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 이후, 지난 150여 년은 칼 마르크스의 시대였다. 흥하는 자가 약자를 착취한다는 그의 자본주의 모순관이 인류의 이념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의 신 자본주의관은 “흥하는 이웃이 많아야 나도 흥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은 흥하는 이웃을 양산하는 과정이며 모두가 흥하는 자를 무임승차하여 ‘착취’함으로써 발전한다. 그래서 흥하는 이웃이 있어야만 나도 흥할 수 있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모순관은 세상의 발전이치를 거꾸로 본 것이다.

  • ▲ 좌승희 박사 ⓒ 뉴데일리
    ▲ 좌승희 박사 ⓒ 뉴데일리

    자본주의 경제의 지속가능한 발전은 흥하는 이웃을 양산하는 체제를 갖출 때라야 만 가능해 진다. 발전은 흥하는 이웃을 키우는 과정이다. 경제발전, 산업발전, 국토 및 지역발전을 이루는 일 그래서 지속가능한 선진부국이 되는 길, 모두 흥하는 이웃을 만들어 내는 길로 통한다.
    흥하는 이웃을 넘치게 하려면 흥하고 잘 되는 이웃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국가의 시책도 이에 맡게 흥하는 국민을 홀대해서는 안된다. 모든 국민이 흥하는 길로 내달릴 수 있도록 길을 크게 열어야 한다.

    1. 이념과 경제발전

    1) 좋은 이념, 민주주의 평등이념과 온정주의가 만들어 낸 경제위기
    지난해 미국의 주택금융위기에서 촉발된 세계금융위기를 놓고 금융위기의 원인이 무엇이며,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인지, 나아가 전 세계의 경제운영패러다임에 일대 전환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한 너무나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논쟁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이번의 금융위기는 그 동안 세계 경제운영의 중심적 패러다임이라고 받아 들여져 온 “시장 우위”, “작은 정부”로 상징되는 하이에크에 의해 주창된 소위 신자유주의 이념 하에서 추진해온 규제완화정책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규제완화가 금융부문에서 과도하게 추진된 결과 주택금융의 과다공급과 주택금융에 기초한 파생상품에 대한 규제실패를 가져옴으로써 작금의 금융위기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정부의 역할을 보다 강화하고 특히 금융부문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야 하며, 위기에 대처함에 있어서도 정부재정지출 확대와 저금리하의 적극적인 통화공급정책 등이 강조되고 있다. 재정지출의 증대를 통한 정부개입확대를 주장함으로써 소위 “큰 정부”로 상징되는 케인즈적 경제운영 패러다임의 부활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그동안 미국의 주택금융위기의 원인에 대한 주류 견해는 주택시장의 버블이 그 원인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판단으로는 “버블이론”은 일종의 동어반복이론으로 사태의 진행과정을 설명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 근본원인을 규명하지는 못한다.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버블이론이란 어느 날 어느 한 지역에서 누군가가 “앞으로 주택가격이 상승할 것이다”라고 소리를 지르자 여기저기서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온 나라가 결국 다 미친 듯이 주택가격이 상승할 것이라 소리 지르면서 집사는데 나섬으로써 주택가격이 과도하게 상승하고, 주택금융이 과도하게 공급되어 부실 금융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택시장과 주택금융시장의 버블을 초래한 근본원인, 즉 왜 사람들이 주택가격이 계속 오르고 주택금융은 계속 공급될 것이라고 믿게 되었는가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이 이론은 동어반복에 그치고 말게 된다. 물론 버블이론은 금융규제의 완화, FRB(미국중앙은행)의 저금리 정책, 글로벌 호황, 글로벌 불균형을 초래하는 중국의 대미무역흑자의 미국 주택금융시장 유입, 월스트리트의 탐욕 등이 버블을 초래한 원인이라고 하고 있지만, 이러한 것들마저도 실상은 어떤 더 근본적인 원인의 결과이지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이 화재가 인공발화인지, 그럼 방화범이 누구인지, 아니면 자연발화인지를 규명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규명 없이 화재를 키운 바람(규제완화, 금리인하 등)이나 화재현장에서 불장난을 하던 자(월스트리트 금융인들), 혹은 화재로 오히려 피해를 본 사람들(개인 주택거래자나 금융기관들)이 화재에 책임이 있다고 책임지라고 하는 형국이 아닐 수 없다.
    왜 미국 주택 및 주택금융시장 참여자들이 모두다 한꺼번에 집단최면에 빠지게 되었는가? 진정한 방화범은 누구인가? 필자는 미국 민주주의의 오래된 평등이념인 “모든 국민의 자가 주택 보유”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이 이 모든 버블의 진정한 원인이라고 본다.2) 미국의 저소득층을 위한 다양한 주택정책의 목표는 ‘자가 주택 소유를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 이라고 간주하는 이념적인 토대위에서 설정되었으며 대공황 이후 미국의 주택정책의 목표는 줄곧 ‘주택소유’였다. 물론, 시기별로 주거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초점을 맞춘 공공임대주택 공급정책이 강조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주택소유를 보다 적극적으로 실현할 목적으로 정책이 강조되기도 하였지만 주택정책의 기저에는 ‘주택보유’라는 이념이 크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주택소유는 정당의 성격을 초월하여 주택정책이 지향할 ‘최고의 목표’로 간주되고 홍보되었다.3) 이처럼, 미국의 주택정책, 특히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정책은 자가 주택 보유라는 이념의 실현과정이었다.
    이러한 이념적 토대위에서 만들어진 주택금융제도는 공화당이나 민주당에 관계없이 가능한 한 저소득계층의 주택보유를 장려하는 방향으로, 주택금융감독에 있어서도 강화보다는 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특히 필자의 판단으로는 1993년 자가주택보유확대를 정치적 슬로건으로 집권한 클린턴정부가 낙후지역의 발전과 저소득층의 주택보유 확대를 목적으로 하는 소위 지역재투자법(Community Reinvestment Act)을 1995년부터 개정·강화하면서부터 자가 주택 보유가 급속도로 늘고 주택시장의 버블이 쌓이기 시작하였다. 주택금융제도, 금리정책, 파생상품제도 및 규제정책 등이 정치적 이념에 따라 주택금융을 보다 용이하게 하는 방향으로 전환되면서 주택금융시장 참가자들의 행동 또한 이에 부화뇌동하는 방향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결국 방화의 주범은 모든 국민의 자가 주택 보유라는 미국 민주주의의 평등이념인 셈이다. 이 이념에 따라 미국의회와 대통령이 법을 만들고 이에 따라 중앙은행, 주택금융공사, 금융기관, 개인들이 움직인 결과가 바로 주택금융위기이다.
    개인의 자가 주택 보유 여부는 궁극적으로 개인의 신용도에 따라 시장이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이러한 시장의 기능을 존중하기 보다는 의회, 정부, 중앙은행 등 금융감독당국들이 저소득층에 대한 주택대출 확대라는 목적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금융의 건전성 감독을 소홀하게 하거나 완화하면서 과도한 주택금융대출이 초래된 것이다. 따라서 이는 정부의 실패 때문이지 시장의 실패라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시장이란 진공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만들어내는 각종의 시장경기규칙(rules of the game)의 집합으로서 국가가 어떠한 법령으로 시장을 규율하느냐에 따라 그 효율성이나 성과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미국의 주택금융위기는 정부에 의해 도입된, 모든 국민들에게 자가 주택 보유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각종 잘못된 금융경기규칙이 가져온 결과로서 정부실패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국 민주주의의 과도한 온정주의가 가져온 결과이다. 모두가 자가 주택을 보유해야만 한다는 좋은 이념이 결국 경제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2) 이념이 경제성과를 결정한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세계 각국의 경제정책은 경제이론 보다는 이념에 의해 주도되었다. 1953년 밀튼 프리드만은 이제 이념적 차이보다는 오직 경제논리에 의해 경제정책이 주도되는 시대가 되었다고 선언하였지만4) 지난 50여 년은 문자그대로 이념이 경제정책을 지배하는 시대였다. 2차 대전 이후의 동서진영의 경제체제의 차이나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 국의 좌·우파 정당간의 경제정책의 차이는 경제이론보다는 서로 다른 이념적 성향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오늘날 세계금융위기의 도화선이 된 주택금융위기도 “전 국민에 자가 주택을 공급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평등이념의 산물이다.
    그런데 이념은 하나의 믿음으로서 세상을 보는 관점, 즉 세계관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념은 과학이나 학문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이상적인 세상에 대한 믿음의 표현으로 과학적 검증의 영역을 벗어난다. 모든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이념을 가지고 산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들의 이념이 모여 조직이나 사회의 집단적인 이념이 된다. 특정 이념이 사회의 공통된 이념화되면 그 사회의 공통적인 가치나 문화로 정착되기도 한다.
    이렇게 집단화되는 이념은 그 자체가 사회의 비공식적인 행동규칙화 되면서 일반 국민들의 경제사회활동에 제약으로 작용한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사회가 원치 않은 행동을 지속하면서 같이 더불어 살 수는 없기 때문에 집단적 이념은 비공식적인 시장경기규칙의 역할을 하게 된다. 나아가 집단적 이념은 정치과정을 통해 실제 그 사회의 공식적 시장경기규칙인 헌법, 법률, 규칙 등으로 전환되게 된다. 정당의 정강은 바로 그 정당의 이념의 표현이며, 국가의 이념은 헌법과 법률로  공식화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념은 많은 경우 경제논리를 압도한다. 때에 따라 경제논리마저 특정 이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진다. 따라서 한 사회의 이념이 잘못되면 그 사회의 공식·비공식적 시장경기규칙이 잘못되고 국민들의 경제적 행태도 잘못된 방향으로 왜곡되고 경제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 잘못된 이념은 잘못된 생각, 잘못된 정책을 잉태하게 되며, 나아가 정치인, 정치지도자 혹은 국가 지도자가 잘못된 이념을 가지게 되는 경우는 자신은 물론 남과 더 나아가 경제사회 전체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게 된다.

    3) 좋은 이념보다 옳은 이념이 중요하다.
    그러면 옳은 이념과 그른 이념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세계관으로서의 이념은 세상의 이치, 즉 세상의 변화원리에 대한 믿음으로서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는 이상의 표현이지만 결국 그 옳고 그름은 현실 세상과의 적합성 여부에 의해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의 변화원리가 이러저러한데 반대로 저러이러한 이념을 가지고 있다면 그 이념은 틀린 이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좋은 이념이라 해서 옳은 이념이라 할 수도 없다.
    사람들은 대게 좋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꾼다. 그리고 이러한 꿈을 이념화하여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이러한 좋고 아름다운 이념이 현실의 세상이치와 안 맞으면 어떻게 될까? 현실 속의 수많은 대중들이 바로 희생양이 된다. 현실과 동 떨어진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즉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위해 헛수고를 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일반 대중이며 이들이야 말로 피해자가 된다. 예컨대 모든 사람이 경제적으로 동등하며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하는 좋은 이념도 그것이 현실적합성이 없다면 그른 이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과 충돌하는 그른 이념은 많은 보통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규칙과 정책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그 만큼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좋고 아름다운, 이상적인 이념보다 “옳은 이념”이 중요해 진다. 따라서 세상의 이치, 즉 “진리”를 제대로 찾는 노력이 없이 단순히 이상적인 꿈을 이념화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결국 어떠한 이념, 세계관이든 복잡한 세상의 현실을 수용하지 못하면 그 이상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결국은 그른 이념, 세계관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사회주의, 공산주의의 경제적 평등의 이념이 한때 좋은 이념으로 보였지만 현실 적합성의 결여로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 것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또한 21세기 민주주의가 앞으로 국민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아무리 좋은 경제적 이념을 내건다하더라도 그 이념이 현실 경제의 이치를 수용하지 못한다면 결국은 진화의 경쟁에서 도태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민주주의가 경제적으로 국민을 위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한계를 찾아내는 일이 향후 민주주의의 존속과 번영을 위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