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제폐하의 소명을 받들기 위해 흥복헌(興福軒)에서 예알(禮謁)하고, 칙어(勅語)를 받드사 전권위임장을 받아 곧장 통감부(統監府)로 가서 데라우치 통감과 회견하여 일한합병조약에 상호조인하고, 동 위임장을 궁내부(宮內府)에 환납하다'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이 체결된 1910년 8월22일 이완용은 자신의 일대기인 일당기사(一堂紀事)에 이날의 일을 이렇게 적었다.
    그가 담담하게 적은 이날 일기에는 한일강제병합과 직접 관련이 있는 역사적인 장소 두 곳이 등장한다.
    총리대신 이완용과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한 통감부와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린 창덕궁 흥복헌이 그곳이다. 100년 전 치욕의 역사가 펼쳐진 두 곳은 오늘날 어떻게 변했을까.

    ◇소공원으로 변한 경술국치의 현장 = 이완용은 자신이 조약을 체결한 장소조차 정확하게 기재하지 않았다. 그는 '통감부로 가서'라고 적었지만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장소는 조선통감의 처소인 통감관저가 맞다.
    1922년 조선출판협회가 펴낸 '조선병합십년사'에는 '이수상(이완용)은 동일 오후 4시 통감저(統監邸)에서 데라우치 통감과 회동하여 좌기 조약을 체결하였더라'라고 기록돼 있다.
    1920년 8월29일 한일병합 10주년을 맞아 동아일보가 보도한 사진의 설명문에도 '사진은 일한합병 조약에 양국 편에서 도장을 찍던 곳이니 지금 총독관저 안에 있는 처소이오'라고 적혀있다.
    통감관저는 한일강제병합 이후 총독관저로 전환됐고 경복궁 뒤편에 새 총독관저가 들어서자 역대 통감과 총독의 업적을 기리는 공간인 시정기념관(始政記念館)으로 바뀌었다.
    광복 후 이 건물은 국립민족박물관과 국립박물관(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남산분관, 연합참모본부 청사로 사용되다 철거됐는데 정확한 철거시기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통감관저가 정확한 위치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세인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지다 2006년에야 그 자리가 확인됐다.
    일제는 1936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 주한공사를 지낸 하야시 곤스케(林權助·1860~1939)의 업적을 기려 통감관저 앞뜰에 그의 동상을 세웠는데, 2006년 서울 중구 예장동 2-1번지의 잔디밭에서 '남작하야시곤스케군상(男爵林權助君像)'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하야시 동상 좌대의 판석 석 점이 발견된 것이다.
    하야시 동상 석재의 일부가 발견된 잔디밭은 현재 소방방재본부에서 서울유스호스텔로 이어지는 숲 안의 '다목적 광장'으로 벤치 몇 개와 농구대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대화재로 불탄 흥복헌 = 흥복헌(興福軒)은 창덕궁 대조전의 부속건물로 본래 상궁들이 사용하던 건물이다. '널리 복을 부른다'는 이 건물에서 500년을 이어온 조선왕조는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었다.
    이완용이 통감관저로 달려가기 3시간 전 열린 회의의 안건은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한일병합조약 체결에 관한 전권을 위임한다는 것이었다.
    이날 회의는 총리대신 이완용과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법무대신 이재곤, 내부대신 박제순 등이 참석했으며 고작 1시간 만에 끝났다.
    마지막까지 저항한 사람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순종효황후였다.
    병풍 뒤에 숨어 어전회의를 엿듣던 그는 순종이 이완용에게 전권을 위임하려 하자 국새를 치마폭에 감추고 내놓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숙부 윤덕영에게 국새를 빼앗기고 만다.
    7년 뒤인 1917년 창덕궁은 대화재에 휩싸인다. 흥복헌도 이때 완전히 불에 타 사라졌다. 일제는 창덕궁을 복구한다며 경복궁의 전각을 뜯어내고 그 목재로 창덕궁을 재건했는데 이때 복원된 흥복헌이 지금 서 있는 건물이다.
    1926년 4월26일 순종이 재건한 흥복헌에서 숨을 거두면서 이 건물은 또 한번 조선의 마지막 장면과 인연을 맺게 됐다.
    ◇3·1만세 현장이 된 이완용의 집 = 본래 이완용의 집은 지금의 서울 중구 중림동 일대인 약현(藥峴)에 있었으나 1907년 고종 퇴위에 분노한 민중의 습격으로 불타버렸다.
    집을 잃은 이완용은 남산 일대를 전전하다 망국 직후인 1911년 초 재빨리 이문동(지금의 인사동)의 순화궁터를 차지했다.
    순화궁은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의 처소다. 1907년 6월 경빈 김씨가 세상을 뜨자 이완용의 형인 이윤용에게 넘어갔고, 이완용이 이를 사들였다.
    1913년 이완용이 옥인동에 대저택을 지어 이사하고나서 순화궁터에 지은 건물은 태화관이라는 여관으로 바뀌었다. 태화관은 다시 1년 만에 여관에서 요릿집으로 용도가 변경됐으며 1917년 당시 유명 요정이었던 명월관의 지점이 됐다.
    왕실의 건물에서 일개 기생집으로 전락한 순화궁은 1919년 3월1일 다시 한번 역사의 현장이 됐다.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것.
    나라를 팔아넘긴 매국노의 집이자 민족대표가 망국의 부활을 선언한 장소인 이곳에는 현재 '삼일독립선언유적지'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아이러니하게 3·1운동 당시에도 태화관의 주인은 이완용이었다. 하지만 이완용은 자신이 소유한 건물이 3·1만세 사건의 주무대가 된 사실이 부담스러웠는지 1920년 이 건물을 기독교 남감리회 여선교부에 매각했다.
    남감리회는 1937년 기존 건물을 모두 철거하고 태화여자관을 신축했는데 이마저도 1980년 도심재개발계획에 따라 헐렸으며, 지금은 그 자리에 12층짜리 태화빌딩이 들어서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