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국립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경주 皇南大塚(황남대총) 유물전시회를 보는 분들에게 참고가 될 만한 글이 있어 소개한다. 2001년에 필자가 쓴 글이다.
     
      로마문화 왕국 신라
     
     요시미즈 츠네오(由水常雄·66)라는 일본 제1의 유리 공예가가 쓴 「로마 문화 왕국 - 新羅」(新潮社)란 책은 317쪽 분량의 원색 사진이 많은데 책띠에 써놓은 선전문이 이러하다.
     
     「古代史가 바뀐다! 東아시아에 누구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로마 문화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이 新羅다! 출토유물과 新발견의 고대 기록사료 등, 實在자료에 의하여 신라의 수수께끼를 해명한다」
     
     이 책에서 주로 인용하고 있는 자료는 1973년과 이듬해 경주에서 발굴한 天馬塚(천마총·발굴 당시는 155호 고분)과 皇南大塚(황남대총·발굴 당시는 98호 雙墳) 출토 유물이었다. 著者(저자) 요시미즈씨는, 신라가 중국으로부터 한자, 불교 등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6세기 전까지는 북방 草原의 길을 통하여 중앙아시아 및 중동, 그리고 흑해·지중해 연안의 로마 식민지와 물적·인적 교류가 왕성했고 이런 흐름을 타고 로마의 문화(유리 공예품, 황금칼, 장신구 등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들까지)가 신라에 들어왔다는 대담한 주장을 했다.
     
     고구려, 백제는 중국 문물을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유독 신라만은 6세기 중반까지 중국의 선진문물을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신라는 草原(초원)의 길을 통하여 서쪽 세계와 교류하고 있었고 이 길을 통하여 중국에 못지 않은 先進 문물을 수입하였으므로 굳이 중국에 기댈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로마 문화를 수입하고 있던 新羅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문물이 先進(선진)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신라는 6세기까지는 동양문명의 중심지인 중국과 거의 담을 쌓고 살았다. 백제, 고구려가 거의 매년 중국의 여러 나라와 사신을 보내어 교류한 것과는 선명한 대조이다. 「로마문화왕국 신라」의 저자 요시미즈씨는 이 점을 집중적으로 캐고 들어간다. 신라는 중국문화가 휩쓸고 있었던 고대 동양에서는 역사적 상식을 뒤엎은 독보적인 나라라는 것이다. 한반도의 구석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가 무슨 배짱으로써 아시아 문명의 거대한 光源(광원)인 중국을 무시하고 수백년을 버티었는가.
     
     요시미즈씨는 한국과 중국측의 史料를 검토하여 辰韓(신라의 모태. 지금의 경상도 지방 부족국가)시대에 중국의 西晉(서진)에 조공한 서기 286년 이후 91년간 공백, 신라가 前秦(전진)에 조공한 382년 후 126년간 공백, 北魏(북위)에 사신을 파견한 521년 이후 43년간 국교 공백의 상태였음을 적시하면서 이것은 미스터리라고 규정했다. 그 미스터리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신라가 북방 草原 루트를 통해서 로마세계와 교류하면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인 것을 확인했으며 신라 지배층의 행태에서 흉노적인 것, 유목기마민족적인 것을 많이 발견했다는 것이다.
     
     <신라는 이웃 백제, 고구려가 중국의 정치, 경제제도를 도입하고 중국문화를 전면적으로 수용하여도 이에 동조할 필요가 없었을 정도로, 자국의 정치제도나 경제시스템, 또는 문화 전반에 걸쳐서 자신을 갖고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의 내용을 갖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고분의 출토유물을 분석하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우리 고고학자들이 스키타이-흉노 草原 문화의 결정체라고 보는 신라금관이 기본적으로는 그리스-로마계통의 왕관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신라 적석목곽분에서 나오는 수많은 금팔찌, 금귀걸이, 寶劍(보검), 유리공예품 등을 분석하여 로마에서 온 것이든지, 로마적인 것이 중앙아시아-초원 루트를 통해서 신라에 들어온 로마문화 원류의 유물이란 의견을 내어놓았다. 그는 황남대총에서 나온 유리 그릇 가운데는 로마에서 수입한 것도 있지만 로마의 유리 기술자가 신라에 들어와서 신라의 시설을 가지고 만든 것도 있다고 썼다.
     
     그는 4-6세기 신라는 북방 초원루트를 통해서 서방 로마세계와 교류했고 이는 신라 지도부가 이 문화 루트를 잘 아는 흉노족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고 있다. 서방으로 통하는 창을 열어놓고 있었던 신라는 6세기 중반부터 중국으로 방향을 튼다.
     
     신라의 이런 입장변화는, 5세기에 게르만족이 이탈리아를 침입하여 西로마 제국이 멸망하고(476년), 유럽·아시아에 걸쳐 있었던 로마 식민지가 황폐됨으로써 문화 교류의 상대방이 사라진 때라고 이 책은 주장했다. 북중국을 통일했던 鮮卑族(선비족·유목기마민족)의 나라 北魏도 신라처럼 로마와 교류했으나 서로마가 망한 18년 뒤 수도를 화북의 大同(대동)에서 낙양으로 옮김으로써 로마와 단절한다.
      신라는 법흥왕의 개혁 이후 중국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불교, 한자, 제도를 정력적으로 수입한다. 著者는 이 책의 끝을 이렇게 마무리짓고 있다.
     
     <그 후 신라는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唐(당)과의 교류를 밀접히 함으로써 약소국이면서도 곧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도 멸망시킨 뒤 한반도를 통일하였다. 소국 신라가 지녔던 이러한 반도통일의 에너지는 과거 로마 문화의 수용 시대에 쌓아 올렸던, 중국 문화와는 다른 에너지의 잠재적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반도 통일의 큰 원동력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著者가 신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4년 미추왕릉 지구 발굴 때 출토된 코발트 블루의 작은 玉구슬 속에 남녀의 얼굴이 상감되어 있고, 그 주변을 새들이 날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는 이야기를 영남대학교 李殷昌(이은창)씨로부터 전해 들은 이후였다고 한다.
     
     흥분한 요시미즈씨는 경주박물관으로 달려가 그 玉구슬과 對面(대면)했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 하나밖에 없는 肖像玉(초상옥)이다』고 단정했다고 한다. 네 인물이 새겨져 있었는데 두 사람은 寶冠(보관)을 쓴 왕과 왕비. 눈썹이 옆으로 붙어 있고(連眉) 콧날이 날카롭고 오뚝했으며 피부는 흰 서양 사람이었다. 요시미즈씨는 『옥구슬의 디자인, 제작방법, 상감된 인물 등으로 추정할 때 틀림없이 로마 세계에서 만들어진 구슬이다』고 단정했다. 그렇다면 왜 이 구슬이 아시아 대륙의 끝머리에 붙은 신라에 와 있단 말인가.
     
     <신라 왕과 異國의 왕·왕비 사이엔 어떤 관계가 숨어 있는 것일까. 이 玉구슬 속에는 뭔가 측량할 수 없는 거대한 국제적 전개와 고대 신라 사회가 지니고 있었던 특수한 문화 상황이 넘쳐날 정도로 들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발굴된 수많은 신라의 王墓(왕묘)에서는 로만 글라스(로마 유리제품)를 비롯, 황금의 칼, 금가락지, 목걸이, 귀고리, 팔찌 등 裝身具(장신구)나, 황금으로 만든 나뭇가지형 왕관, 자작나무로 만든 冠帽(관모) 및 말 배가리개(障泥·장니)가 나왔고, 무엇보다도 동양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이 확인되는 등 중국 문화권에는 없었던 것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왜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들은 의문을 가지지 않았을까>
     
     이렇게 되어 著者 요시미즈씨는 『과거 내가 품고 있었던, 삼국시대의 신라 문화가 종래의 통설과는 달리 백제나 고구려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는 인식을 확인함과 동시에 이 사실을 확실히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요시미즈씨는 신라의 독특한 문화 수용 실상을 밝혀내면 동양사, 고대 한국사, 고대 일본사, 고대 유라시아史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꿀 수 있을 것이란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고대 신라로 안내한 문제의 玉구슬이 만들어진 곳을 세 군데로 좁혔다. 지금 루마니아인 다키아, 지금 불가리아인 트라키아 및 모헤시아國 . 이곳은 당시(서기 4~5세기)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다. 이 3國 중 어느 나라에서 보낸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 玉구슬은 무역품이 아니라 그곳의 王家에서 신라 王家로 선물한 것임은 분명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신라와 로마 세계는 일종의 國交(국교)까지 맺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요시미즈씨는 신라 고분에서 로마 문화 계통의 유물이 발견된다는 것은 물건만 교류한 것이 아니라 물건을 따라서 사람이 오고갔으며 로마의 정신문화도 묻어왔을 것이라는 점을 유독 강조하고 있다. 그 예로 든 것이 1973년에 경주 鷄林路(계림로) 공사장에서 발굴된 황금 寶劍이다. 길이 약 30㎝ 되는 이 보검은 황금판에다가 여러 개의 보석을 박은 호화찬란한 것이었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名品이다. 요시미즈씨는 이 보검의 계보를 추적하여 지금의 불가리아에 있었던 트라키아의 켈트族 왕이 주문 생산하여 신라 王家에 선물한 칼이라고 단정했다.
     
     트라키아 왕이 이런 귀중품을 무역상에 맡겨 북방 초원을 통과시켜 신라에 전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트라키아 왕의 사절이 직접 신라에 왔든지 신라 사신이 트라키아까지 가서 下賜(하사)받았든지 둘 중 하나란 것이다. 요시미즈씨는 트라키아 왕이 금세공 기술자를 신라로 보내면서 호위병으로서 흉노족을 썼을지도 모른다고 추리했다.
     
     「로마 문화 왕국-신라」의 著者 요시미즈씨는 신라 통일의 원동력이 로마 문화를 받아들인 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던졌다. 로마 문화를 수입하여 본 경험 때문에 중국문화를 받아들일 때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지 않았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였으며 여기서 나온 정신적 에너지가 對唐(대당) 결전을 통한 삼국통일로 이어졌다는 해석이다.
     
     한 일본인을 흥분하게 만든 4-6세기 신라문화의 서방적 요소, 여기에 한민족의 源流(원류)가 갖는 국제성과 주체성의 뿌리가 있을지 모른다. 요시미즈씨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라의 부족합의제 통치행태는 흉노의 전통과 같다고 썼다. 朴赫居世(박격거세) 등 왕들을 群臣들이 추대하는 방식도 흉노의 君主추대승인제도를 계승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신라騎兵(기병)이 칼, 창뿐 아니라 도끼와 곤봉 등 다양한 무기를 가졌던 것도 로마의 기병으로부터 북방기마민족이 채용한 무기 시스템을 신라가 수용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요시미즈씨는 또 삼국사기를 분석하여,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가 중국曆(력)을 사용한 것과는 달리 신라는 로마曆을 사용한 것 같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또 皇南大塚 北墳에서 나온 銀製龜甲東物文盃(은제구갑동물문배)에 새겨진 바지를 입은 노예를 추적하여 이는 남러시아에 있던 흉노인이 만든 것이라고 추정했다. 요시미즈씨의 관점이 흥미로운 것은, 지금까지 한국 학계의 정설이 된, 古신라 문화에 스키타이-흉노 문화의 영향이 크다는 주장을 서쪽으로 더욱 연장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스키타이-흉노계통의 북방기마민족 문화에 영향을 준 것은 로마문화이며 흉노 등을 매개로 하여 신라에 들어온 문화의 원류는 로마라고 보았다. 이 로마 문화의 전달자라고 그가 지목한 것은 북방초원에 있을 때 이미 로마문화를 수용했던 흉노족이다. 요시미즈씨의 이런 주장은 결국 흉노족의 일파가 신라로 들어와 김씨왕조를 건설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흉노족은 3세기에 중국에 조공한 辰韓(진한) 지역으로 들어와서 권력을 잡고 신라를 건국해가면서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6세기 중엽까지 북방초원루트를 통해서 로마와 교류했다는 주장인 것이다. 흉노는 원래 놀던 무대가 북방초원 지역이기 때문에 그들이 신라에 들어와 있어도 이 지역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 중앙아시아를 거쳐 로마에 이르는 방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요시미즈씨는 신라통일의 잠재력은, 당시 세계의 2대 문명인 로마와 중국의 문화를 다 같이 받아들여 종합함으로써 생겼을 것이라고 했다. 만약 문무왕 비문 대로 신라김씨가 흉노족이라면, 또 신라김씨의 선조 김알지가 후한에서 쫓겨난 흉노인 김일제의 후손이라면, 그들은 신라지역에 들어오자마자 反중국, 親서방(로마) 정책을 펴 한 300년간 로마문화를 중점적으로 수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