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스타인벡

    2월은 노벨상 수상자인 미국의 대 문호 존 스타인백(John Steinbeck)이 탄생한 달(27일생)이다.
    우리 가족은 수년전 몬트레이에서 약 2년 가까이 살았다.
    몬트레이는 캘리포니아 북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휴양도시이다.
    근방에는 골프로 유명한 페블비치가 있고 또 영회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한 때 시장으로 봉직한 그림 같은 카멜 시가 있다.
    태평양을 바라보는 몬트레이는 온화한 기후에 풍광이 아름다워 동부의 노인들이 은퇴 후 여생을 여유롭게 보내는 아름다운 항구도시이다.

    아름다운 몬트레이

    몬트레이에서 자동차로 약 20분가량 동쪽 내륙으로 들어가면 옛 서부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살리나스 시가 나타난다. 살리나스는 시(市)라고는 하지만 인구 13만이 조금 넘는 조그마한 도시로 멕시코 계 이민자들이 많이 모여 사는 흙먼지 많은 농촌 도시이다.

    몬트레이와 살리나스를 연결하는 분지에 펼쳐진 광활한 평야에서는 장열한 캘리포니아의 태양 속에  상추와 아티초크가 탐스럽게 계절의 풍요를 만끽하며 일년 내내 녹색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상추는 1년에 9모작을 할 정도로 이어서 재배된다.
    아티초크는 안개를 먹어야 자라기 때문에 이곳 캘리포니아 북쪽에서만 자란다고 한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채소는 미국 소채의 80%를 공급할 정도여서 미국인들은 이곳을 샐러드 접시(SALAD BOWL OF NATION)라 부르기도 한다.

    탄생지 살리나스에 기념관

    우리는 살리나스 구(舊)시가지 중심가에 있는 스타인벡 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 바로 앞거리는  옆구리에 쌍권총을 찬 서부 사나이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서부영화의 세트장 같은 나지막한 목조 건물들이 양편에 늘어서 있다.
    이곳 메인가(main st.)의 북쪽 끝에 위치한 4만 평방 스퀘어 미터 크기의 기념관은 1998년 연방기금과 캘리포니아 패카드 재단의 기금으로 건립되었다. 3 층으로 된 전시장은 그가 집필 했던 원고며 당시의 신문 평들, 그가  집필을 위해 살았던 집 모형, 여행지, 생전의 생활 모습, 영화 장면 사진, 그리고 노벨상을 타기위해 방문했던 스웨덴 여행 사진 등 4만 5천점의 각종 전시품이 진열되어 있다.
    제임스 딘이 주연 했던 영화 ‘에덴의 동쪽 ’ 사진화보와 '분노의 포도' 사진들이 눈길을 끌었다.

    존 스타인벡은 1902년 2월 이곳 살리나스에서 태어났다.
    살리나스 중심가에 위치한 한 저택에서 고고(呱呱)의 성(聲)을 울린 스타인벡은 아름답게 널리 펼쳐져 있는 북 캘리포니아 대지의 기상을 마음껏 누리면서 어려서부터 이곳 자연과 사람들의 생활을 많이 익혔다.
    스타인벡은 14세때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살리나스에서 중 고등학교를 마친 후 샌프란시스코 근처인 팔로알토에 있는 스탠포드 대학 미국 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다니며 점원 농사꾼 노동자로 전전 

    원래 대학 가기를 싫어했으나 자신에 대한 부모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대학에는 들어갔지만 6년여를 다니면서 여러 번 진급에서 누락되기도 했으며 결국 중도에 대학을 그만 두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상점 점원, 농사꾼, 목장 지기, 공장 노동자등으로 전전하였으며 공부에는 취미를 붙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은 후일 그가 대문호가 되는 체험수업을 닦기에 충분하였으며 그의 후일 작품을 집필하는데 주요한 소재(素材)가 되었다.
    이 지역은 멕시코나 미국 남부에서 올라온 불쌍하고 가난한 이민자들이 많이 거주하였으므로 그들의 생활을 그리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된 것이다.
    그의 부친은 밀 공장을 운영하여 좋은 집도 사고 별장도 소유하는 등 부유하게 살았지만 이곳의 특성상 스타인벡은 그가 만난 보통 사람, 가난하고 찌들린 사람들의 생활에 관심을 갖고  어려운 노동자들의 가족간 갈등과 엇갈린 생활상을 그려내는데 애썼다.

    23세때 건설 노동자로 취업, 로스엔젤레스에서 뉴욕까지 가는 화물열차를 타고 인부들의 생활을 몸소 느껴 보기도 하였으며 26세때는 휴양지인 레이크 타호에서 여름 별장지기로도 일했다.
    이 같은 밑바닥의 생활을 몸소 체험하면서 작품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의 첫 작품으로 광산 노동자의 생활을 그린 '금의 잔'(CUP OF GOLD)이 27세때 뉴욕에서 첫 출판되었다.
    그는 다시 책의 소재를 보강하는 체험을 쌓기 위해  체험적 자료 수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후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집필에 몰두하여 거의 해마다 주옥같은 작품을 출판한다.

    포도밭 노동자 체험 <분노의 포도> 노벨상에

    1937년 35세에 유명한 ‘생쥐와 인간’ 이 출판되어 다음해 뉴욕 문학 비평가 상을 받는가하면 1939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분노의 포도’가 출간됐다.
    이 작품에서 오클라호마에서 이주해온 포도밭 노동자와 지주와의 갈등을 그려냈다.
    1952년에는 멕시코의 혁명가 ‘자파타’를 , 1955 년에는 우리에게 영화로 잘 알려진 ‘에덴의 동쪽’을 발표하였는데 이들 작품은 모두 영화화 되어  우리에게 친숙한 작품들이다.

    그는 1962년 '분노의 포도'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그의 문학은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노벨 위원회는 그에게 시상하면서 “스타인벡은 산, 해안, 바다, 대지를 사랑하였으며 눌리고 가난하고 찌들린 사람들의 생활을 완벽하게 그려 내는데 부족함이 없다” 평했다.

    기념관 관람 뒤 그가 태어난 생가를 찾았다.
    기념관에서 오른쪽으로 10분쯤 걸어가니 뾰족한 경사지붕의 아름다운 빅토리아식 3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2층은 식당이며 3층에는 침실이 있고 살림살이들이 전시되어있다.
    그가 태어난 저택은 여성 단체에서 인수하여 오늘날에는 고급 대중식당으로 활용하여 관광객도 유치하고 수입으로 스타인벡 기념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1897년에 건립된 이 집은 스타인벡의 부모가 구입 하여 살게 되었는데 스타인벡은 입주 이사 2년 후에 태어났으며 27세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평생 떠나지 않은 고향 "누구나 살고 싶은 곳"

    그는 결혼 후 살리나스를 떠나 몬트레이 해안가의 패씨픽 그로브에 새 살림을 차렸는데 이 가옥은 지금도 그때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어느 개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여기서 1930년부터 첫째 부인 캐럴 헤닝과 6년간 살면서 작품을 집필 하였는데 부인이 원고도 작성해주고 타자도 쳐주며 초기 작품 활동에 왕성한 의욕을 불태운 곳이다.

    그는 살리나스의 주변 도시인 로스가토스, 산타크루즈, 패씨픽그로브, 몬트레이, 킹 씨티, 홀리스터등  이웃 도시를  옮겨 다니며 살면서 집필 생활을 하였다. 그가 이 지역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그의 고향이어서였겠지만 소설의 소재가 있고 또 아름다운 풍광이 그를 떠나보낼 수 없었던 것 같다.

    몬트레이 해안을 끼고 연결된, 로보스포인트, 패씨픽그로브, 페블비치, 카멜, 산타크루즈등 아름다운 해안 풍경을 와본 사람들은 거의 모두 그 경관에 찬사를 보낸다.
    “이런 곳에서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꿈을 안고 떠나기에 충분히 아름다운 곳이다.
    카멜시는 유명한 영화 배우 클린트이스트우드가 한때 시장(市長)으로 선출되어 화제가 되기도 하였으며 화랑(畵廊)과 휴양 그리고 관광의 도시로 미국의 부호들이 은퇴 후 거주하는 곳이기도하다.

    세번 결혼...작품 16개 영화화, 아카데미상 4개

    그는 세 명의 부인과 결혼 하였는데 첫째 부인과 헤어진 후 1943년 직업 가수 출신의 진콩거와 결혼, 두 아들을 낳았으나 5년 만에 이혼하였다. 셋째 부인 엘렌과는 1949년 골프 코스로 유명한 페블비치에서 만나 다음해 뉴욕에서 결혼하여 임종할 때까지 해로하였다.

    그는 거의 모든 작품에 살리나스와 그 주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누구나 모두 살리나스에 태어날 수 있는 운명을 지닌 것은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고향에 대한 애착을 갖고 그곳을 무대로 작품세계를 펴나갔다. 수많은 작품 가운데 16편의 영화가 제작되었으며 그중 4개가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했고 많은 작품이 각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스타인벡은 그의 작품 속에 반드시 그의 고향이나 그가 옮겨 살던 도시나 거닐었던 거리를 소개하거나 작품명으로 쓰곤 했다. 몬트레이 거리 지명을 딴 ‘캐너리 로우’라는 소설에서 “몬트레이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 캐너리 로우는 하나의 시(詩)이며 소동이고 창살에 부딪히는 소음과 빛 그리고 꿈과 향수가 얽힌 거리이다” 라고 격찬한다.

    스타인벡에 관한 연구는 미 전역에서 활발하다.
    산타크루즈의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 산호세 주립 대에도 스타인벡 연구소가 설치된 것을 비롯해 미국 전역에 걸쳐 있다.  스타인벡이 가장 오래 살았던 몬트레이 와 패씨픽그로브는 스타인벡이 남긴 체취로 연간 360여만 명의 관광객을 맞고 있다.

    공동묘지 한 구석, 조그만 동판엔 이름뿐

    스타인벡은 1968년 66세를 일기로 뉴욕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그러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묻혔다. “고향인 살리나스를 떠나 외지(外地)에 묻힐 수 없다”면서 살리나스의 공동묘지인 ‘추억의 정원(garden of memory)' 한구석에 부모 누이들과 함께 온 가족이 잠들어 있다.
    뉴욕에서 사망하자 그는 유언으로  화장하기를 원했고, 물개의 울부짖음과 태평양의 파도소리를 장송곡으로 들으며 아름다운 로보스 포인트 해안가에서 장례를 치른 후 살리나스의 부모 곁에 영면한 것이다. 장례식에는 분노의 포도에 출연했던 헨리 폰다가 참석하여 조사를 읽었다. 

    그의 묘를 찾아보기 위해 따로 날을 잡아 살리나스 공동묘지 공원을 방문하여 공원 안을 한참 두리번거렸다. 그의 묘는 중앙이 아닌 한쪽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만한 대가(大家)라면 묘역 가운데 있으려니 찾아보려던 우리네 생각이 잘못 됐음을 깨달았다.
    또 감격한 것은 묘지 위에 조그맣게 누워있는 그의 묘비였다.
    묘비래야 도화지 크기만 한 동판, 그리고 거기에 새겨진 비명은 ‘존 스타인벡 1902-1968’ 이라는 글이 전부였다.
     화려한 업적에 비해 지극히 검소하게 꾸며진 대문호의 묘소.  
    가슴이 뭉클 해오는 것은 나만이 갖는 느낌은 아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