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범 김구 선생은 1947년에 쓴 '나의 소원'에서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문화는 더 이상 거창한 단어가 아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살아 숨 쉬는 문화 예술을 향유하며 삶의 질을 높여가고 있다.

    고학찬(70) 예술의전당 사장은 "문화강국으로 불리는 프랑스에서는 실업자 할인 제도가 존재한다. 그만큼 국민 모두가 소외 없이 쉽게 접하고 누릴 수 있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며 "우리나라도 문화의 가치를 실현하고 삶을 풍요롭게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밝혔다.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예술의전당은 7만여 평 부지에 오페라·연극 공연장과 클래식, 서예관, 미술관 등을 위한 전용 공간이 마련돼 있다. 매년 1000여 건 이상의 공연과 전시가 열리고 관람객만 300만 명이 찾는 명실 공히 '한국 문화 예술의 1번지'다. 

    14대 사장(2013년 3월 15일~2016년 3월 14일)으로 재직한 고학찬 사장은 각종 기획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뤄낸 성과를 인정받아 예술의전당 역사상 처음으로 연임에 성공했다. 특히 전당의 문턱을 낮추고 일상에서 예술을 가까이 즐길 수 있게 공헌했다.

    "사장으로 일한지 4년 8개월이 됐다. 연임 전까지 매일 아침 첫 출근한다는 마음이었다면, 연임 이후엔 마지막 출근이라는 생각을 갖고 연속극처럼 산다. 예술의전당 같은 공공기관은 어떠한 사업에 대한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 그 동안 사장이 14번 바뀌었고, 보통 2년 정도의 임기를 채우고 그만 뒀다. 그렇다보니 소신을 갖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문화융성이나 문화격차 해소 등의 정책은 시간을 두고 길게 봐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제주 출신의 고 사장은 한양대학교 문리대 영화과를 졸업한 뒤 1970~1977 동양방송(TBC)에서 PD로 일하며 드라마, 교양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이후 제일기획 Q채널 국장, 삼성영상사업단 방송본부 국장,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서울예술대학 극작과 겸임교수, 윤당아트홀 관장 등을 역임했다.

    "방송 PD 출신이 처음 사장이 됐다. 소극장을 운영한 사람이 어떻게 공공기관을 운영하냐며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작은 시계가 큰 시계보다 비싼 것처럼, 문화예술은 사이즈에 비례하지 않는다. PD시절 경험은 다양한 장르를 아우를 수 있고 세상을 보는 눈이 넓다는 장점이 있다. 이는 균형감을 가지고 극장을 경영하는 기틀이 됐다."

  • 고 사장이 취임하고 중점적으로 추진한 사업은 '삭 온 스크린(SAC ON SCREEN)'이다. '삭 온 스크린'은 예술의전당에서 펼쳐진 우수 공연을 고화질의 영상으로 제작해 전국 문예회관과 각종 문화시설에 무료로 상영하는 사업이다. 시작할 때 공연 업계와 정부 관계자들은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이 줄어들면 어떡하냐는 반대가 많았다. 

    하지만 현재까지 23만 명이 관람했으며 클래식, 오페라 등 순수공연의 관객 저변을 확대했다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24편의 상영 가능한 영상 레퍼토리를 보유한 예술의전당은 지난해부터는 터키, 아랍에미리트, 스페인 등 22개국 교민과 현지인을 대상으로 무료 상영회를 개최하며 해외로 확대했다.

    "한 사회 전체의 문화와 예술 수준과 역량이 사회 구성원의 기대 수준에 못 미치는 것은 물론, 그마저도 지역 간 불균형이 심각할 정도로 크다. 문화와 예술의 가치는 무엇보다 다양성에 있다. '삭 온 스크린'은 문화예술로부터 소외되거나 접근이 어려운 시민의 문화 역량을 살찌우는 사업이다. 지방은 오페라와 발레를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 국립오페라단이 작품 한 편을 만들 때 약 10억 원 정도의 비용이 드는데, 오페라극장에서 3회 가량 공연하고 무대를 뜯는다. 관객은 많아야 5000명이다. 하지만 1억 원을 더 들여서 영상화 작업을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다. 울릉도, 전방 군부대, 땅끝마을 등 스크린을 통해 전국 방방곡곡에 문화예술의 씨앗이 뿌려졌다."

    문자문화의 꽃인 서예는 동양 인문정신이 생동하는 예술이다. 동양에서는 서예(또는 서도, 서법)가 인격을 반영한다고 믿어 서여기인(書如其人·글씨는 곧 그 사람)이라는 말을 해왔다. 고 사장은 "한중일 문화교류에 있어서 서예만한 매개체가 없다"라며 오늘날 동양 인문정신의 정화라 할 만한 서예에 대한 무관심과 홀대받고 있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1988년 개관한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은 '한국서예사특별전', '김생 1300주년 특별전', '추사 김정희전', '다산 정약용전' 등의 기획전시를 계속해왔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당시 공간의 절반 이상을 현대무용단, 오페라단, 발레단 등 국립 공연단체에 내주고 2011년 이후에는 기획전 한번 열지 못했다. 이에 고 사장은 90억 예산을 받아 서예박물관을 리노베이션해 현대적 전시공간으로 새롭게 개관했다.

    "서예는 1700년 된 가장 오래된 예술장르다. 서예박물관은 중요한 공간임에도 그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리노베이션 후 연간 관람객수가 4만 명 정도에서 20만 명 정도로 늘었다. 지난 7월 개최한 중국 근대 서화의 거장 ‘치바이스(齊白石·제백석) 작품전’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로 얼어붙은 한중관계에 문화의 물꼬를 트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 고 사장은 지난해 12월 새로운 시도로 어린이예술단을 창단했다. 어린이예술단은 국악과 기악, 합창 단원 등 총 100여 명의 어린이로 구성된 단체로 예술의전당이 만든 첫 전속예술단이다. 예술의전당에는 국립오페라단, 국립발레단, 국립현대무용단 등 국내 대표 예술단체가 상주하고 있지만 전속 예술단체는 한 곳도 없으며, 모두 분리돼 있다. 지휘는 빈 소년합창단 최초의 여성 지휘자 김보미가 맡았다.

    "어렸을 때는 어린이다운 정서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어야 하는데, 걸그룹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이 안타까웠다. 어린이예술단은 어린이들의 합창과 관현악, 국악연주로 들려주는 전래동요는 모든 이들을 감동의 세계로 안내할 것이다. 정기공연 외에도 남북 교류, 세계 도시별 순회공연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다."

    새 정부 출범 이후 각 문화예술단체장의 교체설이 흘러나오고 있는 가운데, 고 사장은 지난 10월 19일 열린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유관기관 대상 국정감사에서 낙하산 인사라는 의혹을 받고 증인으로 출석했다.

    이에 대해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는데 정권이 바뀌었다고 다 바뀌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임기제가 왜 있겠나. 공공기관의 장은 오고 싶다고 오는 자리가 아니다. 이전 정권에서 임명받았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지금까지 진행한 사업들은 오히려 정부가 할 일들이었다. 부자나 엘리트, 특수계층을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면 야단을 맞아야 당연하지만 소외계층을 위한 정책을 폈기에 거리낌이 없다"고 답했다.

    고 사장은 지난해까지 전국 200개가 넘는 회원사가 소속된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회장이기도 했다. 그는 문예회관의 협업을 통한 상생 성장과 지역민 누구나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예술 나눔을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예회관 간의 지역 네트워크가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 미국 브로드웨이 공연은 처음 지방 도시에서 시작한다. 지역민들에게 먼저 선보인 후 비평가들의 평과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면서 음악, 대본, 무대 등의 수정을 거듭해 완성된 작품으로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린다. 우리나라도 5개 이상의 문예회관이 힘을 모은다면 브로드웨이처럼 10년 이상 롱런하는 공연을 기획해 만들 수 있다."

  • 2018년은 예술의전당 개관 30주년이 되는 해다. 30주년을 앞둔 예술의전당은 이를 기념하고 상징하는 엠블럼 디자인을 국내 포털 네이버의 창작 콘텐츠 플랫폼 그라폴리오와 함께 공모했다. 그 결과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되겠다'는 의미의 엠블럼 디자인이 최종 당선작이 됐다.

    "30주년도 일상 활동의 연속이다. 건수나 횟수에 구애 받지 않고 현재 진행하고 있는 사업에 더 충실하려고 한다. 다만, 전당 30년 역사를 정리하는 책자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제작하고, 학술대회와 의미가 각별한 공연들을 자체제작 혹은 공동주최 형식으로 선보일 계획이다. 해외 유명 극단·단체와의 협업을 기대해도 좋다."

    30주년 기념행사에서 눈 여겨 볼 점은 국립단체들과의 협업이 많다는 것이다. 내년에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이 리모델링에들어가기 때문에 국립창극단 공연인 '신창극 시리즈-이자람'이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된다. 예술의전당이 공동주최하는 어린이 연극은 덴마크 메리디아노 극단과 일본 무수비자 극단과 협업해 여름방학 기간에 소개할 예정이다. 15년 만에 예술의전당 무대를 다시 찾는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가 선보이는 공연도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30년의 역사를 발판으로 다시금 새로운 미래를 나아가는 예술의전당은 지금 어디로 향해 있을까.

    "2017년과 2018년은 하룻밤 차이다. 해가 바뀌었다고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니다. 2019년 3월까지 임기다. 내 호가 '달파'인데, 거기에 내 성을 붙이면 '고달파'가 된다. 이것저것 고달프게 남들이 하지 말라는 거 우겨서 하는 스타일이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고 싶지만 직원들이 말린다. 내년은 그 동안 전개했던 사업을 잘 마무리 짓는 한해로 삼으려고 한다."

  • [사진=뉴데일리 정상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