상가는 요코이뿐이었다고 할 것이다.”(大江志乃夫, <日本近代史>)  
      
      요코이의 주자학
     
      우리가 망국 100년을 돌이켜 보면서 19세기 중엽 막말기의 일본의 한 주자학자인 요코이를 특별히 주목해 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무렵, 요코이뿐만 아니고, 일본에도 한국에도 주자학자가 많았다. 그때는 미국 페리함대의 내항, 영·미·불·란(네덜란드) 등 4국함대의 일본포격,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으로 동양전통문화와 서양문화가 대결하던 때였다. 요코이의 특이함은, 일본이나 한국의 어떤 주자학자와도 달리 그만이, 요순삼대(堯舜三代)의 도(道)라는 유교의 궁극의 정치이념을 고수한 채 유교적 잣대를 그대로 들이대어 서양문화를 이해하고, 비판하고, 넘어서는 시각을 견지할 수 있었다는 데 있다.(平石直昭, <橫井小楠 儒學的正義とは何か>)
      요코이는 민본(民本), 천하의 공(公), 인정주의(仁政主義) 등 유교에 포괄되는 기준을 딛고서 근대서양의 정치, 사회제도를 이해해 보인 선구자였던 것이다. 즉 요코이는 동양적 아이덴티티에 어떤 동요도 없이 서양문화를 재단하고 응대할 수 있었던 희귀한 주자학자였다.  
      
      요코이의 서양관
       
      요코이는 일본 최초의 태평양을 건너는 함선의 선장이 되어 미국을 다녀온 지기(知己) 가쓰 가이슈로부터 미국의 선거제 대통령 얘기를 듣자마자, 그 자리에서 ‘그것이 요순(堯舜)의 정치다’라 했다는 것이다.
     
      요코이의 내면에 자리 잡은 유교적 이상주의의 기준은 혈통세습의 왕위에는 철두철미 반대였다. 인민을 유복하게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관점에서, 최고의 정치적 도덕적 지도능력이 있는 인물이 정상에 서야 하는 것이었다. 혈통세습이 아닌 능력에 의한 교대야말로,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 물려준 것처럼, 요코이의 진정한 왕도(王道)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코이는 서양에 가본 적도 없고, 서양학문을 하지도 않았으면서 듣는 순간에 워싱턴 대통령을 요순이라 했던 것이다. 요코이는 평화주의로서도 미국의 워싱턴을 높이 평가했다.
     
      요코이의 한 제자(메이지천황의 시강·侍講 모토다 나가자네·元田永孚)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전해 준다.
     
      “하루는 요코이 선생의 설(說)을 들었더니, 개국(開國)의 대견식으로서, 천지세계의 도리는 나라를 여는 데 있는 것인데, 외국에는 일찍부터 이 같은 사고방식이 있었다. … 미국의 개조(開祖) 워싱턴이란 자는 늘 세계의 전쟁을 멈추게 하는 것을 뜻으로 삼고 있었다. 지금 각국 전쟁의 참담키가, 생민(生民)의 불행을 듣기에 참기 어렵다. 그러므로 미국과 협의하고, 전쟁의 해(害)를 알아야 할 것이다.
      워싱턴은 요순 이래의 성인으로, 혹은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서양세가 일본에 닥쳐와 나라를 여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생겼을 때, 주자학자 요코이는 스스로의 원칙으로 당당했고, 원칙을 갖고서 개방적이었다. 그가 요로에 제시한 구미사절 응접의 기본원칙은 “천지인의의 대도를 관철하는 조리에 맞추는 것”으로서 구체적 방침으로서는 “유도(有道)의 나라는 통신을 허(許)하고, 무도(無道)의 나라는 거절한다”는 것이었다. 인심(仁心)을 근본으로 하는 국시가 그 나라에 있느냐 없느냐를 오랑캐건 양이(洋夷)건 가릴 것 없이 보편주의적으로 적용하는 것이었다.
     
      사상사(思想史)의 대가로서 전후(戰後) 일본을 대표하는 정치학자로 꼽히는 마루야마(丸山?男)는 “요코이가 ‘도리(道理)라는 주자학적 카테고리의 개념으로 일찌감치 근대적 국제의식을 수용했었다”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페리 제독의 내항을 앞두고, 요코이는 막부를 향해, ‘인의는 챙기지도 않고 진흙탕에 처박아 놓고, 무력을 강대하게 하여 대응하는 것만 염두에 두고 있는데 “권변(權變)공리(功利)의 졸렬한 술책”으로서 무(武)로서 나라를 일으킨 폐단’이라고 호되게 비판하기도 했다.  
      
      서양을 주자학으로 내려다본 요코이
     
      요코이는 또 상업을 보는 눈이 일반 주자학자들과 달랐다. 그가 영주의 스승으로 갔던 지역에서(후쿠이 겐·福井) 그는 교역을 지도하여 식산흥업에 성공하고, 메이지 시대 부국노선의 전철을 깔기도 했다. 유신 8년 전인 1860년에 대표작이라 할 <국시삼론>(國是三論) 속에서 그는 인(仁)의 정치사상을 깔고서 교역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있다.
     
      교역은 당사국들의 신의의 교환 위에 가능해지는 것으로, 인민의 복지를 높이는 인(仁)의 정치를 여러 나라에 보편적으로 펼 수 있는 수단을 국주(國主)에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는 주자학을 ‘실용’하고는 다른 실천의 학으로서 실학이라 강조했는데, 요코이 주자학의 실학으로서의 전개 위에 인(仁)의 가치계열 속에 교역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교역의 적극적 긍정이 주자학적 사고법인 격물(格物)의 결과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주자(朱子)의 격물 궁리가 민생(民生)의 쓰임을 충족시킬 격물이 아니라고 몰아붙이고도 있다.
     
      주자학자 요코이가 서양을 보는 안목은 어디까지나 인심(仁心)을 종(宗)으로 하는 시각이었다.
     
      유신 3, 4년 전에 요코이의 도(道)에 대한 사명감이나 사상은 절정에 달했던 것 같다. 이때 그는 앞에서 본 모토다(元田)와의 대화록인 <소산한화>(沼山閑話)에서 서양문명의 도달점을 비판적으로 내다보고 있다. 요코이는 여기서 서양문명을 ‘사업의 학(學)’이라 하고 주자학이 있는 세상을 ‘심덕(心德)의 학(學)’이라 하여 대비하고 있다.
     
      “서양의 학은 단지 사업상의 학으로서, 심덕상의 학이 아니다. 군자, 소인, 상하 가릴 것 없이 단지 사업의 학일 뿐이니까 사업은 더욱더욱 번창한다. 그런데 심덕의 학이 없으므로, 인정이 걸쳐 있는 일을 알지 못한다. 교역담판도 사실 약속을 다잡는 것뿐으로, 그 다잡은 결과는 드디어 전쟁이 되고 만다.” “사업의 학에서 심덕의 학이 없어서는 서양열국의 전쟁은 멈출 날이 없을 것이다.”
     
      요코이의 이 얘기가 지금부터 150년 전에 있고 나서, 그동안 서양문명이 기울게 되는 대전쟁이 주로 서양사람들 사이에 두 번이나 있었다. 요코이 주자학이 문명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력에 다시 한 번 놀란다.
     
      서양만 쳐다보고 일어난 신생 일본에 역사는 요코이를 과분하다고 여겼던 것일까. 요코이는 새 정부의 경륜을 펼 수 있는 자리에 갖다 놓였지만, 일본사회의 이(理)를 거부하는 검은 정염이 그를 암살하여 역사로부터 퇴장시켰다.
     
      서양에 대해 콤플렉스를 모르는 유일한 경륜가가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근대국가 일본의 침략국가노선은 이때 확실해졌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요코이는 퇴계학자였다
       
      李退溪曰,
      第一須先將世間窮通得失榮辱,
      一切置之度外, 不以累靈臺,
      旣辨得此心, 則所患已五七分休歇矣.
     
      (阿部吉雄, <日本朱子學과 朝鮮>에서)
     
      (이퇴계 말하기를, 제일 먼저 마땅히 세상의 곤궁한 것과 통달한 것, 얻는 것과 잃는 것, 영광과 굴욕, 이(利)와 해(害) 등 일체를 생각 밖에 두어, 마음을 번거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갖게 된다면, 병통이 되는 것은 5부 또는 7부까지는 나은 것이 됩니다.)(都珖淳 역, <退溪先生自省錄>)
     
      위의 이퇴계 왈 이하의 구절은 퇴계 <자성록>(自省錄)의 제일 첫 편지에 있는 구절이다. 요코이는 이 구절을 특히 좋아하고 중시하여, 고제들과 중요한 사명이 있는 사람들에게 묵서하여 주었다.
     
      위에 든 구절은, 제자들이 도학공부에서 연속적인 정신집중으로 얻게 되는 병통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퇴계는 제시하고 있지만, 요코이는 입지(立志)가 있고 난 다음의 궁리의 방법 내지 학문의 자세로서도 깊은 시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제자들에게 주는 글에서 드러내고 있다.
     
      〈자성록〉은 그동안 일본에서 그 진가가 높이 평가되어 왔다.
     
      전통 일본의 2대(大) 주자학자라 불리는 야마자키(山崎闇齋·1618~1682년)나 오오쓰카(大塚退野·1677~1750년)가 청년시절에 양명학(陽明學)을 하다가 퇴계의 <자성록>을 읽고 모두 주자학을 하게 되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현대가 되어서도 30년간이나 퇴계학을 연구하여 <이퇴계(李退溪)와 경(敬)의 철학(哲學)>이란 역작을 낸 일본 쓰쿠바(筑波)대학의 다카하시 스스무(高橋 進) 교수도 그 책의 서문에서 <자성록>을 만나 그가 인간 퇴계에게서 느낀 전인적(全人的) 감동을 적어 놓고 있다.
     
      “<자성록>의 내용인즉, 붕우(朋友)라기보다는 거의 문도들에게 준 서간형식의 강학 초고이다. … 이를 정서하여 좌우에 두고 때로 열독하여서는, 이같이 말하고 써보낸 자기의 언사가, 과연 스스로의 행위에 있어서는 실현되고 있는가를 ‘자성’하기 위해 이를 한 책으로 엮었다는 것이다. … 문도들에게 써보낸 초고를 재차 정서하여 책상에 두고서는 반성의 자료로 한 사람은 이퇴계(李退溪)를 두고서 이를 다른 데서 볼 수는 없다. 사람들은 여기서 이퇴계란 인격이 어떠한가를 엿볼 수가 있을 것이다.”
     
      메이지와 쇼와(昭和) 체제는, 일본근대를 패망으로 향한 전력질주로부터 구제할 수 있는 사상에 주자학자 요코이가 도달해 있었다는 것, 챙겨볼 수 있는 여유도 없었고 가락이 아니었다.
     
      암살된 구시대 사상가를 세상은 쉬 잊어 버렸다. 향리인 구마모토에서도 수재인 선각자가 고향에서 받는 대접만큼 쓸쓸했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일본의 마키아벨리, 오규 소라이(荻生徠)
       
      그리고 일본 학계에서는, 앞에서 본 마루야마 등이, 주자를 건너뛰어 공자로 바로 올라간 오규 소라이(荻生?徠·1666~1728년) 등이 주자학을 극복하고, 근대사상의 문을 열었다고 하고 있었다. 오규(荻生)를 동양의 마키아벨리라고까지 했다. 도덕에서 떨어져 나와 근대 정치학의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주자학자 요코이가 조명을 받을 겨를은 없었다.
     
      그런데 정작 페리 함대가 오자, 서양에 지적(知的) 개방성으로 임한 것은, 주자학을 넘어섰다고 오규의 이름을 따서 붙인 소라이(?徠)학 쪽이 아니라, 주자학자 요코이였던 것이다.
     
      이 거대한 사상사의 실착(失着)을 깨고 나온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마루야마(丸山)의 직제자로, 도오다이(東大) 분쟁의 투사이기도 했던 히라이시(平石直昭)였다.
     
      그 무렵이 바로, 일본이 메이지 개국 이래 꿈에서도 갈망했던 서양 따라잡기에 성공하여, 제2의 경제대국이 되는 1970년 전후였다.
     
      히라이시의 요코이 연구는 스스로의 전향과정이기도 했던 것 같다. 한 잡지의 좌담에서 “진리라는 것은 자기를 끊임없이 상대화하여, 타자와 함께 뛰면서 발견해 가는 것이다. 나는 이 같은 사상을 요코이 쇼난으로부터 배웠습니다”고 했다. 이 역시 그도 읽었을 퇴계의 <자성록>을 통해 감득했을 법한데, 그 얘기는 빠져 있다.
     
      아베 요시오(阿部吉雄)는 요코이가 스스로를 주자(朱子) 퇴계(退溪) 퇴야(大塚退野) - 요코이의 도통 위에 두고 있다고 했다. 히라이시 스스로도 요코이가 어떻게 퇴야학파의 학맥을 이어받는 방법론으로 주자학을 했던가를 강조하고 있다.
     
      히라이시가 요코이가 물려받은 방법론으로 특히 강조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위기(爲己)의 뜻’을 세우는 것으로서, 논어 헌문(憲問)편의 고지학자위기(古之學者爲己·옛날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닦기 위하고) … 의 ‘위기’인 것은 물론이다. 이 ‘위기’를 퇴야(退野)는 자기에 내재하는 가치를 탐구 지향하는 것이라 했다. 요코이는 입지를 본령(本領)을 써서 표현하고 있다. 공부에서 본령이다 싶은 것이 마음에 잡혔으면, 퇴계 <자성록>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와서는, 세상 일체의 궁통(窮通), 영욕(榮辱), 득실(得失)을 일체 도외시하는 마음으로 임할 것을 강조한다.
     
      또 하나 요코이가 물려받은 공부방식으로 중시한 것은 붕우 그룹핑을 통한 강학 토론이었다.
     
      요코이는 이 전통대로 나이 차이가 있는 제자들과 함께 다섯이서 실학당(實學黨)을 만들어 강학, 토론 모임을 장기간 지속했다.
     
      이와 관련하여 1970년대의 히라이시는 〈자성록〉의 두 번째 편지에 나오는 “이 학문은 전적으로 친구끼리 서로 절차(切磋)하는 힘에 의존하는 것인데”(此學全籍朋友切磋之學)를 인용해 놓았다.(源了圓 編, 別冊 環? ‘橫井小楠’)
     
      히라이시도 요코이가 퇴계학 한 것을 알고는 있던 것이다.  
      
      요코이의 성인관(聖人觀)
     
      요코이는 퇴계를 고금절무(絶無)의 진유(眞儒)라 했다. 퇴계의 〈독서록〉, <자성록> 등을 학자는 정주(程朱)의 서(書)와 같은 급에서 읽어야 한다고 했다.(山崎正董, <橫井小楠>, 遺稿篇)
     
      주자학에서는 공부를 하는 목적은 성인이 되기 위한 것이고, 성인은 도달 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다.
     
      <대학>(大學)의 3강령에 있는 지선(至善)의 경지 부근에 달해 있다 싶어야, ‘진유’다 ‘성인’이다 말을 붙여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반주자학에서 태극(太極)이라는 궁극의 실재와 합일(合一)되어 있는 정적(靜的) 상태에서 성인을 보고 있다면, 요코이는 좀 다르다고 히라이시는 지적한다.
     
      요코이는 ‘지선’을 동적으로 파악한다. 끝간 데 없이 추구해 들어가는 무극(無極) 무궁(無窮)의 ‘지선’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지선’이란 ‘무한의 시간’의 저쪽으로부터 부단히 자기초극을 요청하는 최고선인 것이다. 요코이가 강조하는 것은 ‘지선’의 경지 부근에 도달한 자가 ‘지선’에 달하지 않았다고 통절히 자각하여, 아직 모자란다고 더욱 노력을 계속하는 것이 성인(聖人)이라는 것이다. 제자의 질문에 답하는 글에서 요코이는 ‘무릇 학자들이 마음의 부족을 모르기에 진보도 없는 것’이라고도 했다.
     
      요코이의 성인은 지선을 끝간 데 없다 하고 그를 향해 영속적으로 자기초극을 시도하는 ‘다이내믹한 구도자’로서 있다. 요코이의 마음속에 어떤 모델이 있었을까.
     
      요코이는 <자성록>에서 자기를 되풀이해서 상대화할 수 있는 정신을 보았을 것이고, 제자에게 보낸 편지를 베껴놓고 돌이켜 보려는 데서 퇴계 속에 있는 ‘구도자의 끝없는 모자람 의식’을 보았을 것이다.
     
      퇴계의 고제(高弟) 월천(月川) 조목(趙穆)은 퇴계를 말해 ‘그 학문의 정대(正大)함과 의리의 정심(精深)함과 공부(功夫)의 지도(至到)함과 조수(操守·지조나 정조를 지킴)의 견확(堅確·견고하고 확실함)함과 잠심(潛心·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이 생각함) 분발하여 도를 체득하고 덕을 성취’했다 하였다.
     
      노년에 가서 ‘내 마음의 이(理)는 육합(六合·천지4방)에 걸쳐 통하지 않는 바가 없고’라고까지 했던 요코이에게 퇴계에 대한 월천의 느낌은 같았을 것이다.
     
      이 요코이가 퇴계를 고금절무의 진유(眞儒)라고 한 의미는 깊다 해야 할 것이다. 요코이가 ‘드디어 성인이 되고서도 변치않고 부족하다고 여기는’ 역사상의 인물로 마음속에 둔 것은 퇴계일 것만 같다. 요코이의 성인상은 퇴계가 아니었을까.
     
      조선시대에 우리 선조들의 절대다수가 한 공부가 유학이었다. 한말(韓末)에 서양문화를 만났을 때 우리민족이 보인 반응이나, IT시대를 사는 오늘 우리의 정신 속에도 500년의 유학 공부는 민족혼의 원형질에 뭔가를 남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의 세계관적 보편사상은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싫든 좋든 그것이 문화다.

      재일동포 출신 사학자 강재언(姜在彦)의 <조선유교의 2천년>은 이런 문제를 생각케 한다.
      우리 선조들이 역사와 함께해 온 공부가 우리민족의 삶에 어떻게 작용하고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요령 있게 밝혀놓았다. 오늘 한국에서 무슨 공부든 공부하는 모든 사람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의 후기에서 강재언(姜在彦)은 조선 유교연구의 주류가 주자학 그 중에서도 성리학(性理學)에 편중되어 있는 것에 비판적이다. 필자도 감을 같이 하고 싶다.  
      
      일본의 비극
     
      그리고 강재언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속유론>(俗儒論)에서 인용하여 진유라면 갖춰야 할 것을 일러주고 있다.
     
      “진유(眞儒)의 학문은 본래, 치국안민(治國安民)을 위해 이적(夷狄)을 쫓고, 재용(財用)을 유족게 하고, 문(文)을 능히 하고, 무(武)를 능히 하여, 그 어느 것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요코이 쇼난은 다산이 말하는 진유의 학이 주자학·퇴계학으로서도 가능한 것임을 보여준 데 큰 의미가 있다 하겠다.
     
      모계(母系)가 유대인이었던 독일 철학자 칼 뢰비트(1897~1973년)는 1930년대 후반 나치의 박해를 피해 일본 도호쿠(東北)제국대학에 한 5년 와 있었다. 칼 뢰비트는 한‧중‧일 세 나라 사람들 모두가 한 번 생각에 잠기게 하는 말을 남겼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난 역사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어 보인다.
     
      “일본의 비극은 서양사회가 삶의 방식에 반성을 시작했을 즈음에 그 서양모방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에 있다.”⊙

      [참고문헌]  
      松浦 玲, <橫井小楠> 增補版, 朝日選書.
      ______ 編, <佐久間象山·橫井小楠>日本の名著30, 中央公論社.
      ______ , <明治維新私論> - アジア型近代の摸索, 現代評論社.
      源了圓編, <橫井小楠>, 別冊 環?.
      平石直昭, ‘主體, 天理, 天帝 - 橫井小楠の政治思想’, <社會科學硏究>第25권 5號, 6號 1974
      _______, ‘橫井小楠 - その儒敎思想’, 相良亨, 松本三之介, 源了圓編 <江戶の思想家たち>下, 硏究社出版.
      阿部吉雄, <日本朱子學と朝鮮>, 東京大學出版會.
      高橋 進, <李退溪と敬の哲學>, 東洋書院.
      古川万太郞, <近代日本の大陸政策>, 東京書院.
      都光淳 역, <退溪先生 自省錄>, 三中堂, 서울.
      丸山眞男, <日本政治思想史硏究>, 東京大學出版會.
      姜在彦, <朝鮮儒敎の2千年>, 朝日選書.
      德永 洋, <橫井小楠>, 新潮新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