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릉에서 역사를 보다 : 수양대군의 패륜
  • ◆ 홀로 광릉(光陵)의 왕릉 앞에 서다

    조락의 가을은 깊어가고 있었다. 탐스러운 벼 이삭들이 철원평야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던 수확의 10월은 가고, 곡식을 베어 거둬들인 논밭에는 수많은 그루터기들이 쓸쓸한 모습으로 남아있었다. 해마다 이때가 되면, 군대는 약 1주일간의 대규모 군사연습인 기동훈련에 들어간다.

    1961년 11월 3일 새벽부터 내리는 가랑비는 헐벗은 산과 들과 계곡의 낙엽들을 소리 없이 적시고 있었다. 나는 이날 오후에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문혜리에 있는 제 23보병 연대본부를 떠나 연대본부 장병들을 이끌고 광릉(光陵)을 목적지로 하여 차량 행군 중에 있었다. 제 23보병 연대는 광릉-사릉-영릉으로 이동하면서 제 1야전군 전체가 실시하는 군사 연습에 참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 연대는 가랑비가 멎고 어둑어둑 해지는 광릉에 도착하여 군용 천막 칠 곳을 상의하고, 능입구 큰 전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숲 속에 지휘본부 천막을 설치했다.

    나는 밤 늦게까지 상부에서 내려오는 작전 상황을 처리하느라 자정이 지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 4시 반에 일어났다. 상황 장교로 부터 취침 중에 일어난 상황 진전들을 보고받고 세수를 한 후, 경유난로 옆에서 얼굴을 말리면서 하루 할 일을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천막 밖으로 나갔다.

    어제 초저녁까지 하늘을 뒤덮었던 비구름은 밤사이에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머리 위에는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기온은 영하로 떨어져서 지상에는 가벼운 얼음이 얼고 서리가 내려 날씨는 차가운데, 바람은 없어 사방이 고요했다. 나는 철모를 벗어 땅위에 거꾸로 놓고 권총밴드를 풀어서 철모 속에 놓은 다음 약 10분간 맨손체조를 했다. 체조가 끝나자 다시 무장을 갖추고 천막 안으로 들어가서 날이 더 환해지기를 기다렸다. 날이 밝아오자 나는 수행원 없이 홀로 광릉으로 걸어 올라가서 왕릉 앞에 섰다. 그리고 각종 문헌에서 읽은 그의 생애를 더듬어 보았다.

     

    ◆ 잔인무도한 철권독재 군주 세조와 ‘계유정난의 변’

    무덤 속에 누워있는 조선조 제 7대 임금인 세조는 어린 조카인 단종으로 부터 왕위를 찬탈한 후 단종을 살해했을 뿐 아니라, 잔인무도한 철권독재 군주로 세평이나 있는 군왕이다. 인륜문제를 젖혀두고 평가할 때, 그는 머리가 좋아 학문도 잘하고 무예에도 뛰어난 문무 겸비의 군왕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를 떠나, 그가 감행한 쿠데타인 계유정난(癸酉靖難)의 변(變)의 경과를 살펴보면 그의 특성이 극명하게 나타난다. 단종 원년(서기 1453년) 음력10월 10일밤, 수양대군은 자기가 양병한 백여 명의 사병(私兵) 중에서 뛰어난 무사 약간 명을 거느리고 고명대신 중의 실력자인 좌의정 김종서가 살고 있는 성 밖의 집을 찾아갔다.

  • ▲ 조선 세조의 화상 ⓒ 국사편찬위원회
    ▲ 조선 세조의 화상 ⓒ 국사편찬위원회

    김종서의 아들인 김승규가 수양대군에게 사랑에 들라고 했다. 수양대군은 날이 저물어 성문을 닫을 시각이 임박했으니 그럴 수 없다고 말하면서, 긴급히 의논할 용건이 있으니 김종서 대감이 잠시 밖으로 나와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종서는 아들의 말을 듣고 사랑 마당으로 나왔다. 수양대군은 계수인 영웅대군 부인이 말썽을 부리며 동래 온천에 갔다 온 문제에 관해 대간시비가 일어났는데, 처리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김종서에게 물었다. 수양대군은 손을 들어 사모를 바로 쓰려는 듯이 행동했는데, 이때 오른편 사모뿔에 꽂은 대목이 부러지며 땅에 떨어졌다. 사실은 사기극으로, 처음부터 부러뜨린 사모뿔을 꽂아놓고 있었던 것이다.

    “아차, 이게 웬일이고? 이게 왜 부러진단 말인고. 괴이한 일이로군.”
    수양대군은 당황한 듯 어리둥절 어수선한 언동을 했다. 그러나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이것은 한명회가 준 꾀였다.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는 무술이 뛰어난 힘센 장사였는데, 그를 김종서 주변에서 떠나게 하려는 술책이었던 것이다. 김종서는 아들 승규에게 방안에 들어가서 제대로 된 사모뿔을 골라 몇 개 가지고 나오라고 했다. 김승규가 아버지의 곁은 떠나자 수양대군은 굵은 붓으로 쓴 편지 한 장을 소매에서 꺼내어 김종서에게 내밀면서 읽어보라고 했다. 달빛은 밝았지만 붓글씨는 잘 읽을 수가 없었다. 김종서가 머리를 숙여 편지를 읽으려 할 때, 수양대군이 오른손을 드는 것을 신호로 수양대군의 궁노 임운이 철퇴로 김종서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나리, 이런 법은 없소.”
    피를 뿜으며 김종서는 땅 위에 콰당 쓰러졌다. 방에서 뛰어나온 김승규는 임운에게 달려들어 그를 쳐 죽이고, 철여의를 들어 수양대군의 무사유수를 내리쳐서 칼을 든 오른팔을 부러뜨려 놓았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무사양정이 휘두르는 칼에 김승규는 허리가 잘리며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김종서의 경호 무사신 사면과 윤광은도 수양대군 무사들의 기습 공격을 받아 모두 칼을 맞고 쓰러져 죽었다. 수양대군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어, 되었네. 가세” 하고는 서둘러 말에 올라탔다. 양정은 죽은 김승규의 옷자락에 두어 번 칼에 묻은 피를 씻어 칼집에 꽂고, 황망히 말에 올라 수양대군을 따라 달렸다. 수양대군 일행은 서대문에서 기다리던 권람 일행과 합류했다. 수양대군은 사병으로 양성해놓은 100여명의 무사들을 한명회가 지휘하여 따르게 하고,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어 놓은 감군(監軍) 홍달손의 순군(巡軍) 200여명도 함께 거느리고 왕에게로 달려갔다.

    그날은 왕의 누님인 경혜 공주의 생신이어서 왕은 파조 후에 누님 내외가 살고 있는 영양위궁(寧陽尉宮)에 가있었다. 그곳에서 수양대군은 조카인 어린 단종을 만났다. 수양대군은 어린 왕에게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 등이 모반을 하여 안평대군을 왕위에 올리려고 하기에 일이 급하여 미처 임금께 알리지 못하고 김종서를 베었다는 거짓 설명을 했다. 그리고 그 여당들이 아직 남아있어 형세가 매우 급하니, 그들을 즉시 처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세종·문종·단종의 3대에 걸쳐 역사삼세(歷事三世)한 충복인 늙은 내시 김연과 한승이 왕의 옆에 있다가, 황보인과 김종서 등의 충신들이 모반했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 좀 더 상세히 내막을 알아본 뒤 일을 처리하여도 늦지 않다고 왕께 아뢰다가 수양대군의 칼에 섬뜩하게 목이 잘렸다. 왕은 벌벌 떨면서 수양대군이 하자는 대로 따랐다. 수양대군은 왕의 윤허를 받아 한명회와 권람과 자신이 미리 작성해 놓은 살생부에 의해 승지최항에게 명하여 대신들을 급히 들게 했다. 영문도 모르고 급히 달려온 영의정 황보인이 제 2문에 들어서자 수양대군의 심복 구치관이 철퇴로 황보인의 머리를 내려쳐 살해했다. 이날 밤, 제 2문에서 철퇴를 맞고 죽은 고관대작들은 일곱 명이었다. 수양대군의 궁노 임운에게 철퇴를 맞고 집에서 쓰러진 좌의정 김종서는 기적적으로 숨이 남았으나, 수양대군이 다시 보낸 이흥상에 의해 목이 잘렸다.

    수양대군은 황보인과 김종서의 목을 효목(梟木)에 매달아서 울과 지방도시의 주요 네거리를 돌리면서 효시케 했다.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에 일장검 빗기 들고 긴 바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두만 강변에 6진을 개척하여 불후의 큰 공을 세우며 이렇게 읊은 김종서는 이토록 비참하게 가버리고 말았다. 큰 변이 밤에 일어난 다음 날 새벽, 그런 흉변이 있었던 것을 까맣게 모르는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 의춘군에게, 강화도로 귀양 보낸다는 왕의 교서가 내려왔다.

    왕명을 빙자하여 친형인 수양대군이 시킨 일이다. 청천벽력과 같은 교지를 받은 안평대군은 어안이 벙벙했으나, 왕명을 거역할 수 없어 열다섯 살의 아들과 함께 당장 떠나야 했다. 양부 성녕대군의 사당에 하직하고 대궐을 향하여 세 번 절한 다음, 금부도사 일행을 따라 의춘군과 함께 집을 출발하여 남대문을 지나갔다. 뒤돌아보니 부왕인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자신이 쓴‘崇禮門’(숭례문)이라는 남대문 현판 글씨가 보였다. 세종대왕은 재위 시 천하 명필이었던 아들 안평대군의 글씨를 모든 사람들이 두고두고 감상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왕래가 가장 많은 남대문의 현판을 안평대군에게 써 붙이게 했던 것이다.

    성품이 호탕하고 풍류를 즐기며 대자연을 벗 삼아 지내던 안평대군의 머릿속에, 옛일이 떠오르며 흘러간 나날이 주마등 같이 스쳐 지나갔다. 부귀영화는 뜬구름 같고 지난날 부왕의 사랑이 가슴에 사무쳐, 그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고 또 닦았다. 안평대군 부자는 강화도에 유배된 후, 모두 사약을 받아 살해됐다. 이 난리 통에 죽은 종실(宗室)의 희생자는 안평대군 부자를 포함하여 무려 16명이나 됐다. 살생부에 의한 피살자는 총 107명에 이르렀다. 폭력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스스로 영의정에 취임하여 이조판서와 병조판서, 내외 병마도통사 등의 요직을 겸임했다. 또한 어린 왕을 대신해서 서무를 관장하는 등 왕권과 신권(臣權)을 동시에 완전 장악했다.

    그로부터 약 2년 후, 수양대군은 단종으로부터 보위를 찬탈하여 조선조 제 7대왕으로 등극했다. 그 후 사육신을 능지처참하고, 단종도 살해했다. 병자원옥 때는 70여명을 살해하고, 자기의 친동생인 금성대군을 위시하여 많은 종실인사들을 추가로 살해했다. 이리하여 세조는 어머니가 같은 친동생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어머니가 다른 이복형제인 화의군과 한남군, 영풍군, 이렇게 모두 다섯 명의 형제들을 살해하는 금수와 같은 짓을 했다.

    “무릇 큰일을 하는 법이 선살후생(先殺後生)이요. 먼저 상대를 죽인 후에 내가 사는 법이외다. 죽이는 것이 첫 일이외다.”
    권람은 수양대군 세조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세조는 재위기간 중 괄목할만한 치적을 꽤 남기기는 했으나, 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패륜유혈의 철권통치의 그늘에 가려 그 빛이 몹시 바랬다. 세조는 조선조 27명의 역대왕 중에서 형제를 가장 많이 살해하고 종실들과 대신들을 가장 많이 살육한 왕이라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때문에 사육신과 생육신이라는 쌍육신(雙六臣)이 탄생하는 희귀한 일도 생겼다. 일반 백성들로서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영의정 자리가 무엇이 부족하고, 종친 중에서도 첫째로 꼽히는 대군의 자리가 무엇이 부족해서 그 같은 어처구니없는 잘못을 저질렀을까? 누구나 탐염(貪染)에 빠진 후에는 불길에 타는 듯한 괴로움과 번뇌의 악과(惡果)에 시달리게 된다. 세조도 여기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단종의 어머니는 단종을 출산하고 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세종대왕의 젊은 후궁인 혜빈양 씨에게 단종을 부탁하고 눈을 감았다. 세조는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렸다. 밤마다 꿈속에서 형수인 현덕왕후가 자주 나타나 세조를 괴롭히는 바람에 식은  땀을 흘리며 괴로운 밤을 보내야 했다. 하루는 현덕왕후가 세조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난 후, 세조는 악성 피부병에 걸려 오랫동안 심한 고생을 했다. 또한 그토록 사랑하고 신임하던 아들 의경세자가 허구한 밤을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리다가 요절하자,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치는 패륜까지 저질렀다.

    아, 슬프다! 세조를 괴롭힌 것은 세조 자신이며, 현덕왕후의 혼백이 아니었다. 만일 세조가 천륜을 거역하지 않고 유왕(幼王)을 잘 보필했다면, 현덕왕후의 혼백이 결코 그를 괴롭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조선국의 주공(周公)이나 제갈공명으로 우러러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양대군 세조는 생전에 이를 생각하지 못했고 후세 사람들이 이를 생각하며 슬퍼한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이 슬퍼만하고 거울삼지 않는다면, 그 다음 사람들이 지금의 후세사람들을 또한 슬퍼할 것이다.

    왕의 재위기간 13년 3개월, 그리고 그다지 길지도 않은 51년의 생애를 보낸 세조. 왕관이 무엇이고 권세는 무엇이며 탐욕은 또한 무엇인가. 사람이 타고난 아름다운 본성을 스스로 지워버린 수양대군 세조. 그때문에 생전에 무서운 괴로움에 시달린 그, 이제는 몇 줌의 흙이 되어 이 무덤 속에 누워있다. 그는 저승에서도 현덕왕후의 혼백에 지금도 겁을 먹으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할수록 애석한 마음 금할 길이 없다.

     

    ◆ 광릉에서 촬영 된 영화 '광풍(狂風)'

    고요한 늦가을 이른 아침, 빙점하의 한기(寒氣)가 무덤 앞에 서 있는 무인(武人)의 뺨에 가볍게 스친다. 마냥 생각에 잠기며 이곳에서 있을 수만은 없다. 할 일이 군용막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서리 내린 잔디 위에 군화자국을 남기면서 나는 연대지휘소로 내려왔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브리핑을 들은 후, 이것저것 상황을 처리하고 군사 지형 정찰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아침 해가 퍼지고 있었다. 이때 우리나라 백성들의 옷차림인 흰 옷을 입고 상투 틀고 망건을 썼으며, 수염도 기르고 갓을 쓴 사람들 10여 명이 이쪽을 향하여 걸어오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북어를 들고, 어떤 사람은 과일이나 기타 제수용품을 들고 있었다. 그들 일행의 맨 뒤에는 양복 차림의 촬영기사 두 명이, 촬영기와 필름 꾸러미들을 메고 따라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인기배우 최무룡 씨 일행이었다. 조금 있다가 4분의 3톤 소형 트럭 한 대가 굴러왔다. 하늘색 페인트칠을 한 영화제작사의 그 트럭 위에는 ‘狂風撮影中(광풍촬영중)’이라고 흰 천에 기다랗게 옆으로 쓴 현수막이 가로로 걸려있었다.

    “영화 화면에 나오는 최무룡은 미남이었는데, 가까이서 실물을 보니 별로 미남이 아니네요.”
    “짙게 화장을 하고 촬영하면 누구나 다 미남이 되는 거야.”
    연대정보주임 권 대위와 작전주임 정 소령이 주고받는 대화였다. 영화의 시나리오는 알 수 없으나, 광릉에서 ‘狂風(광풍)’이라는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그 이름이 그럴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렇다. 세조 때, 살육의 광풍은 이 땅에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 ▲ 조선 세조의 화상 ⓒ 국사편찬위원회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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