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신과 김유신의 감동적인 장면

    倭軍과 전쟁중에 모함에 걸려 투옥되고 고문까지 당하였던 李舜臣은 누명이 풀려 백의종군을 하다가 조선 水軍이 전멸하다시피 하자 다시 三軍수군통제사로 복직된다. 남은 배는 12척. 그래도 충무공은 '舜臣不死 尙有十二'라는 보고를 올린다. "이순신은 죽지 않았고 아직 12척이나 있습니다"는 말이다. "12척밖에 없다"가 아니라 '아직도 12척이나 있다"고 한다. 이 말이 가슴을 친다. 우리 민족사에 남을 만한 가장 감동적인 말중의 하나이다. 12척에 한 척을 보태어 13척을 이끌고 가서 敵船 200척과 싸운 것이 명량전투이다. 지난 토요일은 鳴梁(명량)전투 412주년 기념일이었다. 亂中日記 중 가장 생생한 묘사가 이 海戰에 관한 것이다. 從軍기자의 기사처럼 生動하는, 李舜臣의 르포를 소개한다.   

    이순신의 전쟁 르포
      
      <이른 아침에 別望軍이 다가와 보고하기를 수효를 알 수 없도록 많은 적선이 鳴梁으로 들어와 곧장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으로 오고 있다고 하였다. 즉각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니 敵船 130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수로 많은 敵을 대적하는 것이라 모두 회피하기만 꾀하는데 右水使 金億秋가 탄 배는 이미 2마장(1마장은 십리나 오리 정도 거리) 밖으로 나가 있었다. 나는 노를 재촉하여 앞으로 돌진하여 地字, 玄字 등 각종 銃筒을 폭풍과 우뢰같이 쏘아대고 軍官들이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敵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가 물러났다가 하였다.
     
      그러나 겹겹히 둘러싸여서 형세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온 배의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 보며 얼굴 빛을 잃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되 敵船이 비록 많다고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치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하여 敵을 쏘고 또 쏘아라 하였다. 여러 장수들의 배들을 본 즉, 먼 바다로 물러서 있는데, 배를 돌려 軍令을 내리고자 해도 적들이 그 틈을 타서 더 대들 것이라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호각을 불어 中軍에게 軍令을 내리는 깃발을 세우게 하고 또 招搖旗를 세웠더니 中軍將 미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로 가까이 왔으며 거제현령 安衛의 배가 먼저 다가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친히 安衛를 불러 말하기를, 너는 軍法으로 죽고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니, 安衛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하였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中軍으로서 멀리 피하여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피할 것이냐, 당장에 처형할 것이로되 敵勢가 또한 급하니 우선 功을 세우게 하리라 하였다.
     
      그래서 두 배가 앞서나가자 敵將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2척에 지시하여 일시에 安衛의 배에 개미가 붙듯이 서로 먼저 올라가려 하니 安衛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죽을 힘을 다하여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 창으로, 혹은 水磨石 덩어리로 무수히 마구 쳐대다가 배 위의 사람들이 거의 기진맥진하므로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 들어가 빗발치듯 마구 쏘아댔다. 적선 3척이 거의 다 엎어지고 쓰러졌을 때 鹿島萬戶 송여종과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들이 뒤따라 와서 힘을 합해 적을 사살하니 몸을 움직이는 적은 하나도 없었다.
     
      투항한 倭人 俊沙는 안골포(지금 진해시 안골동)의 적진으로부터 항복해 온 자인데 내 배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더니 말하기를,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저 자가 바로 안골포 敵陣의 적장 마다시요라고 했다. 내가 無上(물긷는 군사)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뱃머리에 낚아 올린 즉, 俊沙가 좋아 날뛰면서 바로 마다시라고 말하므로 곧 명하여 토막토막 자르게 하니, 적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이때 우리 배들은 적이 다시 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북을 울리며 일제히 진격하여 地字, 玄字 포를 쏘아대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퍼부어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은 퇴각하여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우리 수군은 싸웠던 바다에 그대로 묵고 싶었으나 물결이 몹시 험하고 바람도 역풍인 데다가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로 옮겨 가서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실로 天幸 이었다>(朴惠一 외 3명이 쓴 「李舜臣의 日記」에서 인용. 서울대학교 출판부)

    김부식의 명작 '삼국사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책 한 권을 꼽으라고 한다면 고려 仁宗시대의 權臣이기도 했던 金富軾(김부식)이 쓴 三國史記일 것이다. 이 책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약 1000년간의 역사는 암흑속으로, 또는 안개속으로 들어가버린다. 이 중요한 三國史記는 申采浩 같은 사람들에 의해 反민족적·사대주의적 관점에서 신라중심으로 쓰여졌다는 오해와 비판을 받아왔다. 기자도 이런 그릇된 주장에 영향을 받아 나이 50 가까이 되어서야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글을 써서 먹고사는 직업인으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서양의 문필가가 성경을 나이 50에 읽는 것과 같지 않을까)
     
      늦게 읽은 만큼 감동은 컸다. 正史답게 당대의 최고 지식인이 正色을 하고 쓴 책이기 때문이다. 삼국과 통일신라를 중심에 놓고 자주적인 관점에서 쓰여진 三國史記는 뒤에 나온 또 다른 正史 高麗史에 비해서 월등한 주체성을 띠고 있다. 기자는 三國史記의 가장 중요한 대목인 신라통일기의 역사를 읽으면서 통일 주체세력들의 숨소리와 민중의 鼓動을 듣는 것 같았다. 통일 3傑-金春秋, 金庾信, 文武王의 경륜과 전략, 화랑도 출?장수들의 장렬한 삶과 죽음. 이들이 펼치는 드라마와 人間像은 우리 역사에서 그 뒤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1945년 이후 현재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드라마가 언젠가는 우리 민족사의 두번째 황금기로서 이 시기와 비견될 것이다)
     
      로마시대·중국 戰國시대·일본 명치유신 시대의 영웅들을 연상시키는 신라통일기의 主役들 특히 그들의 집념, 명예심, 자주성, 국제적 視覺, 武人으로서의 교양은 『아 이런 분들이있었기에 신라가 唐을 이용하고 또 唐과 맞서 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오늘의 대한민국과 나를 존재하게 했구나』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그 가운데서도 列傳 부분의 金庾信傳에 명문이 많다.
      <적국이 무도하여 이리와 범이 되어 우리나라를 침요하니 편안할 날이 없습니다. 저는 신라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면 마음과 疸이 아프므로 어른께서는 저의 정성을 민망히 여기시어 方術을 가르쳐주십시오>(17세 때 석굴에 들어가 기도할 때 나타난 難勝이란 도사에게 金庾信이 하는 말)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움을 당하여 자신을 구원하지 않겠습니까>(백제를 멸망시킨 후 唐이 신라까지 칠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이뤄진 御前회의에서 金庾信의 발언)
     
      이런 金庾信의 決戰의지에 꺾인 唐의 원정군사령관 蘇定方은 그냥 돌아간다. 唐 고종은 그를 위로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三國史記 김유신 열전 부분은 전하고 있다.
     
      <고종: 『어찌하여 新羅마저 정벌하지 아니하였는가?』蘇定方: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는 충의로써 나라를 받들고, 아래사람들은 그 윗사람을 父兄과 같이 섬기므로 비록 나라는 작더라도 가히 도모하기 어려워 정벌하지 못하였습니다』>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애국심과 義理로써 똘똘 뭉친 나라 - 이것이 新羅가 삼국통일을 하고 唐과 맞서 自我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요사이 式으로 번역하면 「대통령과 정치인과 국민들이 단결한 나라이므로 大國의 힘을 믿고서 밀어붙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란 뜻이다.
     
      <무릇 장수가 된 자는 나라의 干城이요 임금의 爪牙(조아·어금니)로서 승부의 결단을 矢石(화살과 돌)가운데서 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위로는 天道를 얻고 가운데로는 人心을 얻은 후에라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충절과 신의로써 살아 있고 백제는 오만으로써 망했고 고구려는 교만으로써 위태하다. 지금 우리의 곧음으로써 저들의 굽은 곳을 친다면 뜻대로 될 것이다>(당과 함께 고구려를 치기 위해서 떠나는 김흠순, 김인문 두 장군에게 김유신이 충고하는 내용)
     
      <신의 우매함과 불초함으로 어찌 국가에 이익이 되었겠습니까. 다행히 밝으신 성상께서 의심치 않고 맡겨서 변함이 없었기에 조그만 공을 이루어 三韓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은 두마음이 없으니 비록 태평에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할지나 또한 小康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이 보건대 예로부터 계승하는 임금이 처음은 잘하지 않는 이가 없지만 끝까지 다하는 일이 적어 累代의 공적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니 매우 통탄할 일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守成 또한 어렵다는 것을 염려하시어 小人을 멀리 하고 君子를 가까이 하십시오. 조정은 위에서 화평하고 백성은 아래에서 안정되어 재앙과 난리를 만들지 않고 국가의 基業이 무궁하게 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병문안 온 文武王에게 남긴 김유신의 유언)
     
      <아내에게는 三從의 의리가 있는데 지금 홀로 되었으니 마땅히 자식을 따라야 할 것이나 元述 같은 자는 이미 先君(注-김유신을 지칭)의 자식 노릇을 못하였는데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되겠는가>(패전하고 돌아온 金庾信의 차남 원술이 아버지가 죽은 뒤에 어머니를 찾아왔는데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면서 만나주지 않았다)
     
      金庾信의 큰 권모술수
     
      삼국사기를 통해서 기자가 만난 인물이 金庾信이다. 兵權을 쥔 제2인자로서 수십년간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모시고 統一大業에 精進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1인자인 왕과 병권을 쥔 2인자가 이렇게 오랫동안 共存한 예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발견하기 힘들다. 1인자가 군대를 장악한 2인자를 의심하는 순간 2인자의 운명은 刑場이거나 쿠데타에 의한 역습이다. 金庾信은 至誠으로 1인자를, 왕들은 존경으로 그를 대했다. 金富軾은 金庾信傳의 결론부분에서 이렇게 평했다.
     
      <신라에서 유신을 대함은 친근하여 틈이 없었고 맡겨서 변함이 없었고 꾀를 쓰려 할 때 이를 들어줌으로써 부리지 않는다고 원망을 하지 않게 하였다>
     
      부리는 왕과 부림을 받는 金庾信 사이의 이런 신뢰관계가 과연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金庾信은 꾀를 부려 누이 문희를 金春秋에게 시집보냈고 金春秋와 그 누이한테서 난 딸을 아내로 맞았다(당시는 近親결혼 풍습이 있었다). 문무왕은 金庾信의 여동생의 아들, 즉 생질이기도 했다. 신라에 정복당한 가야왕실의 후손인 金庾信은 이런 혈연관계를 통해서 신라왕족과 두 王의 安心을 산 뒤 자신의 야망-삼국통일을 해낸 것이리라. 권모술수와 전략전술을 겸비한 金庾信이야말로 정치군인의 한 典型이겠다.
     
      「전쟁은 군인에게 맡기기엔 너무 큰 일이다」는 말(클레망소)이 있듯이 金庾信이 순수한 군인이었다면 삼국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金庾信은 권모술수에 통달하되 그것을 개인의 영달이나 집권이 아닌 민족통일국가 건설이란 보다 큰 차원의 명제로 승화시킨 대인물이다. 그래서 기자는 그를 「한민족을 만든 민족사 제1인물」로 定義하는 것이다.
     
      요사이 金泰榮 국방장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의외로 높다. 천안함 사태 직후 혼란스럽던 상황을 '국가안보 차원의 중대 사태'라고 정확하게 定義하고 그 방향으로 나라를 끌고 간 영웅이란 칭찬도 들린다. '저런 사람이 차기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있다. 문제는 新羅처럼 대한민국이 김태영 장관을 金庾信처럼 쓸 수 있는 안목과 지략이 있는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