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연아 세계의 꽃이 되기를

    김연아 선수, 무엇으로 더 이상 찬사를 보낼 수 있을까.
    “프리마돈나” “천상의 여인” “살아있는 인간 예술 품” 세계 언론이 뿜어 낸 찬사들이다.

    과연 그렇다.
    변방에 위치 해 있던 우리나라를 세계의 중심 국가로 끌어 올리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영웅의 한 사람이다. 1980년대 공산동독 빙상의 요정 카타리나 비트가 받은 세계적 찬사 이상을 받기에 충분하다.

    더 이상의 찬사는 다른 이에게 맡기고 김연아의 쾌거를 보면서 80년대 세계 빙상피겨의 스타였던 동독의 카타리나 비트를 연상 해 본다.
    카타리나는 1984년 사라예보 올림픽, 캘거리 올림픽 2회 연속 금메달을 거머쥐었고 이보다 앞선 세계피겨선수권 대회를 휩쓸었다.
    당시 그녀에게 붙여진 별명은 “ 별나라 요정” 이었다.
    우리나라를 비롯, 세계가 그녀의 연기에 열광했다.
    그런 그녀가 1985년 한국을 방문하고 서울과 대구에서 2회 시범 경기를 가졌다.
    그 때를 살았던 사람들에겐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녀의 환상적인 연기였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스케이트 링크가 없어 태릉선수촌 실내 링크에서 경기를 가졌다.
    카타리나 비트는 같은 해 일본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를 마치고 귀로에 우리 빙상연맹의 초청으로 5 박 6일의 일정으로 방한하게 된 것이다.

    동서 냉전시대인 당시 한국과 동독은 미수교국이어서 그녀의 방한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공산국가들의 참가에 신경을 곤두 세웠던 한국으로선 좋은 기회로 여기고 초청에 온갖 노력을 다 했다.
    필자는 당시 대통령 비서실에서 근무하였는데 빙상연맹 그리고 안전기관 등 관계기관과 연락하면서 비트일행의 한국경기 성사를 위해 힘을 보탰다.

    비트의 시범 경기는 유럽 공산국가에서 한국에 선수단을 보낸 첫 기록이 되었으며 완전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방상경기 발전에 크게 촉진제가 되었다.
    비록 시범 경기였지만 인기가 절정에 이르러 암표가 5 배 이상의 가격으로 팔렸으며 일행이 묵고 있던 호텔 근처는 그녀를 보기위해 장사진을 치기도 하였다.

    비트는 귀국 후 동독의 호네커 대통령 요청으로 대통령을 면담하고 방한 중에 느꼈던 한국인상에 대해 소상히 보고하여 동독의 서울 올림픽 참가를 다른 어느 공산국가보다도 일찍이 결정하는데 크게 기여 하였다는 후문이다.

    비트는 독일 통일 후 2005년 ‘카타리나 비트 재단’을 설립하여 세계 도처에 있는 고아, 기아, 결식아를 위해 도움을 주는 사업을 하고 있다. 그녀의 재단은 주로 인도, 말레이시아, 아프리카, 등의 나라에서 어린이 돕기 운동을 펴 오고 있다.

    김연아 우리나라 빙상 피겨의 우상이다.
    더욱 발전하여 올림픽은 물론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계속 두각을 나타내어 후배들에게 큰 희망을 주는 등불이 되어 이어가길 바란다.
    그리고 천상의 여인처럼 우리나라의 위상을 더욱 높이고 인류를 위해 세계평화를 위해 기여 할 수 있는 영역까지 경지를 넓혀 나갈 수 있도록 커 나가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