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책임하에 명령했다. 엄숙한 主權 발동이었다"   

    1953년 6월18일 李承晩 대통령은 한국군에 명령하여 유엔군이 관리하던 포로수용소의 문을 강제로 열고 북한으로 송환되는 것을 반대하는 북한군 反共포로들을 석방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은 유엔군 초병들을 감금, 또는 무장해제시키고 反共포로 약3만 명을 풀어주었다.
     
     당시 유엔군과 공산군은 판문점에서 휴전을 위한 막바지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가장 큰 쟁점은 反共포로 처리 문제였다. 미국측은 자유의사 송환, 공산측은 무조건 송환을 요구하면서 2년간 휴전협상을 끌었다. 그 사이 戰線에선 치열한 高地戰으로 엄청난 희생이 계속되었다.
     
     李承晩이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은, 미국이 포로 문제에서 양보하고 적당히 공산군측과 합의를 본 뒤 서둘러 한국을 떠나려 한다면 한국군이 단독으로 北進하여 휴전협상을 깨겠다는 각오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李承晩의 이 도발적 조치에 경악한 것은 미국의 아이젠하워 행정부였다. 이들은 한때 李 대통령을 감금하는 쿠데타 계획까지 구상하지만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그를 제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韓美상호방위협정-한국군 20개 사단 현대화-경제원조 등의 약속을 하고 李 대통령을 달랜다. 李 대통령의 세계를 향한 도박은 韓美동맹이란 한국의 생명줄로 結實되었다. 한국군이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것은 실수가 아니라 침략자와의 싸움을 무승부로 끝낼 수 없다는 이승만의 고매한 理想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1953년 6월20일자 조선일보는 반공포로 석방을 보도하면서 이런 제목을 달았다.
     <反共韓人捕虜釋放을 完了>
     <내 責任下에 命令했다-李대통령, 重大談話를 發表>
     
     한국군 헌병사령관도 "엄숙한 主權발동. 국민은 (반공포로들을) 愛護善導하라"는 발표를 하였다.
     
     "내 책임하에 명령하였다"는 李 대통령의 선언이나 '主權발동'이란 헌병사령관의 소신은 미국의 도움으로 延命하던 국가 지휘부가 지녔던 생존에의 무서운 의지와 自主정신을 느끼게 한다. 그때와 비교할 수 없는 國力을 갖춘 오늘날 한국의 대통령과 국방장관은 천안함 폭침과 임진강 참변을 일으킨 북한군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李承晩 대통령이었다면 수시로 도발하는 북한잠수함 기지를 폭격하고, 無斷방류를 일삼는 황강댐을 폭격하여 댐을 무너뜨리는 조치를 취한 다음 세계를 향하여 "내 책임하에 폭격을 명령하였다. 국민들의 안전을 위한 엄숙한 主權의 발동이었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 ▲ 1953년 6월18일 반공포로 석방 직후 이승만대통령 담화문을 보도한 조선일보. 
    ▲ 1953년 6월18일 반공포로 석방 직후 이승만대통령 담화문을 보도한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