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스러울 땐 피고인의 이익으로’...무죄추정 원칙에 충실한 결정
  • 김관진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22일 저녁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 사진 뉴시스
    ▲ 김관진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22일 저녁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 사진 뉴시스


    지난 11일 수감된 김관진 前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법원의 구속적부심을 거쳐 풀려나면서, 법원의 영장 심사 제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사실상 사문화됐다는 말이 나올 만큼 형해화(形骸化)된 구속적부심을 통해,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주요 사건 피의자가 풀려난 예를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김관진 전 실장 석방이 갖는 충격파는 매우 크다.

    무엇보다 영장전담판사의 심리 결과를 뒤엎은 것이나 다름이 없어, ‘범죄혐의 소명’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형식적으로 이뤄진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김 전 실장 석방 소식 직후 속칭 진보성향 매체는 법원 결정을 비난하는 논조의 기사를 잇따라 내고 있다. 친여(親與) 성향 누리꾼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정원 적폐청산 수사를 주도하고 있는 서울중앙지검은 김 전 실장에 대한 적부심 결정이 나온 지 1시간도 안 돼 2차장 명의의 입장문을 내고, 법원의 결정을 맹비난했다. 중앙지검은, 법원이 영장실질심사를 통해 이미 발부한 영장을 부적법하다고 판단한 사실에 강한 불쾌감을 나타내면서,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고 입장을 밝혔다.

    검찰이 영장 관련 법원의 결정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법·검(法·檢) 갈등이 다시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앞서 중앙지검은 법원이 전직 국정원 간부들에 대한 영장을 줄줄이 기각하자, 법원의 결정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는 입장문을 발표해 물의를 빚었다.

    검찰이 “법원의 석방 결정을 납득할 수 없다”며 제시한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김 전 실장 구속 후 특별한 ‘사정 변경’이 없다는 점, 다른 하나는 공범자들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인 상황을 고려할 때, 증거를 인멸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검찰은 이미 같은 사건에 대해 법원이 영장을 발부한 사실도 강조했다. 실질심사를 통해 혐의가 소명됐고, 구속의 필요성과 상당성이 인정된 사건을 불과 11일 만에 뒤집을 만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장을 청구한 검찰과 영장을 발부한 법원의 판단이 적절했는지, 먼저 따져봐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김 전 실장 측 변호인은 ‘범죄 혐의 소명 여부’에 초점을 맞춰 변론을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적부심을 심리한 중앙지법 형사합의51부(신광렬 수석부장판사)도 변호인 측의 항변이 이유있다고 받아들였다.

    앞서 검찰은 김관진 전 실장에게 군형법상 정치관여 및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검찰은, 김 전 실장이 국방장관으로 있었던 2010~2012년, 연제욱 전 국군사이버사령관 등에게, 정부와 여권을 지지하고 야권을 비난하는 내용의 댓글 공작을 지시한 것으로 보고 있다. 김 전 장관이 군무원 채용에 있어 친(親)정부 성향 인사를 선발하도록 신원조사 기준을 상향하고, 면접에서 호남 등 특정 지역 출신을 배제토록 하는 등 직권을 남용한 혐의도 있다고 검찰은 밝혔다.

    지난 10일 서울중앙지법 강부영 영장전담판사는 “검찰의 혐의가 소명되고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다”며, 영장을 발부했다.

    같은 사안을 놓고 영장전담판사와 형사합의51부가 상이한 판단을 내린 가장 큰 이유는, 혐의 소명을 위해 검찰이 제출한 증거에 대한 판단 차이다.

    검찰은 김 전 실장의 혐의 소명을 위해, 군 사이버사 보고서를 제출했다. 해당 문건을 보면 보고서 표지에 ‘v’ 표시가 있다. 검찰은 이 표시를 김 전 실장이 했으며, 그 의미는 댓글 공작 등 정치관여 행위를 직접 지시한 증거라고 설명했다.

    반면 변호인단은, 해당 표시는 피의자가 ‘보고서를 봤다’는 의미 밖에는 없다고 반박했다. 보고서를 본 뒤 관행적으로 ‘v’표시를 했을 뿐, 다른 의미는 없다는 것.

    영장전담판사와 형사합의51부는 해당 표시에 대한 의미를 서로 다르게 해석했다.

    영장전담판사는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여 “범죄 혐의가 소명된다”고 판시했으나, 형사합의51부는 “‘v’표시만으로는 피의자가 군 사이버사에 댓글 공작을 직접 지시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변호인 측 항변에 무게를 뒀다.

    형사합의51부의 판단은,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결하라’(in dubio pro reo)는 형사법 상 대원칙을 충실하게 따른 결과로 풀이된다.

    적부심 재판부는 도주 및 증거인멸 판단에 있어서도, “향후 재판에서 중형 선고가 예상되므로 피의자가 신변을 비관해 자살하거나 도주할 우려가 있다”는 검찰 측 주장보다, “한평생 군인으로 살았고, 합창의잠과 국방장관, 국가안보실장을 지낸 피의자가 처벌이 두려워 도망갈 염려는 없다”는 변호인 측 항변을 받아들였다.

    적부심 재판부가 김 전 실장의 석방을 명하면서, 사건 관계자들의 신병을 구속한 뒤, 추가 수사를 통해 여죄를 밝히려던 검찰의 계획은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재판부가 ‘범죄 혐의 소명 부족’을 이유로 석방 결정을 내렸다는 점에서, 검찰의 부담감은 더 클 수밖에 없다.

    김 전 실장 1심 공판은, 불구속 상태에서 진행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재판부는 형사소송법 214조의2 제4항을 근거로 석방을 명했다. 이에 따라 검찰은, 김 전 실장이 실제로 도주하거나 증거를 인멸하지 않는 한, 동일한 범죄사실을 이유로 다시 체포하거나 구속할 수 없다(같은 법 214조의3 제1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