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탈북 스토리(3) 

    공안이 없음을 분명히 확인한 우리는 날이 어두워질 무렵 마을로 내려갔다. 물론 둘 다 맨 발로 말이다. 창용아저씨는 장모로부터 꾸중을 받았었는지 들어오라는 말 대신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왔다. 나는 우리가 무사함을 무척 기뻐해주는 그가 친삼촌처럼 느껴졌다.

    "당신들 짐을 공안에서 다 가져갔소. 그 안에 뭐가 들어있었는데?" 중국어 책과 속옷들이었다는 대답에 돈은 없었냐고 다시 물었다. 돈 소리에 창용아저씨 등 뒤에 서있던 친구 얼굴이 갑자기 사색이 됐다. 나는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재빨리 대답했다. "돈은 있어요, 내가 갖고 있었어요."

    친구가 정말이냐는 눈으로 날 쳐다볼 때 마침 장모의 목소리가 들렸고 창용아저씨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돈을 갖고 있어? 외투 주머니에 있었던 거 아니야?" 친구가 기대 절반 의문 절반으로 물으며 다가왔다. 나는 그를 마당 한 구석으로 끌고 갔다. "똑똑히 들어, 우린 지금 한 푼도 없어, 빈털터리라고, 그러나 있는 척 해야 돼, 저 사람은 가면 그만이지만 우린 저 사람을 잃으면 끝이야, 내 말 알겠지?"

    창용아저씨가 보따리 하나를 챙겨 나왔다. 우린 서둘러 대충 맞는 신발과 솜옷들을 골랐다. 그리고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 창용아저씨는 절대 불을 피워선 안 된다며 조카가 이틀 더 늦는다고 했으니 그때까지만 부디 얼어 죽지 말라고 하였다. 공안이 탈북자들을 잡아들이는 이유 중 하나가 탈북자들 때문에 산불이 많이 나서라고 했다. 그러면서 장모 집에서 자기가 더 머물고 장모 속을 편하게 해주려면 돈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몹시 화가 난 척 하며 조카가 온 다음에 보자고 단호히 잘라 말했다.

    친구와 나는 이렇게 창용아저씨가 이틀 동안 날라 준 페트병의 뜨거운 물을 그러안고 산 속에서 모포 하나로 붙어살았다.

    "우리 서로 여자라고 생각하자" 한번은 친구가 불쑥 던진 이 말이 어찌나 웃겼던지, 우린 정말 아주 오랜만에 웃어보는 것 같았다. 아니 그 짧은 웃음에서 삶이란 이리도 다양하고 그래서 생존만으로도 아름답다고 여겨졌다. 그 이틀 밤의 정취를 나는 죽을 때까지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밤이 점점 깊어지니 산 속의 신비가 태동했다. 언젠가 원산 밤바다 기슭에서 끊임없는 파도소리가 심경을 사로잡았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바다처럼 산도 밀림이 설레는 소리로 마치 생명이 숨 쉬는 듯 했다.

    우리는 고난의 자신들이 뿌듯했다. 사람은 자연 속에 산다고 하지만 바람을 머금고 산 정상에서부터 밀려 내려오는 소리를 온 밤 듣는 경험자가 얼마나 되랴. 우리는 골짜기 따라 내려오는 1월의 찬바람을 피해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며 두고 온 집 이야기와 북한에서의 나날들을 옛말처럼 주고받았다. 그래선지 별들이 또렷한 밤하늘을 우러르며 두 손 모아 한국행의 소원을 빌 때는 눈시울이 젖기도 했다. 십년세월 이 고생해도 그 땅으로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우리에겐 그날의 대한민국이 별 만큼이나 아득히 멀었다.

    다음날 창용아저씨가 우리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신광용으로 자기 이름을 소개한 그는 대뜸 확인 차원이라며 신분증부터 요구했다. 신분증안의 날짜들과 도장이며 인쇄 질감에 이르기까지 전문가처럼 꼼꼼히 체크한 그는 어디엔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산 중턱까지 닛산 지프차 한 대가 올라왔다. 듣던 바대로 견인기 구입에 들떠있던 창용아저씨와는 차원이 달라보였다. 우리는 창용아저씨와 포옹으로 이별인사를 마치고 차에 올랐다. 한국 가면 은혜 갚으러 꼭 오겠다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물론 돈은 주지 않았다. 다행히도 창용아저씨가 자기에게 700달러를 준 사실을 조카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애원했기 때문이다.

    차는 젊은 신광용이처럼 힘 있고 멋쟁이였다. 스피커에서 울리는 노래가 한국가요여서인지 내친 기세로 한국까지 쭉 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차가 도착한 곳은 연길 시내 어느 번화가였다. 그동안 사람을 무서워했던 우리에겐 번잡함이 어마어마한 공포였다. 광용은 그동안 우리가 겪었던 악몽 같은 사정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에서 빨리 내리라고 하였다. 좀 뒤떨어져 오면 "얼른 오소!"하고 소리쳤고, 공안들이 사방에서 얼른거리는 백화점에 들어서선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기까지 하였다. 안하무인인 그의 행동은 괴로운 정도가 아니라 고문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일단 백화점에서 옷과 신발들을 사주었다. 나는 그때 거울을 들여다보다 깜짝 놀랐다. 이 얼굴로 여기 서있단 말인가? 서둘러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옷은 괜찮으니 선글라스를 사달라고 했다. 광용은 그게 더 의심스럽다고 했고 우리는 그냥 소원했다. 그 이후부터 친구와 나는 선글라스 신사가 됐다. 검은 안경알 뒤에 자신들이 감춰져있다고 생각하니 어깨가 펴졌다. 그 선글라스가 없었다면 광용이가 내민 카메라 앞에도 감히 서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가 사용한 돈과 사준 상품들을 윗사람들에게 확인시켜줘야 한다며 광용은 사진을 찍어줄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찍고 보니 뒤에 공안들이 서있었다.

    그날은 참으로 호의호식하는 날이었다. 비싸 보이는 식당에서 푸짐하게 먹었고 우리는 난생처음 남녀공용의 찜질방이란 곳에도 갔다. 역시 개혁개방은 달랐다. 어떻게 전혀 모르는 남녀들이 집체적으로, 그것도 속옷차림으로 한 공간에서 버젓이 잘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것이 바로 북한에서 말하던 자본주의 황색바람이었구나. 빈번히 놀라는 평양촌놈 우리에게 광용은 진짜 자본주의 맛을 보여주겠다며 "때밀이"란 사람을 불렀다. 돈만 주면 내 때도 벗겨주다니. 나는 "때밀이" 아저씨가 힘을 쓰는 동안 너무도 송구하고 크게 신세지는 것 같아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자정 무렵 우리가 간 곳은 신광용의 집이었다. 마중 나온 스물다섯쯤 돼 보이는 여자를 자기 와이프라고 소개했는데 나는 그때 여자를 그렇게 가까이서 본 다는 것이 좀 별스러웠다. 우리가 무인도에서 인간세상으로 온 느낌이랄까, 폐가 같은 빈집도 아니고 산속도 아닌 바닥이 따뜻한 아파트에서 이불을 덮고 잔다는 것 또한 이상할 정도였다.

    다음날 일어나니 신광용은 어디 나갔다 왔는지 금방 들어온 옷차림이었다. 전날과는 달리 한 마디도 안했고, 아침식사를 끝내고 난 후에는 우리에게 종이와 볼펜을 각각 주었다. 자기 프로필과 가족관계, 한국 정부 앞으로 제공할 수 있는 북한의 비밀정보들, 그리고 탈북이유까지 한 치의 거짓 없이 적으라고 하였다.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비밀정보인데 그것은 자기도 다 알아서는 안 되니 간단하게 제목처럼 요약만하라고 하였다. 비밀이 뭘까? 어떤 게 정보일까? 아무튼 그의 요구는 국가조치처럼 무언가 숭엄한 감이 들었다. 나는 글을 배우고 난 후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곱게 써 본적이 없었다.

    친구도 대한민국 대통령 앞으로 편지 쓰듯 정성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신광용은 우리의 자필서류들과 쇼핑사진, 그리고 신분증 복사사진을 우편봉투 안에 넣으며 한국에선 이럴 땐 파이팅! 한다고 했다. 우리는 그 때부터 수 없이 맘속으로 파이팅!을 곱씹었다. 우리가 더 자신했었던 것은 신광용의 처가 함북출신 탈북자라는 것을 안 후부터였다. 오갈 데 없는 탈북자를 아내로 맞은 그의 인간성이 돋보였고 그 믿음만으로도 우리는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행복했다.

    그러나 파이팅 10일이 지나도록 그가 장담하던 기적은 오지 않았다. 당신들을 더 숨겨주고 싶은데 돈이 떨어져간다는 광용의 한숨도 점 점 커져갔다. 나는 우리가 왜 이 집에 계속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속 시원히 알아야 했다. "오늘은 말 좀 합시다. 도대체 누굴 기다리는 것이고 어디까지 우리 문제가 진전 된 겁니까?"

    신광용은 처에게 술심부름을 시키고 정색해서 입을 열었다. "내가 잘 알던 한국사람이 있어요. 탈북자 문제에 관심이 많은 분인데 내 생각엔 국정원 같소. 돈도 몇 번 받았고, 평양출신 탈북자가 있으면 자기에게 바로 연락하라고 했고, 또 있느냐 자주 물어보기도 했소. 그래서 당신들 문제를 그에게 이야기했소. 서류도 그 사람에게 보낸 것이고, 처음엔 돈도 보내고 당신들의 안전을 잘 부탁한다고 하더니 지금은 연락이 안 되네요. 핸드폰 번호조차 바꿔버렸어요."

    나는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국정원 직원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사람을 우리가 지금껏 구세주처럼 기다렸단 말인가?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의 기다림도 무의미할 것이라 생각하니 막막했다. 정말 다른 방법이 없을까? 신광용은 베트남이나 몽고, 혹은 태국으로 가는 길이 있다고 했지만 우리로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국경에서 연길까지 나오는 이 수 백리에서도 여러 번 생사를 넘었는데 그 먼 길을 또 어떻게?

    결론은 돈이었다. 더 있자고 해도 돈이고 길을 떠나자고 해도 돈이었다. 친구가 친척 주소를 다시 꺼내왔다. 창용아저씨와 똑같이 부자촌이라며 감탄하던 광용은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중국말이어서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기분 좋은 통화인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통화 후 광용의 말은 거의 감격 수준이었다. "이 친구가 기잔데 애 말로는 친척이 맞다면 한국 가는 것은 문제도 아니라오. 그러고 보니 이 이름을 나도 아는데 항일열사로 중국 교과서에도 나와 있는 분이에요. 그 자녀들도 심양에 나가 한 자리씩 하고 있고, 정말 친척이 맞소?"

    친구의 선친들 또한 항일투사로, 북한에서도 충신의 귀감으로 인민들에게 선전되고 있다는 말에 광용은 우리의 한국행을 백퍼센트 확신했다. 아니 확신을 넘어 자기 처도 이번 기회에 남한으로 함께 데려가 달라고 부탁까지 하였다. 탈북자의 남편으로 인정 될 경우 조선족의 한국국적 취득이 가능하다며 광용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는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아침이면 중국 공안의 매복감시에 적발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 밤에 당장 찾아가기로 하였다. 셋은 밖으로 달려 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좋은 택시여야 공안이 설사 근처에서 지키고 있어도 의심 못한다며 비싼 택시를 골라 탔다.

    30분 쯤 달려 도착해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궁궐 같은 집이었다. 주변이 너무 환해 어떤 문제가 생길 경우 탈출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의심스러운 승합차가 서있는 것도 보였다. 하여 나는 집근처를 두 바퀴 더 돌자고 했다. 앞 현관과 이어진 골목들과 담장 주변을 아무리 살펴도 차를 이용하지 않고서는 불의의 정황에 대처하기 힘들어보였다. 우리는 논의 끝에 택시를 뒷골목에 세워두고 광용이를 우선 보내기로 했다. 광용이가 친척을 만나 시간과 약속을 따로 정하고 믿지 못할 경우 택시 있는 곳까지 직접 데려오기로 했다. 그렇게 광용이가 가고나서부터 나와 친구는 손에 땀을 쥐고 기다렸다.

    한초 한초가 일 년 같았다. 친구도 조바심이 났는지 한 바퀴 더 돌자고 했다. 그러나 우리 둘 중 누구도 그 말을 중국인 택시기사에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30분쯤 됐을 때 광용이가 쫓기듯 달려왔다. 택시에 오르자마자 빨리 출발하자고 두 팔을 마구 흔들었다. 좀 전의 그 어떤 긴장 때문인지 계속 뒤를 돌아보며 숨을 헐떡였다. 예전 같으면 자기 집 앞에 세웠을 택시도 훨씬 멀리 지나쳐 세우게 했다.

    그리고 들려주는 그의 말은 전율, 그 자체였다. "그 집 아들이라고 나왔는데 자긴 사촌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대. 아버지가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더 상관없다면서 뭐라는 줄 아오? 그 놈이 살인했다며? 살인자가 어떻게 이 집에 오냐고! 공안에서 24시간 지키고 있으니 잡히지 않겠으면 두 번 다신 나타나지 말라고 하는거요. 그래서 설득하려는데 아까 승합차 봤지요? 거기서 두 놈이 내려오더니 나에게 달려오는거요."

    나는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서늘했지만 친구는 한 쪽에 쭈그리고 앉아서 서럽게 울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