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병탄’ 주역들의 행로

    작위 받고 상금 받고 줄줄이 승진가도

    일본 주역들
    일본 정부에서 병탄을 주도한 외상 고무라 쥬타로는 백작에서 후작으로, 수상 가츠라 타로는 후작에서 공작으로 작위 등급이 올라갔다. 현지에서 진두지휘한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자작에서 백작으로 상승하고, 15만 엔의 ‘은전(恩典)’을 받았다. 그리고 6년에 걸친 철저한 무단통치의 대가로 1916년 10월 총리대신의 자리에 올랐다.

    대륙낭인의 ‘합방’활동을 막후에서 지원하고, 무자비한 의병탄압을 현장에서 지휘했고, 헌병통치의 틀을 만든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는 조선주차헌병대사령관으로 임명됐고, 병탄의 공으로 욱일중광장(旭日重光章)을 받았다. 1918년 대장으로 승진한 그는 대만총독으로 임명됐다. ‘병탄’이라는 숙어를 조어(造語)하고 ‘대방침’을 기초한 구라치 데츠기치(倉知鐵吉)는 외무차관으로, 통감부의 기우치 주사부로(木內重四郞)는 총독부 농상공장관에, 고마츠 미도리(小松祿)는 외사국장으로 승진 발령됐다.

    다케다 유골은 용산 절에

  • 병탄20주년에 흑룡회가 출판한 <일한합방비사>(상하2권)의 제호. 
    ▲ 병탄20주년에 흑룡회가 출판한 <일한합방비사>(상하2권)의 제호. 

    ‘병탄’을 주도한 대륙낭인들도 그들의 역할에 따라 정부로부터 ‘적지 않은 돈’을 받고 각각 제 갈 길을 갔다.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상대역이었고 ‘합방상주문’을 작성했던 다케다 한시는 끝까지 한국에 남아서 일진회 해산과 해산금 분배를 깨끗이 정리했다. 그리고 10월 중순 그동안 활동했던 한성을 등지고 자신의 본거지인 현성사(顯聖寺)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생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한국병탄에 온 정력을 쏟았기 때문일까? 1911년 6월 49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긴 아카시 모토지로는 다케다의 분골(分骨)을 활동의 본거지였던 용산의 서룡사(瑞龍寺) 경내에 묻고 분골탑을 세워 그의 공적을 기렸다.

    스기야마 시게마루는 여전히 정계의 막후 인물로서 활동을 계속했다. 1911년 이후 일본정부의 중국정책, 다이쇼 정변(1913), 시베리아 출병(1918) 등과 같은 중요한 계기마다 그는 군과 정부를 오가면서 막후에서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병탄을 현장에서 진두지휘한 우치다 료헤이는 병탄완성과 함께 ‘대륙낭인의 거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굳혔다. 물론 그도 ‘적지 않은 돈’을 정부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우치다는 한국 병탄에 만족하지 않고, 한반도를 넘어 대륙으로 국력확장을 위한 활동을 최전선에서 계속했다.

    ‘1천년의 숙원사업’이라는 한국병탄을 성공적으로 실현한 우치다 료헤이의 관심은 중국대륙으로 옮겨갔다. 청조(淸朝)를 마감하는 혁명의 기운이 중국대륙에 넓게 번져나가자 우치다 료헤이는 이를 중국대륙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적기로 판단했다. 한국병탄 직후인 1911년부터 우치다는 대륙낭인의 대부인 도야마 미츠루(頭山滿),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 미야자키 도텐(宮崎滔天) 등과 함께 쑨원(孫文)의 ‘멸청흥한(滅淸興漢)’을 위한 혁명 지원에 뛰어들었다. 한국병탄을 성공시킴으로써 얻은 명성과 정·관·재계와의 인맥을 바탕으로 우치다는 중국혁명정부가 필요로 하는 자금지원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1912년 난징(南京)에 중화민국 정부가 성립되고, 쑨원이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자, 그는 우치다를 중화민국의 외교고문으로 임명했다. 우치다는 일본정부의 묵시적 승인 아래 쑨원을 위하여 오쿠라(大倉)상회, 니혼유센(日本郵船), 미츠이(三井)물산 등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만들어 냈다.

    한국 병탄 성공한 우치다 "만주 먹자" 중국혁명 도와
     
    한국병탄 이후 우치다가 쑨원의 혁명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유는 그가 쑨원의 ‘멸청흥한’이나 그의 혁명사상에 동조했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보다는 한국병탄 과정에서 보여준 것과 같이 ‘국익’이라는 지극히 실리적 근거에서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면, “우리 지사들이 비상한 각오를 가지고 (쑨원의) 혁명을 지원하게 된 근본 신조는.....혁명에 성공한 새로운 중국과 제휴하여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항하고, 만주와 시베리아를 석권하여 이곳을 우리 세력의 일부로 만든다면, 동아시아의 힘의 균형이 결정되고, 대륙의 광활한 땅에 천황의 덕이 넓게 퍼지게 될 것이다. 이로써 동아시의 난국이 해결됨과 동시에 우리나라의 국세가 크게 신장하게 될 것이다. 우리 동방지사는 이와 같은 원대한 이유, 즉 중국 혁명가들의 목표가 우리 일본의 국익과 합치한다는 명확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몸과 마음을 바쳐 중국의 혁명운동에의 원조를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혁명 孫文 "장성 동쪽 이양하겠다" 낭인들 끌어들여

    혁명을 이끌고 있었던 쑨원은 대륙낭인들의 이와 같은 기대에 언질을 주기도 했다. 문서화된 서류는 아니지만, 쑨원이 우치다에게 혁명지원을 요청하면서, “중국혁명의 목적은 멸청흥한에 있기 때문에, 혁명이 성공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때에는 장성(長城) 동쪽의 영토는 불필요하다. 만주와 몽고의 권리는 일본에 이양하겠다”라고 약속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치다의 혁명지원은 “의협적 정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 기회를 이용하여 만주와 몽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쑨원의 약속은 필요한 때 일본의 지원을 받기위한 전략이었을 뿐, 본심이 아니었다. 쑨원과 혁명세력의 친일 약속은 어디까지나 중화민국 건설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목적을 성취한 그들은 주체성을 확립하고 일본의 영향력을 배제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제국주의를 중국민족주의운동의 동인으로 삼았다. 그들은 일진회와 달랐다. ‘장성 동쪽의 영토 이양’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일본인들은 더 이상 쑨원을 지원할 이유가 없었다. 도야마와 우치다를 위시한 쑨원 지원세력은 1912년 중반 “중국인을 대신하여 갈매기만의 전송”을 받으면서 중국에서 철수했다.

    쓴잔 마신 우치다, 중국서 철수... <일한합방 비사> 저술

    한국에서와 달리 중국대륙에서 우치다의 행동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는 여전히 밖으로는 ‘만몽(滿蒙)독립운동’에 깊숙이 관여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21개조 요구’의 초안을 정부에 제시하는 등 국력확장을 위하여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안으로는 1931년 대일본생산당(大日本生産黨)을 창당하여 국수주의와 천황주의를 위한 정치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우치다는 한국병탄을 동양평화와 아시아연대를 위한 역사적 ‘위업(偉業)’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그는 ‘합방’의 당위성과 필요성, 그리고 참여했던 사람들의 ‘지사적(志士的)’ 뜻과 역할을 역사에 남기고자 했다. 병탄 20주년을 맞아 <일한합방비사(日韓合邦秘史)>라는 두 권의 책을 출간했다. 병탄을 위한 대륙낭인들의 활동을 과장해서 서술하고 있기는 하지만, 병탄 당시의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합방’의 과정과 정당성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다. 

    메이지 신궁 앞에 거대한 '합방기념탑' 세워

    병탄 25주년을 맞아서는 ‘합방’의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메이지(明治) 신궁(神宮) 앞에 32척(尺)의 거대한 ‘일한합방기념탑’을 세웠다. “메이지 대제(大帝)의 홍업(鴻業)을 영원히 경모(敬慕)하여 받들기 위해” 세운 이 탑의 발기인은 도야마 미츠루, 스기야마 시게마루, 우치다 료헤이 세 사람이다. 우치다 료헤이는 건립 취지문에 “일한합방은 한국 측의 제창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여전히 강조하고 있다. ‘합방’은 결코 일본의 강요에 의하여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간절한 ‘청원’을 일본 천황이 받아들임으로써 성사된 것인 양 역사에 남기려 했다. 한국병탄을 한국인의 요구에 의한 ‘병합’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병탄과정에 참여한 정부-군부-대륙낭인 모두의 일치된 ‘근본 방침’이었다. 한국의 이용구나 송병준, 또는 이완용과 같은 ‘합방’ 지지 세력은 그 ‘근본 방침’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이용된 하수인에 불과했다.

  • 병탄25주년에 건립(1934.11.29)된 기념탑 앞에서. 앞줄 오른쪽부터 스기야마 시게마루, 도야마 미츠루(세번째), 우치다 료헤이(다섯번째), 구주 요시히사(우치다 뒤). 
    ▲ 병탄25주년에 건립(1934.11.29)된 기념탑 앞에서. 앞줄 오른쪽부터 스기야마 시게마루, 도야마 미츠루(세번째), 우치다 료헤이(다섯번째), 구주 요시히사(우치다 뒤). 


한국인 공로자 대규모 포상...정치활동 일체금지

한국 귀족들의 수작(授爵)
‘병탄’ 후 총독부는 한국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각종의 ‘선심’정책을 폈다. 순종황제 이하 한국의 왕실에는 일본 황족에 준하는 ‘명예’와 ‘생활’을 보장해 주었다. 양반을 중심으로 한 지배계층에는 신분에 따라 작위와 연금을 지급했다. 세금 미납자에게는 면세와 감세를 실시했다. ‘일만 여명’의 대한제국의 관리, 양반, 유생에게 은사금을, 효자·효부를 표창하고, 과부, 고아 등 극빈자들에게 일정액의 생활비를 보조했다. 그리고 대사면을 실시했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관리, 사회운동, 정치활동의 길은 철저하게 막았다. ‘병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친일세력에게도 적절한 물질적 보상을 하면서, 병탄 후 그들의 정치참여의 길은 완전히 차단했다.

이완용-송병준등 76명에 일본천황 하사금

1905년 이후 일본의 병탄정책을 지지했던 이완용, 박제순, 송병준, 조중응, 이지용, 민용린 등 ‘조선귀족’ 76명은 ‘병합’에 이바지한 공로의 대가로 일본 천황으로부터 작위와 ‘상당한 금액’의 하사금을 받았다. 그리고 모두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직을 받았다. 작위와 하사금을 받은 귀족 가운데는 박영효(후작, 28만엔)와 같은 선각자도 포함됐다. 나라를 판 대가로 그들은 일신의 안락과 부를 누리면서 여생을 보냈다.

일진회회장 이용구는 작위를 거절했다. 그는 대신 10만 엔의 ‘하사금’을 받고 일본에 거처를 마련했다. 1912년 5월에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사망한 후 일본정부는 그의 ‘병합’ 공을 치하해서 훈일등(勳一等)의 서보장(瑞寶章)을 수여했다.

'국가를 파는 자'와 '국가를 사는 자'의 갈림길

일진회의 말로
병탄의 방침이 정해지고 실행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서 일본 정부당국은 한국인 그 누구도 병탄과정에 끼어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병탄 후 정치적 패권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처음부터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병탄에 앞장섰던 일진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치다 료헤이도 일진회를 해산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었다. 그는 일진회 회장 이용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한성의 다케다 한시에게 “일진회는 그 가치를 이미 상실했고 그렇기 때문에 머지않은 장래에 해체되는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뜻을 전하고 미리 대비할 것을 당부했다. 데라우치가 통감으로 임명되자 우치다도 ‘동지’임을 자처했던 이용구에게,  “일한 두 나라의 장래를 고려하고 일진회의 앞날을 생각할 때 일진회는 지금은 다만 조용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만일 본인이 지도하는 이외의 행동을 고집한다면 어떠한 화가 닥칠지 예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경우 나의 미력으로도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사전에 알아두기 바랍니다”라는 전문을 보내 일진회의 대외 활동을 통제했다.

해체명령 받은 일진회 "물불 가리지 않은 저희들을..." 탄원

예정된 대로 병탄 단행과 더불어 데라우치는 일진회를 포함한 모든 정치단체의 해체를 명령하였다. 통감부는 해체비용으로 일진회에 15만 엔, 대한협회에 6만 엔, 그리고 규모와 활동내용에 따라 적절히 보상했다. 그동안 일진회를 이끌어 온 이용구는 총독부의 이러한 정책에 항의했다. 그는 일진회는 “창립 이래 일관하여 친일노선”을 지켰고, “통감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았음” 강조하면서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해산을 연기해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이러한 항의와 간청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이용구와 송병준은 우치다에게도 일진회의 해산 연기를 당부했다. 그러나 정치적 단체의 해산은 ‘대세’이고, 일진회의 해산도 이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는 우치다의 반응 역시 냉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병탄 2주만에 15만엔 받고 해산...이용구는 일본으로

우치다를 위시한 ‘합방’ 추진세력은 처음부터 일진회의 장래나 그 운명에 대하여 개의치 않았다. 다만 병탄을 ‘순수한 한국인에 의한 운동’으로 위장하기에 필요한 하나의 도구로 간주하고 이용했을 뿐이었다. 우치다는 일진회와 자신은 서로 다른 처지에서 다른 목적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같을 수 없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우치다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하면, 일진회와 이완용은 “국가를 파는 사람”이고, 자신과 같은 ‘합방’주의자는 “국가를 사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근본 생각과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나라를 ‘팔기에’ 분주했던 일진회는 1910년 9월 12일 총독부에 의하여 해산됐다.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15만 엔의 이른바 ‘해산경비’는 일진회원들에게 최고 5000엔에서 최소 10엔에 이르기까지 그 지위에 따라 나누어 지급됐다.

우치다 손잡은 이용구 "우리는 바보...속은 게 아닐까요"

우치다 료헤이는 1912년 4월 초 스마(須磨)의 한 요양소에서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이용구의 병상을 찾았다. 이용구는 옛날의 ‘합방 동지’인 우치다의 손을 잡고, “우리는 바보였나 봅니다. 속은 게 아닐까요”라고 비감스럽게 탄식했다. 그러자 우치다는 “뒷날 반드시 모든 것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오늘은 어리석은 자이지만 훗날 반드시 현자(賢者)의 자리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라고 죽어가는 이용구를 위로했다. 그로부터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그는 ‘현자’가 아니라, 이완용이나 송병준 등과 더불어 한국사에서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매국노’로 남아 있다.  

 

<연재를 끝내면서>

지난 100년 동안 한국의 역사는 엄청난 격변을 체험해왔다. 주권 상실과 주권회복, 그 사이의 투쟁과 친일의 모순, 해방과 혼돈, 동족상잔과 분단,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치 등으로 이어진 한 세기였다. 이 모든 민족사의 대 변화가 1910년의 일본의 ‘병탄’이라는 사건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주권회복으로부터 65년을 맞이하고 있는 오늘 우리는 여전히 분단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해결치 못하고 있고, 이 역시 1910년의 유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한 세기 전인 1910년의 ‘병탄 사건’이 담고 있는 의미와, 왜 우리 역사가 그렇게 전개됐나를 깨우쳐야만 할 것이다.

21회 계속된 이 연재가 ‘병탄’의 의미를 밝히고, 병탄 과정에서 일본의 책략과 한국의 일그러진 모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기대에 크게 못 미친 것 같아 부끄럽기만 하다. 호랑이를 그리려 했는데 고양이가 된 느낌이다. ‘다음’을 기약하는 희망을 가지면서 연재를 마감한다. 그동안 이 글을 실어준 <뉴데일리>와 관심을 가져준 독자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