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은 1910년 8월 22일 한국병탄을 완료한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29일 이를 공포했다.
    꼭 100년 전이다. 그 후 한국, 일본, 중국이 함께하는 동아시아의 역사는 지배와 피지배, 억압과 저항, 협력과 갈등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상호 신뢰성을 회복치 못하고 있다. 영국의 역사철학자 콜링우드(R.G.Collingwood)는 “지난날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오늘의 현실을 이해할 수 없고, 또 내일의 향방을 예측할 수 없다”고 했다. 지난 100년의 역사를 소중히 되새기고, 그 교훈을 바탕으로 한국과 일본, 그리고 동아시아의 100년을 설계해야 할 것이다.

  • 한상일 교수.
    ▲ 한상일 교수.

    아픔의 기억

    일본 정부가 한국병탄을 공식으로 발표하는 아침, 병탄의 주역이었던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는 언론사 대표들을 공관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그동안 정부가 진행한 병탄과정을 브리핑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일본이 조선 병탄을 단행하게 된 원인은 “동양화란(東洋禍亂)의 뿌리를 영원히 제거”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병합의 결과”로 “조선인의 복리가 증진되고, 일한일가(日韓一家)를 이루고, 동양평화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언론의 역할을 당부했다(<讀賣新聞> 1910.8.30). 그러나 지나온 100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병탄의 결과는 고무라의 예상과는 정 반대방향으로 전개됐다.
    1910년 이후 지속된 35년의 식민지시대를 보내면서 한국사회는 저항과 굴종 속에서 피식민지인으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일가’를 이루기보다는 한국인에게 일본을 향한 증오와 불신의 씨를 뿌려주었다. 그리고 동아시아는 전장(戰場)으로 변했다.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를 ‘식민 전체주의(colonial totalitarianism)’라고 규정하고 있는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면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정책은 “인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의 식민통치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가혹한 것”이었다(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 1968). 물리적 억압을 넘어, 언어와 역사의 소멸은 물론, 창씨개명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민족 말살 그 자체를 시도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의 반일 감정은 뿌리가 깊고 철저했다 

    ‘가혹’한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한국인의 대응은 저항과 굴종으로 나타났다. 식민지 치하에서 한민족이 보낸 35년은 저항과 투쟁의 역사였다. 저항에 대한 일본의 탄압과 회유가 계속됐지만, 국내외에서 전개된 크고 작은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일본의 식민지배는 한국인의 저항의 강도와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탄압의 강도를 조절하며 때로는 회유책, 때로는 강압적 지배, 또 때로는 문화통치를 구사했다. 그러나 일관된 목표는 ‘반도인(半島人)을 충량(忠良)한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개조하는 것이었다. 한국인의 일본인화였다.

    저항의 반대편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굴종과 동조 또한 나타났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현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식민지배는 본질적으로 협력자를 필요로 한다. 일본은 회유와 억압의 기제를 동원하여 동조세력을 개발하고, 이를 적절히 활용하여 민족분열을 조장했다. 피식민지인의 아픔을 체험한 알제리의 알버트 멤미(Albert Memmi)가 절절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과 같이 식민통치를 경험한 피지배자가 겪어야 할 가장 큰 고통의 하나는 식민지배 시대를 지나면서 ‘내면화’된 동족사이의 ‘분열’이다(The Colonizer and the Colonized, 1965).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36년의 식민시대를 지내면서 한민족은 일본에 대한 저항과 영합으로 분열됐고, 그 분열의 후유증은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100년이 지난 오늘도 ‘친일파 단죄’가 중요한 사회문제로 등장하고 있음이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1945년 식민지 시대는 끝났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일본에 대한 미움과 불신, 그리고 내면화된 분열이라는 2중의 고통을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단절의 세월

    1945년 일본의 패망은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 심대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한민족은 36년이라는 긴 식민지 시대를 마감했으나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데 실패했다.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됐고, 갈라진 한민족은 비극적인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그리고 그 분단은 65년이 지난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냉전은 종식됐으나, 최근의 ‘천안함 사태’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냉전의 먹구름은 여전히 한반도를 덮고 있다. 식민지 시대가 남겨준 또 하나의 유산이다.

    식민통치의 주체였던 일본은 주권을 상실하고 피점령국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일본은 7년이라는 피점령 시대를 거쳐 1952년 주권독립국가로 다시 국제사회에 등장했다. 과거 식민지였던 한반도에서 일어난 동족상잔의 전쟁은 요시다 시게루의 표현을 빌리면 일본에게 “천우신조(天佑神助)”의 기회였다. 일본은 이를 밑받침으로 1956년에 이르러 이미 전후부흥의 단계를 끝낼 수 있었다.

    분단 한국과 일본이 국교정상화를 이루어 내는 데 20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해방과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라는 격심한 사회적 진통을 체험한 한국이나, 패전과 점령통치와 전후복구에 매달린 일본은 서로 상대방에 대한 필요성을 긴박하게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단절의 세월이 길어진 보다 중요한 원인은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한국은 어제까지만 해도 가혹한 지배자였던 일본을 ‘교류’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준비되지 않았다.

    더하여, 식민지배에 대한 역사인식의 괴리는 정부차원의 대화도 어렵게 만들었다.
    이승만은 일본에게 “과거의 비행에 대한 뉘우침과 이 시점 이후 우리와 공정하게 대하겠다는 새로운 각오와 관련한 구체적이고도 건설적인 증거”를 요구했다. 이대통령이 제시한 교류의 전제는 다만 그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의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입장은 이와 달랐다. 소위 ‘망언(妄言)의 효시(嚆矢)’로 알려진 구보다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의 “36년에 걸친 일본의 한국 통치는 한국국민에게 유익”했다는 것이 일본의 본심이었다. 

    1965년 한국과 일본은 우여곡절 끝에 관계정상화를 매듭지을 수 있었다.
    이는 상호 필요성과 시대적 상황의 산물이었다.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이라는 한국의 국가목표와, 해외시장 확보와 아시아에서의 위상확립이라는 일본의 국가목표가 일치했다. 또한 냉전이라는 국제질서와 그 속에서 세계전략을 만들어가고 있었던 미국의 동아시아정책이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국민화해와 과거청산이라는 본질을 비켜가면서 현실적 필요성에 매달려 이루어진 국교정상화는 그 후 끊임없는 긴장과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협력과 갈등

    국교정상화 이후 45년의 한일관계는 협력과 갈등, 긴장과 협조의 연속이었다. ‘선린관계’와 ‘공동의 이익’을 기약하면서 출발했지만, 그동안 끊임없는 마찰과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일본 지배층의 ‘망언’, 김대중 납치사건,  문세광의 박정희 암살시도, 종군위안부, 역사교과서, 독도 영유권 등과 같은 문제가 불거져 나올 때마다 한국과 일본의 국민감정은 부딪치곤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갈등과 마찰 속에서도 두 나라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리고 최근에 들어와서는 문화적으로 상호 긴밀한 교류를 발전시켜왔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1년에 5백만 명 이상의 양국민이 왕래하고, 700억 달러 이상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현실이 한일관계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두 나라의 국민감정은 여전히 ‘배일(排日)’과 ‘혐한(嫌韓)’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아무리 참기 어렵고 고통스러운 경험이라도 세월이 흐르고 그것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이 사라져감에 따라 그 아픔과 슬픔은 엷어지고 지워져가는 법이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은 예외인 것 같다.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고 세기가 바뀌어도 역사적 아픔과 일본에 대한 불신은 여전히 한국인의 가슴에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국인의 반일감정도 세월과 함께 잊혀져가고 순화되는 것 같아도, 심층에서 내연하고 있고, 그동안 기회마다 보여주었듯이 언제든지 계기만 있으면 폭발할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한 세기라는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무엇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그처럼 사그라질 줄 모르는 반일적인 정서를 만들게 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과거사가 지난날의 역사로 정리되지 않고, ‘현재의 역사’로 오늘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로서의 일본은 이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정립(鼎立)’의 동아시아

    한국병탄 100년을 맞이하는 2010년은 일본의 패망 65년과 한일국교정상화 45년, 일중전쟁 70년과 일중국교회복 38년과 겹친다. 이 ‘매듭의 때’를 맞아, 한일관계를 넘어 동아시아라는 좀 더 넓은 차원의 미래를 설계할 필요가 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함께 만들어 온 지난 한 세기의 이곳 역사가 미래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와 문화적 유산, 광대한 영토와 인구, 거대한 경제규모와 높은 기술 축적을 보유한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가 함께하고 있는 동아시아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굴절과 고난이라는 100년의 역사를 지나왔으나, 세 나라 모두가 그 가능성을 구체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했다. 동아시아는 EU나 NAFTA를 넘어서거나 또는 대등한 하나의 축으로 작동할 수 있는 역량을 지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침략과 저항, 협조와 갈등으로 점철된 지난 한 세기의 동아시아 역사가 가르쳐 주고 있는 교훈은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가 역사적 자산과 민족적 능력을 합하여 공동의 번영과 평화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세 나라가 가야할 최선의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는 여전히 불신과 반목이 짙게 깔려있고, 그래서 실천가능한 공동체 구축을 위해서 한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왜일까?  물론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근원은, 대단히 진부한 주제이기도 하지만, 역시 과거에 대한 ‘역사인식’과 ‘과거청산’이라는 문제에 귀착하지 않을 수 없다. 세 나라는 지난날 ‘아픔의 역사’를 아직 해원(解寃)하지 못하고 있다. 갈등의 원인을 안고 있고, 상호 불신의 그림자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공동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공동체 논의가 무성하지만 그 실현이 마치 신기루처럼 저 멀리 보이기만 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연유 때문이다.
     
    오늘의 유럽공동체(EU)를 바라보면서도 때때로 간과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 밑에 깔려 있는 상호신뢰감이다. EU를 가능케 한 가장 중요한 자산은 독일과 이웃, 특히 프랑스나 폴란드와 같은 나라와 신뢰관계를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이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치의 비인도적 행위를 부정하고, 자국 중심적으로 역사해석을 고집했다면 결코 EU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날의 잘못된 역사를 단지 “과거의 것으로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먼 훗날 수정되거나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누구나 지난날에 대하여 눈을 감고 외면하는 자는 현재에도 눈을 감는다”는 바이츠제커적(的) 역사인식과 확신, 그리고 그것을 입증하기 위한 중단 없는 행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을 기억 할 필요가 있다(Richard von Weizsaker 독일대통령의 종전 40주년 기념연설, 1985.5.8).

    지난날의 아픔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워 지기 위해서는 그 아픔의 역사를 정리해야만 한다.
    ‘과거청산’의 내용과 방법에 있어서는 한국, 일본, 중국 세 나라가 좀 더 깊이 논의하고 검토해야 하겠지만, 과거에 대한 사죄와 용서를 담은 서로 납득할 수 있는 합의문을 세 나라가 공동으로 채택하여 이를 각국의 국민을 대변하는 의회에서 통과시키는 방안도 하나의 대안으로 검토해 볼 수 있다.
    북한과 일본의 관계정상화도 이러한 틀 속에서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일본은 100년 전 동아시아 변방의 작은 섬나라에서 근대산업국가로 발 돋음하는 능력을 보였다. 최소한의 사회적 충격 속에서 서양문명을 수용하여 체제를 안정시키고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또한 패전의 잿더미에서 경제대국과 민주주의 국가로 성장하는 저력을 보였다. 일본은 능력과 경험과 자산을 가지고 있는 민족임을 역사에서 입증했다. 21세기 동아시아의 지도자로서 일본의 역할 또한 막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분쟁의 시발점인 한국병탄으로부터 100년, 군국주의의 종말이라 할 수 있는 패전으로부터 65년을 맞이하는 오늘도 가장 가까운 이웃이며 중요한 협력자인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왜일까를 깊이 성찰하고, 진정한 화해의 길을 앞장서서 모색해야 할 것이다.

    한국이나 중국 또한 일본과 맺어진 ‘과거사’의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오늘의 한국은 그동안 식민지시대의 암울한 역사의 그림자와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이라는 불행을 극복하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냈다. OECD의 회원이 됐고, 세계10위권의 경제국가로 성장했고, 인공위성을 쏴 올리는 국가로 우뚝 섰다. 중국 또한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G2의 자리에 이르렀고, 국제질서의 한가운데 서 있다. 한국이나 중국은 이제 자긍심을 가지고 지난날의 아픈 역사를 품고, 일본에 대해서도 보다 너그러워질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물론 지난날의 역사적 사실을 잊을 수도 없고 또 잊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너무 집착하고 그것에 구속되어 밝은 미래를 어둡게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근대 일본건설의 주역이었던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1825-1883)의 말을 다시 음미해보자.
    격동기인 메이지(明治) 초기의 중심인물이었던 그는 유신 다음해인 1869년 “조선과 청국은 예부터 일본과 좋은 관계를 맺어온 이웃[隣國]”이라고 규정하고, “일본-조선-청나라의 연대[鼎立]”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일본이 취해야 할 국가진로의 근본이라고 강조했다(“外交之事”, 1869). 물론 그 후 일본은 조선과 청나라를 침략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와쿠라가 제시했던 그 정신은 지금도 유효하고, 일본은 이를 실현하는 데 앞장서야 할 역사적 부채를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