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민중극단 '6.25전쟁과 이승만'의 이승만 役 배우 박기산 ⓒ 뉴데일리
    ▲ 민중극단 '6.25전쟁과 이승만'의 이승만 役 배우 박기산 ⓒ 뉴데일리

    “일생 조국 광복을 위해 고군분투 한 분을 어쩜 그리도 덧칠해놨나 생각하면 화가 나요”

    다섯 누나와 여동생 하나. 8남매 중 그야말로 ‘귀한 외아들’이었다. 전라남도 법성포에서 중학교 3학년에 서울로 유학 온 그는 양정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우연한 기회에 연극부에 들어가게 됐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편의 연극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다. 1975년, 배우 추상미의 아버지이자, 연극 배우였던 故 추송옹이 연기한 ‘보이체스’를 보고 큰 감동을 느낀다. 그렇게, 꿈 많던 17살의 소년은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서울로 오기 전, 그는 육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부모님의 기대도 대단했다. 그랬기에 배우가 되고 싶다 이야기 하는 그를 세 번이나 고향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결코 배우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고등학교시절 청소년 연극제인 ‘동랑’에서 2회에 걸쳐 우수연기상을 수상한 그는 졸업 후 바로 민중극단에 입단하게 된다. 79년, 배우로서의 첫 걸음이 시작됐다. 이후 극단 생활을 하며 본격적인 연기공부를 위해 서울예전 연극과를 졸업한 그는 지금까지 31년이란 세월을 연기 하나에 미쳐 살고 있다.

  • ▲ 연극 '6.25와 이승만' 공연장면 ⓒ 뉴데일리
    ▲ 연극 '6.25와 이승만' 공연장면 ⓒ 뉴데일리

    배우 박기산. 대학로 예술극장 근처에서 만난 그는 연기를 사랑하는, 또한 세상을 향한 가슴 뜨거움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1995년 서울연극제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한 그는 ‘민중극단’의 대표와 한국연극배우협회 이사를 역임했다. 다만, 그의 프로필을 보기 전까지는 몰랐던 사실. 결코 스스로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 겸손한 배우다. 자신의 이야기보다 선배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세상을 이야기 할 때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지는 이다.

    “‘민중극단’ 추송옹 선생님께 직접 연기를 배웠어요. 제 인생의 선생님이셨죠. 예전에 저희 극단에서 ‘우리 식구는 아무도 못 말려’의 배우를 모집할 때는 200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어요. 지금은 잊혀져 가고 있지만, 당시에 인기는 대단했다니까요(웃음)”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역시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당시, 송승환과 하희라가 각각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분했고, 자신은 로렌스 신부 역을 맡았다. 이후 ‘난타’로 이어진 그와의 만남이 그곳에서 시작됐다.

    그동안 ‘아가씨와 건달들’, ‘쿠데타’, ‘아마데우스’, ‘갈매기’ 등 40여편의 작품에 참여했다. 편수로는 많지 않지만, 대부분 앵콜 공연으로 이어졌기에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또한, 영화 ‘쉬리’와 ‘한반도’, ‘식객’ 등을 통해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였다.

    특히, 그가 ‘형’이라 부르는 송승환 제작의 ‘난타’는 3년의 시간을 쏟아냈다. 수많은 외국을 돌아다니며 박수를 받았지만, 마음 한 구석 정극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점점 커져만 갔다. “정극이 너무 하고 싶었어요. 연극 무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죠. 그래서 다시 대학로 돌아왔어요.”

  • ▲ 연극 '6.25와 이승만' 포스터 ⓒ 뉴데일리
    ▲ 연극 '6.25와 이승만' 포스터 ⓒ 뉴데일리

    최근 연극 ‘6.25전쟁과 이승만’을 통해 제대로 된 정극을 선보이고 있는 그는 자신의 나이보다 20살이 훌쩍 넘는 故 이승만 대통령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다. 무대 위 그는 완벽한 이승만 대통령 그 자체였다. 올곧은 성품에 따른 강단과 자상한 면모가 공존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과 그는 실제로도 꼭 닮아있다.

    78세의 이승만 대통령의 역을 하기에 힘든 점은 없었을까. “실제보다 나이가 많은 역할이다 보니 육체적으로 힘든 부분은 있지만, 연기자로서 훌륭한 분을 연기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영광이죠.”

    연극의 80 퍼센트 이상의 그의 역량으로 끌어나가야 하는 작품. 엄청난 대사량을 소화하는 그의 모습에 연극을 보는 내내 탄성이 절로 나온다. “CD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의 육성을 직접 듣고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연구했어요. 어미가 특징적이죠. 다만, 2시간 내내 같은 톤으로 연기하면 몰입도가 떨어지니까 중간중간 그 포인트를 살려 연기했어요”

    연극을 위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공부하기 전까지는 그저 독립운동가라는 사실 밖에 깊은 것을 알지 못했다고 말하는 그의 눈시울이 금새 불거지기 시작한다. 왜 일까. 그를 그토록 뜨겁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맥아더 장군의 회고록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했다는 고백이 나와요. 정말 대단한 분이셨죠. 이분이 없었다면 지금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거예요. 일생을 조국 광복을 위해 고군분투 한 분을 어쩌면 왜곡된 역사로 그리 덧칠해 놨는지 정말 화가 나요.”

    6.25 전쟁 기록에 따르면,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청년들을 ‘우리 아이들’이라 부르며 자주 직접 전선에 나갔다. 그때마다 장병들은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그의 품에 달려와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대통령직에서 스스로 물러나시고 하와이에 가신 것에 대해 ‘망명’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역사적 왜곡이에요. 당시, 독립운동을 도와줬던 하와이 교민들이 뵙고 싶다고 이곳에서 편히 쉬시라고 해서 3개월간만 들르실 목적으로 가셨는데, 결국 건강이 악화되서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숨을 거두셨죠. 그렇게 다시 오고 싶어 하셨는데…” 자꾸만 울컥이는 가슴을 참아내며 그가 다시 말을 잇는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독재자’라고만 기억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어요. 그의 실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죠. 지금이라도 그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대통령을 생각하면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아요. 일생을 조국광복과 통일국토의 꿈만 꾸며 사셨던 분이셨는데…”

    지난 3월부터는 아리랑 극단에서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추모하는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고 있다. 그곳에서 맡은 역할은 이토 히로부미. “참 나쁜 역할을 맡았어요”라며 허허 웃는다. 지금은 ‘6.25전쟁과 이승만’ 공연을 위해 1달간의 휴식에 들어갔다. 지난달까지는 계속 공연을 하다 6월부터는 이곳에 집중했다. 그리고, 다음달에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합류한다.

    그가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역시 관객들이 기뻐할 때다. 관객을 위해 존재하는 배우, 그것이 그의 정체성이다. “배우 하기 정말 잘 했어요”라고 말하는 그에게 배우는 말 그대로 ‘천직’이다.


    “뭐 대단한 배우라고 인터뷰가 이리 길어요.”

  • ▲ 배우 박기산(좌)과 김순국 기확자(우) ⓒ 뉴데일리
    ▲ 배우 박기산(좌)과 김순국 기확자(우) ⓒ 뉴데일리

    인터뷰 말미, 불쑥 김순국 기획자가 자리로 왔다. “연습 때는 정말 못했는데, 실전에는 잘 하더라고요. 다행이었죠(웃음). 역시 배우는 배우구나 싶었어요.”

    그와 박기산의 인연은 학창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양정고등학교와 서울예전의 선후배로 만난 두 사람. 지금은, 배우와 공연기획자로 만나 인연을 이어간다. “이 형 때문에 지금 이 일을 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조금만 도와달라고 하더니…” 그가 눈을 흘기지만, 또 다른 그는 가만히 웃으며 술만 홀짝인다.

    전 국립극장 기획의원을 거쳐 현재 공연과 행사 프로듀서로 활동하는 그는 대학로에서도 이름난 기획자다. ‘6.25전쟁과 이승만’을 기획하기 전까지는 그 역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에 기획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야 할지 고민도 많이 했다. 정치적 성향이 묻어나는 공연을 한다는 것에 주위 사람들의 눈초리가 신경 쓰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름을 넣길 잘했다고 느낀다. 그의 업적을 알고 난 뒤부터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게 됐다. “역사적으로 잘못 알려진 부분들을 제대로 전하는 것이 성공적인 일이라 생각해요.”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간다.

  • ▲ 연극 '6.25전쟁과 이승만'의 기획자 김순국 ⓒ 뉴데일리
    ▲ 연극 '6.25전쟁과 이승만'의 기획자 김순국 ⓒ 뉴데일리

    “오늘 이 곳에 오기 전에 다큐멘터리를 하나 봤는데, 미국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방송도 하셨더라고요. 정말, 대단한 인맥들이 있었겠구나 생각했죠. 하버드 대학과 프린스턴대 박사.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기에 그 분의 외교가 가능했을 거예요.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국내에서 홀로 외교를 펼치며 많이 외롭지는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역사를 보면, 이후에 부정부패가 발견되지 않으셨던 분은 오직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밖에 없었거든요. 가족과 친지들 모두 봉투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죠. 즉, 자신의 지휘를 즐겼다는 거예요. 하지만, 두 분은 달랐어요. 비록, 장기 집권 등 잘못된 부분도 있지만, 잘 한 부분들은 인정해 줘야 하지 않을까요”

    김구가 가슴이 뜨거웠던 민족 지도자였다면, 이승만은 세계를 아는 정치 지도자였다는게 그의 생각이다. 우리나라 경제 성장의 기틀이 된 원자력 발전소 역시 그의 외교로 이뤄낸 성과였다. 결국, 자신이 길러낸 자유민주주의 시대의 아이들로 인해 무너져 내리고 말지만 그의 지도자로서의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 되서는 안 된다. “이 나라의 99%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만들어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애국심 하나로 사셨던 분. 그는 내년에 따 다른 기획을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오늘 고등학생 4명이 공연장에 왔고, 또 초등학교 4학년생이 왔죠. 사실, 지루할 수도 있다고 공연 전에 말렸는데 기어코 보겠다고 하는거예요. 보고 난 뒤에는 ‘정말 재미있었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는 공연에 젊은이들이 많이 왔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혔다. “노인분들만 와서 공연을 관람하는 것을 절대 반대예요. 다음 공연에는 시스템을 바꾸게 될거예요. 그분들이 자신의 자녀들과, 조카, 손주들을 데려와 함께 보실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