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인과 이념

    1983년, 맑스 사후 100주년을 맞아 폴란드 자유노조가 슬로건을 공모한 적이 있다.
    맑스가 살아있다면 노동자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 것 같은가. 당선작은 "전 세계 노동자들이여, 미안하다..."였다.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한 때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렸으며 가장 많은 인명을 살상한 공산주의는 사실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혹자는 그래서 '공산주의'를 역대 최악의 사이비종교로 부르기도 한다.
    공산주의는 처절하게 몰락했지만, 한 때 수많은 지식인들을 끌어당긴 '매혹의 이념'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것이 공산주의가 번성했던 이유다.


    공산주의가 ‘매혹의 이념’이었던 이유


       그렇다면, 다른 유사종교와는 달리 공산주의가 지식인들을 끌어당긴 까닭은 무엇인가.

       첫째, 공산주의는 다른 이상론(理想論)과는 달리 단계별 로드 맵을 제시하여 학습에 대한 동기유발을 계속한다. 단방에 유토피아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발전 단계에 따라 점진적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 단계에 따라 지식인들의 책무와 역할이 있다고 강조한다. 모든 체제가 자체모순이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왜 그런 체제들이 스스로 붕괴하지 않는지, 하필이면 왜 공산주의 이후로 역사발전이 딱 멈춰버리는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지만, 아무튼 공산주의는 '구름잡는'듯 보이는 다른 종교들의 구원론에 비해 그래도 뭔가 '구체적'인 무언가가 있는 듯이 보인다. 구원이나 해탈을 기대하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공산주의는 차별화된 상품 하나를 개발한 것이다.

       둘째, 공산주의는 경전에 대한 해석권을 지식인에게 위임했다. '학습'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다. '학습'은 체험이 중심이 된 활동이 아니라 문자 습득에 기반한 행위여야 한다. 그렇다. 공산주의는 이런 과정을 상정하여 지식인을 혁명의 사제계급으로 활용한 것이다. 현실에 뿌리를 박고 노동자를 위해 고안되었다는 공산주의 이념은 이처럼 근본에서부터 노동자를 은연중에 폄하한다.

       근원을 따져 들어가면, 공산주의는 극단적 독재와 상통한다. 공산주의의 기본은 모든 판단을 나보다 나은 누군가에게 위임한다는 것이다. 개인보다는 집단이 우선하는데, 그 집단의 행위를 통제하는 것은 '당'이고 당을 통제하는 것은 당 중앙이며 당 중앙을 통제하는 것은 최고 권력자다.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내 마음에 끌리는 사람이 무엇인지,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이 무엇인지,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무엇인지를 내가 아닌 남이 지정하고 명령하는 사회가 공산주의다. 이렇듯 모든 이들의 행동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지도층을 지식인이 점유할 수 있다는 확신에 기초하여 지식인이 지도 지휘 감독하고, 노동자가 하부 대중조직을 메우는 것은 모든 공산주의 조직의 공통점이었다. 다가올 새로운 세상에서도 여전히 지도층이 될 수 있다는 점, 또한 공산주의 활동에 뛰어듦으로서 현실 세계에서 노동자들에게 느끼는 지식인의 '죄책감'으로부터도 도피가 가능하다는 점도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에 빠져든 이유다.

    일부 종교인들의 ‘비현실적인’ 이상주의


       종교인들은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지 않는다. 그래서 성직자들의 삶은 현실로부터 반걸음 비켜나 있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이상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종교인들의 속성임을 감안하면, 그들의 '현실참여 발언'이 왜 비현실적으로 들리는지를 이해하는 길이 열린다. 그들은 현실의 비루함과 난관을 돌파할 때 치러야하는 시간 및 비용을 계상하지 않는다. 타협하지 않으면 일을 실현할 가능성이 없을 때 사람들은 서로의 기득권을 양보하고 적정선에서 타협한다. 하지만 어떤 성직자들은 '타협'은 '악(惡)'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현실세계의 비루함에 발을 담그지 않아도 괜찮기에, 어쩔 수 없이 타협을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무시한다. 윈윈게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의 자세로 매사를 바라보는 것이다. 일이 틀어지면 피해를 보는 것은 그러나 종교인들이 아니라 일반 시민이다. 종교인들은 고고하게 살아남고 시민들이 이들이 저질러놓은 일을 뒷수습하는 것이다.

       더 안 좋은 경우도 있다. 일부 극소수 성직자들은 북한의 가장 좋은 점과 대한민국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골라 동일선상에 올려놓고 비교하는 놀라운 선별력을 자랑한다. 그들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실체를 부정하고, 반역에까지 이른 경우도 드물지 않다. 무엇보다도, 공산주의 사회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다. 어떤 종교를 믿느냐 하는 선택의 자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아예 공산주의 이외의 종교를 믿을 수 있는 권리 자체가 없다. 공산주의자들은 말한다, 종교는 아편이라고. 그런데도, 일부 종교인들은 여전히 공산주의 사회를 상찬한다. 물론 자기들이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 공산주의 사회로 이주하여 거기서 삶을 영위한 종교인은 없다.
    종교인을 가장한 정치꾼과 현실적 감각이 전무한 '유토피아 지상주의자'들은 이제 커밍아웃하기 바란다.
    3대 세습이라는 '세기의 쇼'를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올바른 종교인의 태도가 아니다.

  • <장원재 /경기도 영어마을 사무총장>
    한국선진화포럼 '선진화 포커스 제3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