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장과 간호원 : 이별 그리고 재회
  • 제6사단 사령부에서 특별 신고식이 있은 날 저녁 식사 후, 나는 박태숙과 정정훈을 불러 다음과 같이 조용히 이야기 했다. “태숙아, 정훈아. 너희들은 서울로 빨리 가야겠다. 부모님이 오죽 기다리시겠니. 내일 아침밥을 먹고 즉시 떠나도록 하라. 도중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하사관 한명을 딸려 보내겠다. 후방에 가거든 일선의 군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여러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국민들이 모두 합심해서 나라가 잘되고 모두 잘 살수 있게 되었으면 한다.” 박태숙과 정정훈은 나의 아픈 발을 치료하며 조용히 듣고있었다.

     

  • ▲ 이대용 전 주월공사 ⓒ 뉴데일리
    ▲ 이대용 전 주월공사 ⓒ 뉴데일리

    나는 공산주의에 대하여 그 전에 하던 이야기를 다시 강조한 후 “그리고 이와 반대로 우리나라 후방에 있는 돈 많은 사람들도 오만하고 비정해서는 못 쓰는 법이니, 기회 있는대로 이야기하라. 지금 나는 돈과 명예 같은 것은 쓰레기통의 구더기 만큼도 여기지 않는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에겐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다. 나는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어떻게 하면 내 의무를 효과적으로 완수하고 불우한 이 약소민족의 번영을 영원히 누리게 할 수 있을것인가의 일념 뿐이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또 입을 열었다.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므로 아마 이것이 우리 국민에 대하여 허심탄회하게 실토하는 유언일지도 모른다. 내가 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프랑스 육군대위 앙드레 모로아가 쓴 <프랑스는 패했다>와 <프랑스 전선>이라는 두권의 책을 읽었다. 나는 앙드레 모로와 대위의 조국애의 정열에 깊이 감동되고, 또 창작 소설보다도 전투 실기(實記)가 얼마나 그 국가 이익에 공헌하는가를 알았다. 그러나 보다시피 이렇게 바쁘니, 전선에서 글을 쓸 수가 있어야지. 단지 이 조그마한 수첩에 그날그날의 전투 개황을 적어 넣을 뿐이다. 내가 죽은 다음 이 수첩을 국방부에 보내라고 중대 선임장교에게 늘 이야기 해왔다.”

    그리고 또 딱딱한 정치 이야기를 조금 한 후 “유언이니까 할 말은 다 해야지”하고 쓴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끝냈다. 내 발의 치료는 그때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케이크 상자와 편지 한장

    이튿 날, 김지용 상사가 간호학생 두명을 데리고 서울로 떠났다. 두 간호학생은 자꾸 뒤를 돌아보며 눈물을 닦았다. 이것이 저들과 이세상에서의 마지막 이별인가 싶어서 내 마음도 울적했다. 그 학생들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나는 한동안 우두커니 그쪽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겨울의 날이 새고 저무는 가운데 전선은 남으로, 남으로 이동하여 북위 38도선까지 내려왔다. 나는 전곡(全谷) 남쪽 한탄강 유역의 산꼭대기에 호를 파고 엄개(掩蓋)를 씌운 후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함박눈이 내리는 어느 날, 제1대대 부식 구매차를 타고 서울에 갔다온 우리 중대 보급계 박래영 중사가, 케이크 상자와 편지 한장을 들고 산 위에 있는 중대장 호속을 찾아왔다. 편지는 서울적십자병원 박태숙이 보낸 것이다.

     

    중대장님께
    그동안 전투하시기에 얼마나 고생이 되십니까?
    저는 적십자병원에 돌아와 친구강아지(강애자의 별명)와 거북이(한윤복의 별명)들과 잘 지내고 있으며, 압록강에서 포위당한 이야기를 며칠을 두고 밤을 새워가며 들려 주었더니, 간호부장인 미스 홍도 재미있어하고 소아과 과장 이신장 박사님도, 또 김태웅 선생님도 모두 흥미있게 들으셨습니다. 중대장님 이야기를 했더니 여기 여러 의사선생님이나 간호원들이 꼭 한번 보고싶다고 합니다. 우리 병원은 곧 제주도 서귀포로 피난 갑니다. 피난 떠나는 날이 바로 내일입니다. 오늘 요행히도 제 1대대 부식 구매차와 박 중사님을 만났습니다. 중대장님 소식을 물었더니 동두천에서 20리 북방에 있는 한탄강 바로 남쪽 산 위에 계신다기에 이 편지를 올립니다.
    정정훈이는 자기 고향인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으로 갔는데 오늘까지 무소식 입니다. 보내는 케이크는 약속합니다마는 태숙이가 성의껏 보내올리니 맛있게 잡수세요. 홍 하사님이나 그외 여러 중대원님들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대대작전관 김윤환 대위님도 그대로 대대에 계시겠지요. 김 대위님에게도 안부 전해주세요. 그럼 몸조심 하시며 적을 몰아내주세요. 오늘은 이만합니다. 안녕!
    12월 23일 태숙 올림

     

    제주도 서귀포로 피난 떠나는 짐을 챙기느라 정신없이 바쁠 텐데, 나에게 케이크와 편지를 보내기 위해 일선 부대의 부식구매 군용 트럭들이 잘 가는 시장을 수소문하여 찾아 헤매다가 제7연대 제1대대 부식구매 트럭을 만나서 케이크를 전하고, 현장에서 편지를 써서 나에게 보낸 그 정성. 태숙이의 고운 마음씨에 고마움을 느꼈다. 편지에 의하면, 서울적십자병원 의사선생님들과 간호원들이 나를 꼭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한다니 그런 날이 올 수 있을 것인가. 간호부장 미스 홍은 몇 살인데 아직도 미혼일까? 얼마나 예쁘게 생겼을까? 거북이는 순천에서 보았으나 강아지는 본 일이 없다. 어떻게 생긴 강애자일까? 강력한 중공군과의 대결, 목숨을 기약할 수 없는 최전방이라는 것도 잊은 채, 내 상상은 도원경 세상을 헤매고 있는데 전방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헛 꿈에서 깨어나 중대장 호속에서 앞을 내다보니 눈은 멎어 있었다.

     

    보이는 곳 끝까지 흰눈으로 덮인 은세계, 두꺼운 한탄강의 얼음 위에도 오막살이 초가집 지붕위에도 호화로운 기와집 지붕 위에도 한뼘이 되는 두터운 흰눈이 고루고루 소복이 쌓여있다. 공중높이 한쌍의 비둘기가 남쪽을 향하여 날아가고 있었다. 그 후 나는 이곳저곳 쉴새없이 중공군과 전투하느라고 서울적십자병원 간호원 및 간호학생들과의 연락이 단절된 채 1년 반을 지냈다. 그리고 제2사단 제32연대 제3대대장으로 전속 되었다.

     

    3박 4일의 특별휴가

    1952년 초여름 어느 날, 뜻밖에도 사단 사령부로부터 나에게 3박 4일의 특별휴가 명령이 내려왔다. 내가 군용 지프를 타고 서울적십자병원에 도착한 것은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신분을 밝혔더니 수위가 깜짝 놀랐다. 수위마저도 나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화제의 인물이 홀연히 밤중에 나타났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나를 숙직 의사에게로 안내했다. 마침 숙직의사도 박태숙의 편지에 적혀있던 김태웅 의사였다. 그는 나를 데리고 수위와 함께 간호원 숙소를 갔다. 그곳은 금남(禁男)의 집이며, 밤에는 남자가 얼씬도 해서는 안되는 특별관리 구역이었다.

     

    숙소 문 입구에서 수위가 큰소리로 일선에서 내가 왔다고 소리쳤다. 잠자리에 들어있던 간호원들과 간호학생들은“네? 이대용 중대장님이 오셨다구요?”하고 외쳤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잠옷 바람에 위에다 아무것이나 하나씩 걸치고 와르르 뛰어나와서 발을 동동 구르며 나를 끌고 숙소로 들어갔다. 금남의 집에서 이래도 되느냐고 했더니, 들은체도 않고 나를 친아버지 대하듯 기뻐하였다.

     

    자정이 가까워와 시내에 나가서 자고오겠다고 했더니 그녀들은 안된다면서 병원 안에 잠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의사선생님들도 간호원 못지않게 친절히 대해주었다. 이야기 꽃을 피우며 병원에서 지낸 3일간은 즐거웠다. 그러나 평안남도 순천에서 서울적십자병원 간호원과 간호학생 열두 명을 인도적 대우를 해주려고 애쓰신 당시의 제1대 대장 김용배 중령이 대령으로 승진한 후, 양구 군량리전투에서 전사했으며, 그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읽던 내가 목이메어 한동안 조사를 못읽었다고 했더니 모두들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짧은 휴가를 병원에서 마치고 나는 다시 일선으로 돌아갔다.

     

    친형제 이상의 정을 나눈 '원앙새 부부'

    그로부터 약 1년 후, 3년 1개월간 끌던 한국전쟁은 끝났다. 다음해 나는 결혼을 하여 가정을 갖게되었다. 서울적십자병원 측은 나를 가족의 일원으로 정답게 대해 주었다. 우리 식구가 병원에 입원하면 적십자병원 의사나 간호원의 직계 가족으로 취급하여 병원비를 크게 할인해 주었다. 그럴때마다 박태숙이 보호자란에 서명하도록 돼있었다. 그래서 아이가 아플 때는 서울적십자병원에 입원시키고, 아내는 이 병원에서 아들을 출산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해외 대사관의 무관으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14년 6개월의 해외외교관 생활을 함으로써 왕래가 끊어지고, 그 긴 세월 탓에 그때 그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모두 서울적십자병원을 떠나버렸다.

     

  • ▲ 결혼 직후인 12사단 정보참모시절 이대용 전 주월공사
    ▲ 결혼 직후인 12사단 정보참모시절 이대용 전 주월공사

    박태숙은 사업하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다. 그러나 박태숙 부부는 서울에 올때마다 우리 부부와 만나고, 또 우리 부부가 미국에 가면 서로 만나 친형제 같이 지냈다. 1989년, 모든 공직에서 퇴임한 나는 인생황혼기임에도 깊은 뜻이 있어 제조업에 손을 대고 중소기업을 운영했다. 처음에는 그런 대로 잘돼 나가는 듯했으나, 한국의 중소기업 풍토는 예기치 못했던 역리(逆理)의 장애물이 의외로 많아 나를 몹시 괴롭혔다. 1994년 말, 피나는 노력 끝에 해외로 연간 수출 600만 달러의 시장이 개척되었으나, 운영자금은 바닥이 나고 이미 사채도 꽤 많아 회사운영은 진퇴유곡에 빠졌다.

     

    때마침 D.W. 산업이 우리 공장의 대지와 건물 전부와, 기계의 70퍼센트를 매입하겠다고 해서 1995년 2월 21일 구두합의를 봤다. 이것이 실현되면 은행 빚은 갚게되고 사채는 남는다. 나는 사채를 전액 깨끗이 갚아주기 위해서, 사는 집과 자동차를 팔고 조그마한 전세를 얻어 나가기로 결정을 했다. 대흉(大凶)은 때때로 겹치는 법, 과거 공산형무소에서 앓던 머리 쑤시는 병이 재발했다. 모든 걱정거리를 훌훌 털어버리고 조용한 곳에 가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야 했다. 아내가 미국에 가서 쉬며 병을 고쳐오라고 미국행 항공표를 사서 주었다. 자기는 살고있는 집을 팔고 자가용 승용차를 팔아서 사채 3억 7천 500만원을 깨끗이 갚아주고 자그마한 전셋집을 얻겠다고 했다. 재(財)의 손실은 위의 사채 외에, 투자한 자본금도 전액 잃게된다.

     

    1995년 2월 26일은 일요일, 나는 표박(漂泊)의 여정에 오르게 되었다. 첫 방문지는 로스앤젤레스 교외에 있는 박태숙의 집이다. 아침 6시가 좀 지나서 아내는 참담한 앞날을 한탄하면서 흐느껴 울었다. 6년 전, 나는 아내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몇 명이 합자해서 살고 있는 집 등을 담보로 하여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렸다. 나라 위해, 사회 위해, 남을 위해, 나를 위해 좋은 자그마한 제조업을 시작하려는데, 왜 그리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냐며 오히려 아내를 나무랐다. 그렇게 내 주장을 우겨서 중소기업에 손을 댔다가 아내의 예측대로 이제와서는 재(財)를 잃고, 사람을 잃고, 건강마저 잃었으니, 순진했던 나의 큰 실수를 통탄하면서 아내에게 잘못을 사과하고 위로하였다.

     

    비록 사는집까지 날리고 떠돌이 신세가 되기는 했지만, 금년에 셋째아이와 넷째아이가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게 되니, 그들이 정신차려 험악한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데 내 실패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했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인데, 너무 슬퍼하지 말고 눈물을 거두라고 했다. 오후 2시 5분경, 둘째 아들이 부른 택시가 왔다. 아내는 남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승강기 타는 곳에서 배웅을 하고, 승강기 문이 닫힐 때 다시 한번 눈물을 떨구었다. 둘째 아들이 나를 따라 택시에 타고 삼성동에 있는 시내 공항터 미널에 함께 가서 출국수속을 도와주고, 셔틀버스를 타고 김포공항에 나와 배웅해 주었다. 나 홀로 구름처럼 떠나는 것이 슬펐다.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에도 착하니 박태숙이 남편 이봉덕 회장과 함께 마중나와 있었다.


    “오래간만이에요. 참 반갑습니다.”
    박태숙은 생글생글 웃으며 인사했다.
    “태숙아, 오래간만이다. 넌 늙지도 않고 그대로구나.”
    나는 그렇게 인사했다.
    “하하, 많이 늙었는데.”
    박태숙이 또 웃었다. 그녀의 흰 이가 드러났다.
    “형님, 아주 잘 오셨어요. 우리 집에서 푹 쉬시면서 골치 아픈 일 잊으세요.”
    이봉덕 회장의 말이었다. 사실 이들 부부는 내가 원한다면, 자기들 집에서 1년이고 2년있어도 마다하지 않을 고운 마음씨를 가지고 나에게 친형제 이상으로 정을 주는 원앙새 부부였다. 박태숙이 운전하는 메르세데스 벤츠를 타고 로스앤젤레스 교외 고급 주택가에 자리 잡은 그들의 집으로 갔다. 이 날 저녁 7시 30분에는 천주교 성당에가서, 미사에 참석하여 기도를 올리고 명상에 잠겼다.

     

    저녁식사 후 “형님, 너무 상심마세요. 살다보면 별의 별 일이 다 일어나는 법 아닙니까. 모든 것이 세월이 흐르고 보면, 훗날에 그때 왜 내가 그렇게 절망하여 걱정했는가 하는 회고를 하며 웃게 됩니다. 실망하지 마세요. 형님같이 정의감 강하시고, 대한민국에서 제일 청렴결백하시고, 불우한 사람들을 잘 돌봐주시는 분을 왜 주님이 버리시겠습니까. 마음 편안히 가지세요.”하고 이봉덕 회장이 위로하였다.

     

    “그래, 자네 말이 옳아. 나도 인생을 도전의 과정이라고 믿고, 실패없이 탄탄대로를 걸어 성공을 거듭하는 것보다는 실패에서 굴하지 않고 칠전팔기로 재기하는 것을 더 귀중하고 영광된 일이라고 생각하네. 헌데, 도전은 젊음이 있어야 하는 것을 알게됐네. 강철같은 불굴의 의지가 있어도 고희를 넘으면, 신체의 건강이 정신력을 따라가 주지를 않네. 그것이 문제야. 앞으로 몇 년을 더 살려는지 모르지만, 담담한 마음으로 사업에서는 손을 씻고 욕심없는 길을 걸으며 천수를 누리다가 초개같은 삶을 마감할 결심일세.”

     

    박태숙·이봉덕 부부 집에서 나는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이들 부부는 내가 좋아하는 동남아산 과일인 도리언을 사다가 실컷 먹게 해주고, 거의 매일 같이 로스앤젤레스 시내에 있는 리틀사이공 식당에 가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베트남 국수 ‘훠’를 함께 먹게 해주었다. 또 골프도 치고 산책도 하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시류(時流) 반세기, 농사꾼들은 장사꾼으로 변하고, 사람들의 가치관은 많이 변했다. 정의(情誼)도 은원도 말라빠진 화폐의 통계숫자 앞에서는 쓸모없는 공허한 단어로 변해버리는 세상으로 시류는 바뀌었다.

     

    호화스러운 큰집도 쓰러질 때는 총신(寵臣)들이 달아나 이를 피하고, 피 묻은 원수도 돈 많이 모아 부자가 되던가. 이 부자들로부터 돈을 갈취하는 권력자가 되면 모두들 머리 숙여 그 밑으로 기어들어 온다. 사리(私利)가 먼저고 사랑은 뒤라는 햄릿의 독백이 그대로 먹혀드는 세상으로 변해버렸는데, 유독 박태숙·이봉덕 부부는 보은의 정신으로 일편단심 변함없는 외길을 걷고 있다. 어느 날 내가 “태숙아, 너는 달 없는 찬바람 부는 광야에 버려져 있는 외로운 사람을 구원해주는 천사 같구나.”하였다. “아이참, 별말씀 다 하시네!”하며 생긋 웃었다. 웃는 그 모습은 반세기 전 압록강변 초옥에서 저녁 설거지 후에, 이야기꽃을 피우며 백옥같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던 그 착한 모습과 변한 것이 없었다.

    <연재 끝>

     


  • ▲ 결혼 직후인 12사단 정보참모시절 이대용 전 주월공사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도서 출판 기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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