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 당진군 석문면 교로리 도비도 선착장에서 북서쪽으로 9㎞가량 떨어진 아산만 한가운데의 작은 섬 소난지도.
    바다낚시와 갯벌 체험을 즐기려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잦은 이곳에는 외지인의 호기심을 자아내는 게 있다.
    섬의 동쪽 해안에서 좀 떨어진 야트막한 언덕 아래 배의 돛대 모양으로 20m 가까이 우뚝 솟은 흰색 기념탑과 그 아래 청동으로 주조된 옛 군인의 전투장면 조각이 그것.
    또 기념탑에서 동쪽으로 100m가량 떨어진 '둠바벌'이란 바닷가에 있는, 흡사 왕릉을 연상시키는 높이 3m가량의 대형 봉분과 비석도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풍긴다.
    그렇다. 이곳이 바로 대한제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1905년부터 3년여간 섬을 근거지로 일제에 항전하다 100명이 넘는 의병이 산화해간 소난지도 의병항쟁의 성지다.
    100여 년 전 이 섬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소난지도 의병항쟁은 구전으로만 내려올 뿐이었다. 그러다가 실증연구를 통해 학계에 보고된 것은 2003년 11월.
    당시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가 '당진 소난지도 의병의 역사적 재조명'이라는 주제의 학술대회를 개최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충남대 국사학과 김상기 교수의 논문 '당진 소난지도 의병항전'과 당진군 석문중학교 신양웅 교장의 '증언을 통해 본 소난지도 의병항쟁'이라는 주제발표문에는 이 의병항쟁의 전모가 생생하게 실려 있다. 신 교장은 향토사학자로 소난지도 의병총의 존재와 의미를 세상에 처음 알렸다.
    이들이 말한 바로는 소난지도 의병항쟁은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 의병 수백명이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해 이 섬에 주둔하며 일제와 항쟁을 벌이다 1908년 3월 일본 경찰대의 기습공격으로 100여명이 전몰한 사건으로 요약된다.
    면적 2.63㎢에 현재 40여 가구, 60여명의 주민이 사는 소난지도는 조선시대 전라도의 세곡을 서울 경창으로 실어 나르던 조운선이 태풍을 피해 기항하던 곳이었다.
    이런 지형적 여건으로 1901년부터 해적을 의미하는 소위 '수적(水賊)'들의 약탈활동이 문서로도 보고돼 있다.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해 일어선 의병들이 일본군의 '초토화 작전'에 밀려 패퇴하고서 일부가 소난지도로 이동, 이들 수적을 의병으로 끌어들이면서 이 섬이 일종의 '유격전' 근거지가 됐다.
    이때부터 소난지도를 근거지로 한 의병들이 인근 당진과 서산, 태안 등 충청도는 물론, 화성과 수원 등 경기도 지역 해상까지 이동하면서 항쟁을 벌였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뭍에서 불과 10㎞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 섬이 의병들의 항구적인 은신처가 될 수는 없었다.
    소난지도가 의병 근거지라는 사실을 확인한 일본군과 경찰이 섬을 습격하면서 이 섬에서는 1906년 8월24일과 1908년 3월15일 등 2차례에 걸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906년의 전투는 당진의 기지시에서 봉기한 의병장 최구현이 주도했다.
    무과에 급제해 군부 참서관을 지내다 을사늑약후 사직한 그는 고향인 당진으로 낙향해 370여명의 의병을 모아 1906년 5월 면천성 공격에 나섰으나 패배했다.
    살아남은 의병 36명과 함께 소난지도로 들어간 그는 이미 이 섬에 근거를 두고 있던 50여명의 의병과 합류했다.
    하지만, 이들 의병은 같은 해 8월24일 일본수비대와 관군 공격에 큰 타격을 받았고, 최구현 의병장도 붙잡혀 심한 고문을 받은 끝에 그해 12월 숨졌다.
    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것은 1908년 3월15일. 경기도 수원에서 봉기한 의병장 홍원식이 이끌던 의병 100여명이 머물던 이 섬에 이날 새벽 일본 경찰대가 들이닥쳤다.
    일제의 홍주경찰분서장이 경무국장에게 보고한 '폭도토벌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인 순사 6명과 한인 순사 8명 등 모두 14명으로 구성된 일본 경찰대가 이날 새벽 배를 타고 섬을 습격했다.
    보고서는 홍원식 대장과 박원석 선봉장 등 모두 41명이 전사하고 9명이 부상한 채 체포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목격자들은 바다에 투신해 숨진 의병도 50여명에 달한다고 증언해 100여명이 몰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홍원식 대장은 체포되지 않고 숨어 지내다 섬을 빠져나가 경기도 수원과 화성 일대에서 의병항쟁과 독립운동을 계속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목격자들은 "온 종일 총소리가 콩 볶는 듯했고, 피맺힌 절규와 비명이 진동했으며 화약 연기가 온 섬을 뒤덮었다"면서 "격전지 맞은편인 교로리와 삼길포에서는 의병들의 시신이 어부들의 그물에 걸려 올려지기도 했다"고 처참한 상황을 증언했다.
    홍원식 의병대의 몰살로 소난지도를 근거지로 한 의병항쟁은 사실상 막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1910년 5월까지 당진 등 인근 지역에서 몇 차례의 의병전투 기록이 남아 있지만, 규모가 작았고, 그해 8월 한일 강제병탄 이후에는 이마저도 사라졌다.
    전설처럼 구전되던 이들 의병의 피맺힌 항쟁사가 조명을 받게 된 것은 1970년대 들어서다.
    1908년 당시 섬 주민들이 의병들의 시신을 묻고 봉분을 세워 의병총을 조성했지만 오랜 세월 방치되면서 바닷물에 씻겨 (봉분이) 없어지고 유골이 나뒹굴었다.
    의병총이 훼손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인근 석문중학교 관계자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1972년 현지 확인을 거쳐 이듬해 봉분을 새로 만드는 등 보수와 정화작업을 벌였다. 1982년에는 교사와 학생들이 모은 성금 등으로 의병총비를 건립했다. 1997년 5월에는 소난지도 의병항쟁기념사업회가 발족해 매년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2008년에는 당진군이 5억원을 들여 의병항쟁 추모탑을 건립하고 묘역을 정비, 지난해 9월 국가보훈처로부터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석문중 신양웅 교장은 "소난지도 의병총은 일본 경찰의 기습공격에 맞서 육탄전으로 대항하며 최후의 한 사람까지 장렬하게 산화한 의병들의 무덤"이라며 "섬을 근거로 외세에 끝까지 항거했다는 점에서 고려말 몽골에 저항했던 '삼별초'에 비견될 '한말의 삼별초'"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