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장과 간호원
  • ◇ 압록강변 신도장 마을의 평화는 깨졌다

    신도장에서 두 밤을 자고 10월 28일 아침을 맞이했다. 이날도 날씨는 쾌청했다. 해 뜨기 전까지는 된서리가 내려 쌀쌀했지만, 해가 뜬 후에는 서리가 녹고 영상의 햇살이 마을과 산과 강물을 포근히 평화롭게 비쳐주었다. 그러나 신도장의 평화와는 달리 약 300리 남쪽에 있는 온정·북진에서는 예상을 뒤엎고 국군 제2연대가 중공군에게 대패하여 분산, 후퇴 중에 있었다. 이 소식이 신도장에 알려진 것은 10월 28일 오후 4시 30분, 신도장에 있는 제1중대에 “우리는 온정에서 후퇴중인 제2연대를 구원하기 위하여 온정으로 남하한다. 제1중대는 10월 28일 오후 7시 초산읍에 집결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압록강변 신도장 마을의 평화는 깨졌다.

  • ▲ 6.25 전쟁 ⓒ 연합뉴스
    ▲ 6.25 전쟁 ⓒ 연합뉴스

    10월 28일 밤, 제1중대는 압록강을 떠나 초산 읍내로 들어가서 하룻밤을 자고, 10월 29일 아침에 초산 읍을 떠나 고장으로 내려갔다. 거기에는 제7연대 본부가 있고, 제2 및 제3대대 전병력이 있었다. 고장에 도착한 후 급박한 상황을 알게 됐다. 온정·북진에서 국군 제2연대를 격파한 중공군은 그 일부가 온정에서 북상하여, 이미 코앞인 풍장에서 우리의 퇴로를 차단하고 제7연대와 교전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멀리 남쪽 태평(泰平)에 있는 국군 제6사단장은 무전으로 제7연대장에게, 제7연대가 중공군 중(重) 포위 속에 들어갔으니 게릴라전을 하면서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나오라는 작전명령을 보내왔다. 고장 남쪽 풍장에서의 전투는 10월 29일 낮에는 아군이 중공군을 돌파하며 약 12킬로미터 남진했으나, 야간전투에서는 전세가 역전되어 아군이 북쪽으로 밀리면서 분산됐다.

    어둠 속에서 너무도 효과적이고 맹렬하게 이어지는 중공군의 추격에 우리 연대는 전열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연대와 대대, 중대간의 지휘계통은 마비되고 뿔뿔이 흩어졌다. 중대장의 지휘하에 중대별로 게릴라전을 하면서 중공군의 두터운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길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게 되었다. 우리는 잘 모르고 있었으나, 이때 이미 중공군 제38군과 중공군 제40군이 우리 제7연대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제1중대를 이끌고 낭림산맥의 지맥인 적유령산맥의 승적산(해발 1994미터) 쪽으로 급히 이동한 다음,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 돌파작전에 들어갔다. 국군 제7연대는 이 중 포위망 속에서 엄청난 인원피해를 입었다. 연대장은 살아 나왔으나 부 연대장은 못 나왔다. 대대장 3명 중에 1명만 살아나왔다. 소총 중대장 9명, 중화기 중대장 3명, 연대대전포 중대장 1명, 연대수색 중대장 1명, 대대본부 중대장 3명, 연대근무 중대장 1명, 연대본부 중대장 1명 등 연대편제상의 중대장은 총 19명인데, 이 중 살아나온 중대장은 9명에 불과했다. 역전의 중대장들도 이렇게 살아나오기가 힘들었다.

    살아서 중공군 포위망을 뚫고 나온 9명의 중대장 중에 군복을 입고 총칼로 무장하고 나온 중대장은 4명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5명은 총칼을 버리고 민간인 복장을 하고 피난민 행세를 하고 나온 중대장들이었다. 군복을 입고 무장을 하고 나온 4명의 중대장 중에서 중대를 끝내 지휘하면서 생존자 21명을 인솔하고 나온 중대장은 오직 1명 뿐이고, 나머지 3명의 중대장은 연락병 1명 또는 2명만을 대동하고 나왔다. 중공군 포위망 뚫기가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말해주는 증거인 것이다. 이렇듯 힘든 사지(死地)에서 박태숙과 정정훈은 살아 나오는 기적을 이룩했다.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잘 훈련된 중공군은 포위망을 거미줄 같이 잘 쳐놓았다. 그래서 자주 그들과 만났다. 우리 제1중대가 포위망 속에서 중공군을 만난 것은 22회 였는데 이중 9회는 높은 산 또는 야음을 이용하여 이들을 피해서 우회하던가, 아니면 어둠을 이용하여 그들의 배치지역을 물고기가 그물을 빠져 나오듯 몰래 살그머니 빠져나오는 수법을 썼다.

     

    ◇ 곧 독안으로 고양이 떼가 달려들 판...돌파작전 개시

    중공군과 만난 22회 중 13회는 부득이 크고 작은 교전을 하여 피아간에 많은 인원손실이 있었다. 13회의 전투 중 가장 치열한 격전은 11월 3일 오후에 북신현서 북쪽 산에 서있었던 전투다. 이날 아침 일찍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 중공군 부대와 뒤를 추격하는 중공군 부대 틈바구니에서 격전을 벌이며 중공군의 배치가 엷은 왼쪽 산의 정상을 점령하는데 일단 성공했으나, 그 일대의 중공군 수천명이 우리가 점령한 산을 이중삼중으로 완전 포위했다. 시간이 갈수록 중공군 병력은 자꾸만 증원됐다.

    해발 약 500미터로 보이는 산의 5부 능선까지를 중공군이 차지하고 있었다. 포위망은 점점 죄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됐다. 독 주위에는 고양이 떼들이 진을 치고 있으며, 곧 독안으로 고양이 떼가 달려들 판이다. 어두운 밤이라면 어떤 묘수를 써보겠지만, 대낮이고 산도 낮아서 곤혹스러웠다. 동쪽을 굽어보니, 약 2주일 전에 상승(常勝)의 중대장으로서 북한 공산군을 격파하고 박태숙과 정정훈, 그리고 두 연락병과 함께 수숫대를 깔고 부엌에서 하룻밤을 잔 마을이 내려다 보였다.

    인간지사 모두가 새옹지마이며, 이 산이야말로 나의 무덤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젊음은 도전이다. 불덩어리 같은, 그리고 태산같은 투지로 전진하여야 한다. 부하들이 죽은 후에 적군이 우리 무전기와 박격포 등의 무기를 노획하여 자유 조국을 멸망시키는 용도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SCR 300 무전기와 이미 포탄은 다 쏴버리고 계속 보급을 못받아 빈 박격포만 짊어지고 다녔는데, 나는 그 60미리 박격포를 분해하여 땅에 파묻으라고 명령했다.

    중공군과의 최후 결전을 남겨놓고 적군의 포위망 중에서 제일 약한 곳을 찾아 보았다. 동쪽에는 산 밑에 평양-만포가도가 남북으로 가로놓여 있고, 그 다음은 넓은 밭들이 역시 남북으로 펼쳐져 있었다. 그 다음은 천연의 장애물인 청천강이 가로놓여 남으로 흐르고 있고, 강을 건너면 묘향산이 높이 솟아 있다. 특히 평양-만포가도는 중공군의 주(主) 보급로이고, 중공군 부대 행군의 중심을 이루는 도로이다. 우리가 설마 그쪽으로 빠져나가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한 듯, 중공군은 그쪽을 제일 약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죽을 각오는 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힘찬 도전이 적군을 뚫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돌파작전은 오후 0시 30분에 개시되었다. 우리는 청천강 반대 방향인 서쪽으로 뚫고 나가는 것 같이 총을 소면서 거짓행동을 했다. 적군을 속여 그쪽으로 중공군의 병력을 집중시켜 놓고 동쪽의 적군을 단숨에 뚫자는 작전이었다. 서쪽으로 내려가다가 슬그머니 솔밭 속으로 숨어서 동쪽으로 쑥 내려갔다. 중공군의 최전선은 무너졌으나 적군의 포위망 종심(縱深)은 깊었다. 우리의 전진속도가 느려졌다. 나는 오른쪽 무릎을 굽혀 땅에 대고 왼발은 앞에 내놓고 왼손으로 카빈소총을 쥔 채, 카빈소총의 개머리판은 왼쪽 끝 바로 앞에 대고 오른손으로 부하들에게 손짓하며 속히 적군을 뚫으라고 급하게 질타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내 오른뺨을 후려갈겼다. 이와 동시에 파르륵, 파르륵 하고 적의 기관단 총탄알 7, 8발이 왼쪽 발끝 바로 앞에 떨어지며 먼지가 확 내 얼굴을 덮었다. 나는 후다닥 번개같이 몸을 날려 왼쪽 구렁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느틈에 우측 능선에 중공군이 올라왔으며, 그 중 키가 크고 방한모를 쓴 기관단 총을 든 놈이 나를 쏜것이었다. 뒤에서 내 뺨을 갈긴 사람은 중대의 소대 연락병 이 하사였다. 그는 중공군의 기관단총 총구가 이쪽을 향한 것을 보고, 말로 하기에는 너무 긴급하여 자기도 피하면서 중대장의 뺨을 후려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병은 바로 뺨과 턱에 관통상을 입고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턱이 떨어져 나가 보기가 참혹했다. 피가 흘러 엉망이 되었다. 나는 중공군을 향하여 카빈 M2 자동 소총으로 응사하였다. 중공군도 몸을 피하여 저쪽 계곡으로 숨어버렸다. 나는 박태숙과 정정훈에게 쓰러져 신음하는 이 하사에게 붕대를 감아주라고 소리쳤다. 두 간호학생이 적십자 가방에서 약과 붕대를 꺼내 응급처치를 해주는 것을 보고, 나는 미친듯이 장병들을 질타하면서 적진에 돌입했다.

    중공군 진지 한곳이 완전히 뚫렸다. 나는 부하들과 함께 적진을 짓밟으며 질풍과 같이 달려서 평양-만포가도를 횡단하고, 들판의 넓은 밭을 지나 수심이 허리에까지 차는 청천강을 건너서 묘향산에 붙었다. 인원을 점검해보니 아침에 비해 반수 이하로 줄어있었다.

    중대 연락병 박재현 하사는 내 옆에 있었으나 또 다른 중대 연락병 홍인곤 하사는 보이지 않았다. 간호학생 두 명도 보이지 않았다. 포위망 속에서 간호학생인 박태숙과 정정훈은 중대장인 나를 병아리가 어미 닭을 따라다니듯 졸졸 따라다녔다. 적군과 만났을 때 내가 엎드리면 따라 엎드리고, 내가 뛰면 따라 뛰고, 내가 돌진하면 따라 돌진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를 놓쳐버린 것이다. 전투가 숨가쁘게 빨리 움직이고 사격전도 치열했지만, 내 지시를 받고 턱이 끔찍하게 으스러진 이 하사의 응급치료를 해주느라고 손을 쓰는 동안 내가 적군 진지로 돌격해 뛰어들어 갔으므로, 그만 그 순간을 놓치고 나와 갈라진 것이다. 그녀들 두명도 순천에서 연대본부로 보내줄 것을 공연히 압록강까지 데리고와서 희생시켰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나는 지도를 펴놓고 서근석(徐根錫) 소위와 상의한 후,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를 소민동으로 새로 결정했다. 그곳은 우리 국군이 확보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지도를 접어 야전점퍼 큰 호주머니에 넣고 산을 다시 올라가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은줄 알았던 박태숙과 정정훈이 중대 연락병 홍인곤 하사와 함께 생글생글 웃으며 따라오고 있었다.

    “용하구나, 죽지들 않고!”
    나는 반갑다는 말을 군대식으로 아무렇게나 했다. 묘향산 중턱에 올라갔을 때, 갑자기 내 코에서 피가 주르르 심하게 쏟아져 나왔다.

    “아이쿠.”
    쭈그려 앉아서 가랑 잎에 피를 흘리고 있는 나에게 박태숙과 정정훈이 달려와서 적십자 가방에서 솜을 꺼내 치료해 주었다.

     

    ◇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아군 점령지역에 도착하다

    묘향산 형제봉(兄弟峰)에 오른 우리 43명은 눈을 붙였다 가기로 하고 가랑잎 위에 모포를 덮고 누웠다. 높은 산이지만 바로 밑에는 중공군이 많다. 나무는 많았으나 중공군의 습격이나 포격을 염려해서 불을 피울 수가 없었다. 낮에 허리까지 젖은 옷은 아직도 마르지 않았다. 해발 1천 200미터 산봉우리에 휘몰아치는 영하의 바람은 매서웠다. 어제 낮 이후, 네끼를 굶으며 100여리를 걸어 중공군과 격전을 벌인 몸은 피곤했다. 치열한 전투를 할 때는 배고픔과 추위와 피로를 모르지만, 적군과 떨어져서 휴식을 취할 때는 추위와 기한(飢寒)을 느낀다.

    한밤이 가고 날이 새니 또 끼니를 굶고 떠나야 했다. 오후 늦게 소민동 북쪽산에 도착해보니, 소민동 일대도 적군 수중에 있었다. 실탄 부족 때문에 결정적 위기에서만 적군과 전투를 벌여야 한다. 적군을 피해서 산중 허리를 타고 동쪽으로 이동했다. 또 한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어 우리는 동창(東倉)에서 길을 건너려 했으나, 그곳도 적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하루 낮을 묘향산 줄기에서 숨어 보내고 어두운 밤을 이용해서 동창의 적군 배치 지역을 살그머니 어렵게 새어나와 산줄기를 타고서 걸어 나가다, 11월 5일 밤 도달한 곳이 두채의 화전민 집이었다. 이때 우리가 국군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목적지로 삼고있던 곳은 덕천(德川)이며, 덕천만은 꼭 아군이 확보하고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다. 화전민 초가집에 들어가서 30세쯤 돼보이는 젊은이를 만났다. 그 젊은이는 화전민 치고는 아주 똑똑했다. 이렇게 우수한 젊은이가 왜 깊은 산 속에서 썩고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지식인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틀전부터 희천 방면에서 쏟아져 내려온 중공군이 이틀 밤낮을 계속해서 수백필의 말과 야포를 끌고 덕천 방면으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중공군 1개사단 약 1만명의 병력이 우리 앞을 차단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며, 희천에서 영원(寧遠)을 지나 맹산(孟山) 쪽으로 전진하는 중공군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면 중공군 2개 사단 약 2만 명에 의해 앞길이 막혀 있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중공군의 남진은 가속화 되었으며, 우리의 위기는 절망적으로 증가되고 있다. 우리들은 지금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있을 뿐 아니라, 실탄도 앞으로 격전을 한 번 크게 할 정도로 바닥이 나있다. 덕천마저도 적군 수중에 들어갔으니 목적지를 또 바꿔야 했다. 지도를 펴놓고 오랫동안 궁리한 후 새로운 목적지를 맹산으로 잡았다. 몇번이나 목적지를 바꿔야 하는가? 처음 목적지는 회목동, 그 다음은 태평, 또 그 다음은 구장, 다시 또 그 다음은 소민동, 그리고 다시 또 그 다음은 덕천, 그러나 여기마저 갈 수 없게 되어 이번에는 맹산이다.

    하지만 맹산이라고 중공군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늘의 시련이 너무나도 가혹한 것 같았다. 나는 부하들에게 절박한 상황을 설명하고 다음 목적지는 맹산이라고 말한 후, 만일 적군에게 포로가 될 위기가 오면 끝까지 적군에게 사격을 가하고 최후의 한발로 심장을 쏴서 자결하겠다는 결의를 피력했다. 사병들도 나를 따르겠다고 했다. 숨을 죽이는 긴장감이 돌았다. 박태숙과 정정훈은 내가 자결할 때, 자기들을 먼저 쏴서 죽여 달라고 했다. 나는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경계병들을 밖에 세워놓고, 강냉이 밥을 짓는 동안 장병들은 잠을 잤다. 주인과 경비병이 깨워줘서 새벽 4시 반에 일어났다. 발을 움직이니 발뒤꿈치가 뜨끔뜨끔 했다.

    “아야, 야야아!”
    상을 찡그리며 나는 소리를 질렀다. 구두를 벗으려고 했더니 발 뒤꿈치가 구두에 닿아서 살이 뜯어져 흘러나오던 피가 잠자는 동안에 응결되어 구두에 딱 말라붙어 있었다. 나는 아픔을 참으며 구두를 벗고 박태숙과 정정훈으로부터 치료를 받았다. 단련에 단련을 거듭하여 어떠한 행군에도 끄떡없이 자신있게 굳어버린 발이었건만, 산을 오르고 내리고 또 오르고 내리고, 강을 건너고 시냇물을 지나며, 싸우고 쫓기고 돌진하는 동안에 이렇게 엉망이 되고 만것이다.

    새벽 5시 10분쯤 남쪽으로의 행군은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발 뒤꿈치가 아파서 걷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약 1킬로미터 쯤 걸어나갔더니 발에서 불이 화끈화끈 달아오르더니 그 다음부터는 조금도 아프지 않고 힘도 들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기면서 대동강에 이르러서 배를 타고 건너와, 맹산 남중리에서 적군을 뒤에서 기습하여 격파했다. 적군 포위망을 최종 적으로 뚫고 나와 아군 제8사단 제21연대 주력을 만난 것은 1950년 11월 7일 해가 질 무렵이었다. 그리고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안전지대인 맹산 북창리에 도착한 것은 11월 8일 0시 30분경이었다.

    풍장지구 야간전투에서 우리 제7연대가 중공군에게 패배하여 중대별로 적유령 산맥으로 뿔뿔이 들어간 날부터 계산하여 우리 중대는 9일간 중공군 포위망 속에 있었던 것이다. 이 9일동안 우리 중대는 여섯끼니의 식사를 했다. 10월 30일에는 세 끼를 모두 굶었다. 10월 31일에도 완전히 굶었다. 수통의 물만 마시면서 강행군을 했다. 11월 1일 새벽에 대암산 서남쪽 산골마을에서 조밥과 시래기 된장국을 얻어 먹었다. 포위망 속에서 식사를 민간인들로 부터 얻어먹을 때는, 그 분들이 사양을 해도 식사대는 넉넉히 건네주었다. 11월 2일 낮에는 정수동(淨水洞) 뒷 산에 숨어서 마을사람들에게 주먹밥을 지어 산으로 가져오게 하여 쌀 주먹밥과 된장, 고추장을 맛있게 실컷 먹었다. 11월 3일에는 꼬박 굶었다. 11월 4일에도 굶었다. 11월 5일 새벽에는 묘향산 화전민 집에서 강냉이 밥과 시래기 된장국을 먹었다. 11월 6일 초저녁에는 덕천 북쪽 산줄기 외딴집에서 강냉이밥과 시래기 된장국을 먹고, 11월 7일 새벽에는 맹산군 수하리(水下里) 외딴 집에서 강냉이 밥과 시래기 된장국과 고구마를 먹었다.

    제1중대는 이렇게 외진 곳에 있는 화전민 초옥에서 밥을 지어먹고 중공군에 관한 정보를 얻는 시간과, 중공군을 피해서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밤이 오기를 기다리는 시간, 그리고 중공군과 전투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저 걷고 또 걸었다. 하루 잠자는 시간은 네시간 정도였으며, 어떤 날은 한시간 걷고 10분씩 휴식하면서 24시간 내내 강행군 하기도 했다. 시시각각으로 두터워져 가는 중공군 포위망 속에서 시간을 지체한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빠른 속도로 남쪽으로 움직인 것이다. 이렇게 피나는 노력에다 천운까지 따라주어 제1중대는 완전무장을 하고 최후까지 적군을 무찌르면서 장병 21명, 간호학생 2명의 생존자가 제7연대 장병 중에서 가장 빨리 1950년 11월 7일,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아군 점령지역으로 나온 것이다.

    며칠전에 제6사단장으로 새로 부임한 장도영(張都映) 준장은 이러한 중대를 칭찬하고 격려해주겠다면서 특별 신고식을 받겠다고 했다. 11월 9일 오후 2시, 평안남도 순천 북방에 있는 제6사단 사령부 마당에 군악이 울려퍼졌다. 군인 20명을 3열 횡대로 세워놓고 마지막에 서울적십자병원 간호학생 2명을 세웠다. 중대장인 나는 3열 횡대의 6보 앞 중앙에 섰다.

    “차렷! 경롓. 바로. 제7연대 제1중대장 이대용 대위는 적 포위망을 돌파하고 사병 20명, 민간인 간호학생 2명을 지휘하여 1950년 11월 9일, 사단사령부에 도착했기에 이에 삼가 신고합니다. 경롓! 바로.”
    사단장의 위로와 칭찬과 격려사가 있었다. 군예대 여가수가 내 목에 하늘색 머플러를 걸어주었다. 이것으로 특별 신고식은 끝났다. 한국전쟁 초기 약 6개월간은, 한국전쟁 3년 1개월을 통하여 가장 치열한 격전 기간이었다. 이때 최전방 장병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었다. 많은 장병들은 자유 수호를 위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한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겠다는 일념으로 싸웠다. 그래서 일선 장병들은 훈장 따위는 꿈속에서 조차 생각하지 않았으며, 훈장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없어져 버린지 이미 오래되었다. 따라서 사단장이 챙겨주지 않으면, 그 예하 부대는 훈장의 불모지대가 되어 버렸다. 경험이 부족한 신임 20대 후반의 젊은 사단장들은 처음에 그런 것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여러 전투에서 용감히 싸워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일선 장병들 중에 훈장을 못 받은 장병이 부지기수이며, 그 중 상당수의 장병들이 훈장 없이 국립묘지에 묻혀있다. 압록강 진격 및 후퇴 시 용감히 싸운 제1중대 장병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 ▲ 6.25 전쟁 ⓒ 연합뉴스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도서 출판 기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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