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장과 간호원
  • 내가 서울적십자병원 간호원들과 간호학생들과의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50년 10월 21일의 일이었다. 그 전날, 미군 제187공수여단은 평안남도 순천북방에 낙하산으로 투하되고 한국군은 대동강을 건너 순천으로 진격했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북한 공산군은 순천읍내에서 혼란을 일으키며 저항하다가 이내 북으로 도주했다. 이때 북한 공산군은, 서울에서 납치해서 끌고 가던 서울적십자병원 간호원들과 간호학생들을 미처 챙기지 못하고 달아났다. 그날 밤, 우리 중대는 순천읍 북방에서 북한 공산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 포로가 된 열두 명의 처녀들

    10월 21일 아침 해가 뜰 무렵, 언덕 같은 나지막한 능선 끝에 10여 명의 여자들이 보였다. 나는 SCR 536 무전기로 그곳에 웬 여자들이 서있느냐고 제2소대장 김덕출 소위에게 물었다. 김 소위가 방금 포로로 잡은 서울적십자병원 간호원과 간호 학생들이라고 보고했다. 그 여자들은 내가 있는 중대지휘소로 곧 후송돼 왔다. 모두 감색 블라우스와 감색 스커트를 입고, 적십자 가방을 둘러메고 가죽구두를 신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녀들의 겉모양은 아주 비참했다. 속옷에는 얼마나 많은 이가 끓고 있는지 보리알 같이 큼직한 이 한마리가 한 간호학생의 블라우스 위를 벌벌 기어다니고 있었다. 블라우스와 스커트는 땀이 배고 흙먼지가 묻어 더러워지고, 오랫동안 감지 못한 머리카락은 부옇게 부스스 헝클어졌으며 구두는 색이 바랬다.

    안된 말이지만 몸에서는 동물적인 악취가 났다. 모두 우리 겨레의 귀한 집 딸들이며 막 피어나려는 꿈 많은 꽃봉오리들인데, 너무나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군사관학교에 다닐 때 적군포로 취급에 관한 규정은 배웠으나, 이 여자들의 신분이 적군인지 아닌지가 애매하게 여겨졌다. 나는 외국군 경력이 전혀 없는, 순수하게 국내에서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국내파 장교였다. 동료 장교 중에는 일본군 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꽤 있었다. 나는 그들로부터 과거 일본군 일부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적지에서 전투 중 여자를 포로로 잡으면 겁탈을 하고, 그 외에 말 못할 잔인한 행위를 했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분노를 느꼈다. 더구나 우리는 현재 국내 전을 치르고 있다. 그런 몹쓸 짓은 결코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부 몹쓸 일본군을 따라다닌 과거가 있는 장교에 대해서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 외에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6·25 초기 후퇴 당시, 국군장병 중에는 가족을 북한 공산군 점령 지대에 남겨놓은 채 부대를 따라 전투하면서 가족과 이별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 소대장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북진하면서 알고 보니 그 가족들은 북한공산군에 부역하는 동네 사람들의 밀고에 의하여 공산 측에 체포되어 변을 당했다. 북한 공산 측에 부역한 남한 사람들에 대한 원한이 하늘에 사무친 장병들은 눈이 뒤집혀서 공산 측에 부역한 사람들만 보면 총칼로 보복하려고 날뛰었다. 또 실제로 그런 보복도 있었다. 나는 그런 짓을 못하게 늘 제동을 걸어왔다.

    중대장인 나는 우선 서울적십자병원 간호원과 간호학생들의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3열 횡대로 정렬시켰다. 그녀들이 줄지어 서있는 6보 앞에 나는 오른손으로는 허리의 권총집을 내려 잡고 왼손으로는 왼쪽 허리에 매달려 있는 소련제 쌍안경을 내려 쥔 다음, 열중쉬어 자세로 다리를 어깨 폭으로 벌리고 섰다. 오른쪽 어깨에는 카빈총이 메어져 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의 최일선 지휘관들의 눈매는 매섭고 살벌하며, 제정신이 아닌 살인마 같이 보일 때가 있다. 사실 그렇다. 앞에 있는 적군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겨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적탄에 맞아 죽어야 하고, 달려드는 적군을 대검으로 찔러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찔려 죽어야하는 냉혹한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일선 소총 중대 장병들의 마음은 거칠 대로 거칠어져 살인마의 잔인성을 발휘하게 된다. 망나니가 되는 것이다.

    여기는 그런 일선이다. 적성 신분으로 포로가 된 그녀들의 표정에 불안감이 스쳤다. 최전방 일선에서는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다. 긴장된 마음으로 숨을 삼키면서, 그녀들은 중대장인 나의 일성을 기다렸다. 내가 입을 열었다. “여러분, 나는 제7연대 제1중대장 이대용 대위입니다. 나는 제네바 포로취급 규정에 따라 여러분들을 인도적으로 대우함과 아울러 여러분들을 동포의 한사람으로서 최대한 인정으로 대할 것을 약속합니다. 여러분들의 생명과 처녀의 순결성은 이 허리에 찬 권총에 맹세하여 보호해 주겠습니다. 만일 여러분들 중에 혹시 반국가적 행위를 적극적으로 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상급부대에서 정당한 재판으로 판가름 지어 법으로 다스릴 일이지 내가 할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지금부터 몇 마디 물어보겠는데 솔직하게 말해주기 바랍니다.”

    나는 그녀들을 3열 횡대에서 해산시켜 놓고 한 명씩 따로 불러 심문을 시작했다. 군인들은 낙엽과 썩은 나뭇가지를 주워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녀들에게 불 옆으로 와서 몸을 녹이라고 했다. 심문에서그녀들은 다음 내용의 진술을 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공산군의 기습 남침으로 38선이 돌파되면서 우리 국군장병들의 부상자는 육군병원뿐 아니라 서울적십자병원에도 후송되어 오고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원들은 이들을 열심히 치료해 주었다. 포성은 은은히 울려오지만, 서울시민들은 국군의 용전을 믿고 있었다. 전년에 북한공산군 수천 명이 강원도 신남·관대리 지역과 옹진반도에서 38선을 넘어와 꽤 오랫동안 우리 국군과 전투했으나, 그때마다 국군은 북한공산군을 38선 이북으로 격퇴시켰다. 이번에도 그렇게 격퇴시킬 것으로 믿고 있었다. 또한 대한민국의 유일한 라디오 국영방송도 국군이 곧 반격작전을 펴서 북한 공산군을 38선 이북으로 쫓아버릴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어, 국민들은 그 말을 하늘같이 믿고 있었다. 그리고 삼남지방에 있는 국군부대들이 38선으로 진격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와서 더욱 믿음직스러웠다.

    그래서 서울적십자병원 의사들과 간호원 및 간호학생들은 서울로 북한 공산군이 들어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국군을 든든히 믿으면서, 6월 28일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열심히 맡은 일에 열중했다. 그런데 갑자기 밖이 소란해지더니 총칼로 무장한 북한 공산군이 줄지어 병원 안으로 몰려들어왔다. 병원내의 의사들과 간호원, 간호학생들은 꼼짝없이 그들에게 납치되었다.


    ◆ 열아홉, 꿈 많던 한 망울의 꽃봉오리가 지다

    그로부터 약 3개월간, 의사들과 간호원들과 간호학생들은 북한 공산군의 무서운 감시 하에 말조심은 물론이고, 귀도 막고 눈도 가리고 조심조심 그들의 눈치를 살펴가며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속박에서 탈출하고 싶었으나 기회는 오지 않았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과 우리 국군이 서울을 탈환하기 5일 전쯤, 북한 공산군은 서울적십자병원 간호원과 간호학생들을 청량리역으로 인솔하고 갔다. 밤이 되면 기차에 태워 북으로 끌고 가려는 것을 알아차린 간호원들과 간호학생들은 이 죽음의 대열에서 탈출하려고 기회를 엿보았으나, 북한 공산군의 감시가 워낙 철저해서 좀처럼 틈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북한 공산군이 한 눈 팔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어둠이 깔리면 간호원들과 간호학생들은 기차에 실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탈출은 난망이다. 모두들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해가 서산으로 질 무렵, 기차 탑승을 앞두고 다소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간호학생 이병철 양이 집합대열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여러 간호원 및 간호학생들이 그 뒤를 따르려는 순간, 감시 중이던 북한 공산군의 총소리가 여러 발 요란스럽게 울려 퍼지면서 달아나던 이병철 양이 쓰러졌다. 가슴과 등에서 쏟아져 나오는 붉은 피는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물들이고 낭자하게 땅 위에 고였다. 열아홉살 순결한 처녀의 체온이 식어갔다. 꿈 많던 한 망울의 꽃봉오리가 피지도 못하고 한을 안은 채 시체로 변해 무참히 쓰러졌다.

    이 참상을 눈앞에서 보던 간호원들과 간호학생들은 소름이 끼쳐 넋을 잃고 멍청이 서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북한 공산군 병사의 핏발 서린 명령에 기계적으로 순순히 따랐다. 청량리 역에 어둠이 깔리자 기차는 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를 가니 기차는 멈추고 모두들 내리게 됐다. 그 후부터는 도보로 행군이 시작되었다. 낮에는 유엔군 전폭기들의 눈을 피하여 덤불 속에 숨어서 밤을 기다릴 때가 많았으며, 가끔 유엔군 전폭기의 폭격이나 기총소사를 받아 북한 공산군 부상자가 생기면 이들을 치료해주는 일을 했다. 북한 공산군의 종군 간호원이 된 것이다. 유엔군 전폭기와 유엔 지상군, 우리 국군의 북진에 이러저리 쫓기면서 약한 달이 걸려서 도착한 곳이 평안남도 순천읍이었다.

    그녀들은 유엔군과 우리 국군이 하루 속히 자신들을 구출해 주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그녀들에게는 새로운 근심이 일기 시작했다. 즉 우리 국군이 자신들을 붙들었을 때, 북한 공산군에 부역한 몹쓸 여자들이라고 침을 뱉고 혹시라도 자신들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기면 어쩔 것인가 하는 걱정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그녀들의 기우는 좋은 군인들을 만남으로써 깨끗이 불식됐다.


    ◆ 전쟁 포로로 그리운 님과 재회한 기구한 운명

    이 열두 명의 간호원과 간호학생중에는 오빠가 국군장병으로 활약하고 있는 사람이 여러 명 있었다. 우리나라 땅덩어리가 좁은 탓일까. 아니면 짓궂은 운명의 장난일까? 늠름하고 얼굴이 잘 생긴 선임 간호원은 놀랍게도 나의 바로 직속상관인 제1대대부대 대장 조현묵(趙顯默) 소령의 약혼녀였다. 나는 이 열두 명의 여자들을 전쟁포로가 아닌, 북한 공산군에 납치당해 학대를 받던 선량한 민간인들이 구출된 것으로 분류했다. 즉 포로 신분으로부터 해제하여 즉시 서울로 보내주고 싶었다. 그러나 제7연대는 원산으로부터 양덕·성천·은산을 거쳐 순천으로 진격해 왔기 때문에, 평양과 순천간의 도로는 아직도 북한 공산군 수중에 있으며 통행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원산으로 한 바퀴 돌아서 서울까지 보내자니 너무도 길이 멀었다. 하는 수 없이 평양과 순천 간의 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트럭에 태워 서울적십자병원까지 보내주기로 하고, 그동안은 우리 제1중대와 행동을 함께 하기로 했다. 그녀들은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쉬며 기뻐하였다.

    중대 보급하사관 박래영 중사가 주먹밥을 담은 사과상자를 걸머진 한청원(韓靑員)들을 인솔하고 왔다. 흰밥 한 덩어리와 고추장 한 숟가락씩을 중대 장병들과 열두 명의 처녀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날씨가 차서 파리 떼들이 덤벼들지 않아 한결 깨끗하였다. 군 장병들과 간호원, 간호학생들은 피워놓은 불을 쪼여가면서 물을 반합에 데워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난 후 우리 중대는 미군 제187공수여단과 우리 국군 제7연대 제3대대가 개천(价川)으로 진출하는 동안 순천 읍내로 뒤돌아가서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하게 됐다.

    나는 중대를 2열 종대 행군대형으로 편성하여, 남쪽으로 2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순천 읍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처녀들은 중대 본부에 편입되어 바로 내 뒤를 따랐다. 우리 중대가 순천읍내에 있는 우체국 앞을 지날 때, 일본군 경력이 있는 모 대위가 길옆에 서있었다.

    “야, 이 대위 뿅꼬 많이 잡았구나. 몇 마리 양보하지.”
    ‘뿅꼬’란, 제 2차 대전 때 못된 일본 군인들이 위안부나 능욕대상이 될 수 있는 교전 당사국 여자 포로들을 비하해서 부르는 용어라는 말을 나는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매서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본 후 입을 꽉 다물고 묵묵히 걸어갔다. 제국주의 일본군 만행의 악취가 풍기는 시대 낙오자의 헛소리를 문제 삼아, 부하들 앞에서 장교끼리 옥신각신 싸운다는 것은 때와 장소가 적절치 않다는 판단이 들었던 것이다.

    “야, 이 대위. 엉큼하구나. 욕심이 너무 많다.”
    허튼 수작이 뒤에서 들려왔으나 못 들은 체 무시해 버렸다. 다만, 저런 자에게 이 처녀들이 붙들리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머리를 스칠 뿐이었다. 우리 중대는 순천도립병원 옆에서 걸음을 멈추고 배낭을 풀고 대대에서 할당해준 공공시설 이곳저곳에 들어가 휴식에 들어갔다. 열두 명의 처녀들에게도 숙사를 할당해서 그녀들이 한 곳에서 쉬게 했다. 나는 대대장 김용배 중령에게로 가서 서울적십자병원 간호원과 학생 열두 명에 관한 상세한 보고를 했다. 그리고 그녀들의 신분을 포로가 아닌 선량한 시민으로 분류해서, 며칠 후에 평양-순천간의 길이 열리면 우리 중대 김지용 상사로 하여금 그들을 서울적십자병원까지 호송하겠다고 했다. 대대장 김용배 중령은 쾌히 승낙해 주었다.

    그러나 김용배 중령은 부대대장 조현묵 소령의 약혼녀인 선임 간호원만은 그 신원을 조현묵 소령에게 인계해 주라 고했다. 연락을 받은 조현묵 소령이 황급히 우리 중대로 달려왔다. 서울적십자병원 선임 간호원은 조 소령을 만나자 왈칵 울었다. 자기 잘못이 아닌 기구한 운명, 이렇게 추잡한 꼴을 하고 약혼자를 만나야 하는가 하는 서러움 한편으로, 다시 만날 기약이 없이 절망의 늪에서 허덕이다가 구원의 손길이 뻗어 다시 이렇게 님을 만나는 인연이 맺어지니 그 얼마나 기쁜 일인가 싶었으리라. 기쁨과 수치가 걷잡을 수 없이 교차하며 솟구쳐 올라와서 그녀는 감색 블라우스의 양 어깨를 들먹이며 자꾸만 울었다. 조 소령은 약혼녀의 등과 어깨를 어루만지며 위로했다.

    울음을 멈춘 그녀는 약혼자가 시키는 대로 조 소령이 타고 온 지프에 몸을 실었다. 약혼한 남녀를 태운 군용 지프는 부르릉 엔진 소리를 내면서 눈 앞에서 떠나갔다.


    ◆ 왕년의 인기가수 고복수 씨

    나는 각 소대장을 집합시켜 내일의 북진작전(공격) 명령을 하달하고, 모처럼 낮잠을 자기 위해 구두는 신고 총을 팔에 끼고 철모도 쓴 채로 마루에 누웠다. 그때였다. 장기봉 하사가 비쩍 마르고 키가 큰 포로 한명을 데리고 왔다. 그 포로는 다름 아닌 왕년의 인기가수 고복수 씨였다. 북한 공산군에 끌려가 따라다니며 선전에 이용되면서 노래 부르던 그가 오늘 아침에 돼지 우리 속에 숨어 있다가 잡힌 것이다. 고생을 많이 한 듯 눈이 푹 파이고 주름살이 굵게 잡히고 광대뼈가 드러나 있었다. 이발을 못해서 머리는 길게 귀를 덮었고, 몸에 걸친 한복에는 때가 반질반질 묻었으며, 양말과 농구화는 형편없이 해져서 발 뒤꿈치 맨살이 새까맣게 드러났다. 과거에 지상을 통해 보던 잘생긴 그 모습과는 많은 차이가 났다.

    “당신이 틀림없는 고복수 씨 입니까?” 하고 나는 다시 물었다.
    “네, 제가 바로 고복수 입니다.”
    그는 엉성하게 꼈던 팔짱을 풀어내리고 두 손을 무릎 사이에 비비며 허리를 굽신거렸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는지요?”
    가수는 닦지 못한 누런 이를 드러내면서 자기에게 유리한 증언을 했다. 그러나 북한 공산군에게 부역했던 사실만은 부인할 길이 없어 괴로워하고 있었다. 마지막에 가서 그는 “중대장님, 제 아들놈도 제21연대 위생병으로 있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하고 애원했다.
    말이 끝나자 커다란 눈을 껌뻑거렸다. 내 눈앞에는 지금 생사의 갈림길에서 목숨을 구원받으려는 무기력한 사나이가 있을 따름이었다. 왕년에 화려한 무대 위에서 그는 “가도 가도 사막의 길......” 또는 “타향살이 몇 해인가.....”를 경쾌하게, 또는 구슬프게 미성(美聲)으로 불렀다. 쏟아지는 청중의 앵콜과 박수갈채, 청춘과 낭만과 돈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북한 공산군에 부역한 자라는 오명을 쓰고, 썩어 넘어진 고목과 같은 황폐한 주름살과 가죽에 덮인 마른 광대뼈만이 가진 것 전부였다. 이것이 유전(流轉)의 인생길인가. 나는 중년의 몰락한 가수에게 깊은 동정이 갔다.

    “고 선생님, 너무 상심 마십시오. 인생 길은 험하고 비도 오고 눈도 옵니다. 스스로 이 역경을 극복하는 사람에게 행복은 다시 찾아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부인 황금심 여사는 지금 어디 계시는지요? 부인을 만나서 우선 몸의 건강부터 회복 하십시오. 그리고 재기하시길 바랍니다.”
    말을 마치자 나는 옆에 있는 중대 연락병 박재현 하사에게 배낭에서 중대장 용군용 양말 한 켤레를 꺼내도록 하여 고복수 씨에게 주었다. 양말을 받는 가수의 일그러지고 푹 꺼진 커다란 눈에는 이슬이 가득 고여 있었다. 나는 그에게 육군용 캐러멜과 점심을 먹인 후,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대대본부로 후송했다.

     


  •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도서 출판 기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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