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릉에서 역사를 보다 : 단종애사
  • 광릉에서의 군사훈련은 3일간 이어졌다. 다음으로 가야 할 제 23연대 지휘소는 사릉(思陵)이었다. 1920년대, 춘원 이광수 선생은 사릉마을에 기거하면서 사릉잔디 위를 자주 거닐고 깊은 사색에 잠겨가며 <단종애사>를 썼다고 한다. <단종애사>는 1929년에 출간되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내가 사릉마을에 도착한 것은 11월 6일 오후 4시반 경이었다. 마을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언덕 같은 낮은 산이 있다. 이 산에 사릉이 위치하고 있었다. 사릉입구 부근에 천막을 치기로 한 뒤 나는 사릉경내로 들어가서, 춘원 선생의 발자국이 수도 없이 많이 닿았을 잔디 위를 걸었다. 평지에서 불과 100보쯤 걸어 올라가서 분묘 앞에 섰다. 16년전에 단종애사를 펼쳐들고 정순왕후의 슬픈 사연을 읽으며 가슴 아파하던 일들을 회상했다. 경례를 하고고개 숙여 비극의 왕비의 명복을 비는 묵념을 올리고 머리를 들었다.

     

  • ▲ 지난 7월 4일 창경궁 통명전에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간택 모습을 복원 ⓒ 연합뉴스
    ▲ 지난 7월 4일 창경궁 통명전에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간택 모습을 복원 ⓒ 연합뉴스

     정순왕후가 단종의 왕비가 된 것은 단종 2년(1454년) 정월갑술 일이었다. 정순왕후를 왕비로 간택한 것은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과 그의 부인 낙랑부대 부인 윤씨였다. 낙랑부대 부인은 후에 정희왕후가 된다. 수양대군과 낙랑부대 부인은, 국구의 자리를 주어 도장차 세력을 잡을 근심이 없는 마음 착하고 욕심이 없는 선비를 골랐다. 그러다보니 풍저창(豊儲倉) 부사송 현수가 눈에 들었으며, 그의 딸이 용모 단정하고 고상하게 생긴 미인이며 나이는 왕보다 한 살 위인 열다섯살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래서 이 여인을 왕비로 간택했고 왕은 숙부와 숙모의 결정에 따랐다. 이때는 계유정난이 일어난 지 3개월밖에 안 되었으나, 숙부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이 어린 왕의 왕권을 수호하고 강화하기 위해 감행한 거사였다고 주장하며, 자신은 어디까지나 주공(周公)을 자처하며 처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왕과 숙부와의 관계는 원만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미인으로 태어나 곱게 자라서 중전의 자리에 오르니, 결혼 초 왕비 송씨는 더 없이 행복했다. 그렇게 밀월이 몇 개월 이어졌다. 그러나 이 부부의 금실지락에 약간의 금이가기 시작했다. 김사우의 딸인 후궁 김씨는 절세미인으로 왕비의 아름다움보다도 더 돋보였다. 그래서 왕은 자주 후궁 김씨를 가까이 했다. 궁중에서 왕이 후궁을 총애하는 일은 흔히 있는 것이다. 왕비는 질투심을 삭이면서 선천적으로 구비한 부덕과 사랑의 노력으로 왕을 대했다. 얼마 후 단종의 마음은 중전에게로 기울어졌다.

     

    국혼(國婚) 후 반년이 지났을 무렵부터 영의정 수양대군의 측근들인 한명회와 권람 등이 선발해서 왕궁으로 들여보낸 내시와 궁녀들이 단종과 왕비의 일거수일투족을 드러내놓고 감시하여, 수양대군 측에 일일이 보고하고 있었다. 얼마가 지나자 수양대군은 왕이나 왕비가 외부 사람들을 만날 때는, 반드시 숙부인 수양대군의 사전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사전동의 없이는 단종을 생후부터 오늘날까지 길러준 친어머니 격인, 세종대왕의 후궁 혜빈양씨 조차도 만나서는 안되었다.

     

  • ▲ 강원 영월군의 단종문화제 조선 6대 임금 단종의 능인 장릉으로 지역 학생들이 단종, 정순왕후, 사육신, 생육신 등 역사적 인물의 역할을 맡은 가장행렬이 들어오고 있다 ⓒ 연합뉴스
    ▲ 강원 영월군의 단종문화제 조선 6대 임금 단종의 능인 장릉으로 지역 학생들이 단종, 정순왕후, 사육신, 생육신 등 역사적 인물의 역할을 맡은 가장행렬이 들어오고 있다 ⓒ 연합뉴스

     또 왕비의 친정부모인 송현수 부원군 부부를 만나도 안되고, 왕의 누님과 매형인 경혜공주와 영양위 정종을 만나서도 안되었다. 게다가 왕의 외숙인 권자신이 나 왕숙인 금성대군도 절대로 만나서는 안된다고 행동 제한지침을 전달해 왔다. 비록 왕숙이며 영의정 자리에 있다해도 수양대군은 신하이며, 단종은 군왕이다. 신하된 자로서 왕의 행동을 이렇게 구속한다는 것은 전대미문의 반역이었다.

     

    날이갈수록 단종의 얼굴에는 수심이 더 쌓이고, 이를 바라보는 왕비의 마음은 슬프고 무거웠다. 왕비는 바늘방석에 앉은 처지의 단종을 위로하는데 온 정성을 다했다. 그럴수록 왕과 왕비 사이는 더 밀착되었고, 슬픔도 아픔도 서로 함께 나누고 의지하는 가운데 불가분의 관계가 이루어졌다. 남편 단종이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빼앗기고 물러날 때 왕비는 많이 울었다. 정순왕후의 슬픔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순왕후의 아버지인 국구 송현수 부원군과 그의 부인과 가족들은 누명을 쓰고 세조에 의하여 모두 처형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세상에 이럴수가! 열일곱살의 상왕비(=정순왕후)가 넋을 잃고 쓰러지자, 상왕(=단종)은 이를 부축하며 낙루하였다. 그로부터 열이틀 후,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된 남편이 관원에 끌려 영월 유배지로 떠나는 시간이 눈 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노산군의 거처인 금성대군의 궁은 울음바다가 됐다. 내시들이 울고, 궁녀들이 울고, 노산군 강봉으로 후궁의 자리를 잃고 뭐라고 붙일 이름조차 없는 여인들이 울고, 그외 모든 사람들이 울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슬퍼하면서 기색혼절을 거듭한 여인은 노산군 부인 송씨였다. 열이틀 전에 친정 부모님과 가족이 몰살당한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유일하게 의지하고 사랑하는 남편 노산군마저 유배지로 떠나보내게 되니, 절망의 슬픔과 아픔을 감당할 길 없어 그녀는 울고 또 울었다. 허탈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눈물을 닦은 후, 노산군 부인 송씨는 남편을 따라 영월에 함께 가게 해달라고 왕에게 간청했다. 그렇지만 왕은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참을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며 노산군 부인은 남편과 기약 없는 생이별을 하며 동과 서로 갈라졌다. 홀로 남은 노산군 부인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고, 꿈 속에서도 베개는 축축하게 젖었다.

     

    적소(謫所)의 님, 애처롭고 그리워 망대(望臺)에 올라서서 눈시울을 적시며 동쪽을 바라보니, 구름과 산은 멀리 영월 땅을 가로막고 있었다. 오고가는 낮과 밤을 눈물로 보내던 그녀에게 “노산군은 서인으로 강봉된 후임금이 보낸 관원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고, 그 시신은 청령포 강물에 던져졌다”라는 비보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열여덟살의 꽃다운 나이에 그녀는 절망 속에서 모든 것을 체념했다. 동대문 밖 연미정동(燕尾亭洞)에 초옥을 지어 정업원(淨業院)이라 이름 짓고, 그곳에서 침식을 하면서 매일 절 뒤의 석봉(石峰)에 올라가 영월 쪽을 바라보며 비통해 했다. 그렇게 단종의 명복을 빌며 지내다가, 중종 16년(1521년) 6월 4일, 82세를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조선국 제19대 왕 숙종 24년(1698년) 11월에 단종이 복위되자, 그녀는 단종왕비인 정순왕후가 되었다.

     

    권력에 미쳐서 살육을 일삼은 역사의 가해자도, 이들에게 참혹하게 당한 역사의 피해자도 필경가는 곳은 한군데, 모두가 몇 줌의 흙이되어 땅 속에 누워있다. 사릉 소나무 푸른 산은 예나 이제나 다름없이 오후 석양 길에 긴 그림자를 지상에 누이고 있다. 정순왕후가 겪은 슬픈 사연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먼 5백여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울다 지쳐 멍하니 서서 영월 땅을 바라보는 애처로운 모습이 내 머리 속에 환영(幻影)으로 떠오르며, 경춘철도 건널목에서 들려오는 기적소리는 목메어 울며 지나갔다. 나는 이승에서의 비극의 왕후가 저승에서만은 단종과 만나서 행복하기를 비는 묵념을 올리고 돌아서서 경사진 잔디밭을 걸어서 내려갔다.

     

     


  • ▲ 강원 영월군의 단종문화제 조선 6대 임금 단종의 능인 장릉으로 지역 학생들이 단종, 정순왕후, 사육신, 생육신 등 역사적 인물의 역할을 맡은 가장행렬이 들어오고 있다 ⓒ 연합뉴스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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