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세력, '이념 진지전'에서 DJ 넘어 YS 침노 시도… 보수의 비세
  • 김대중 전 대통령 추도식에 참석했던 당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최고위원과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의 모습.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김대중 전 대통령 추도식에 참석했던 당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최고위원과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의 모습.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서거한지 2년, 고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다시 정치권의 중심에서 연일 회자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2주기 추도식에 직접 참석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YS의 사진을 당사에 내걸었다. 국민의당 끝장토론에서는 안철수 대표와 호남 중진의원들이 YS의 3당합당을 놓고 설전을 벌였다.

    진보·좌파로의 정권교체를 전후해 YS가 정치권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은, YS와 김대중 전 대통령(DJ)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이념적 진지전의 현 전세(戰勢)를 보여준다는 분석이다.

    역대 대통령을 놓고볼 때,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은 각각 진영별 평가가 뚜렷한 편이다.

    보수 진영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각각 건국과 산업화의 아버지로 존경하는 반면 진보·좌파 진영은 이승만 전 대통령을 한반도 적화(赤化)를 저지한 원흉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청산돼야 할 적폐'로 취급한다.

    반대로 진보·좌파 진영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흠모하는 반면 보수 진영에서는 건국·산업화·민주화 등 우리 역사의 순(順)방향적 발전에 아무런 기여를 한 바가 없는 이념적 별종이자 불필요한 불순물로 바라본다.

    문제는 이 사이에 위치한 YS와 DJ다. 이들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민주화'는 보수 세력과 진보·좌파 세력이 모두 자신들의 공(功)으로 내세우는 부분이다. 특히 건국·산업화를 선도한 보수 세력과는 달리, 진보·좌파 세력은 민주화조차 '전매 특허'를 내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에서 입지를 잃게 되므로 이 점에 있어서 필사적이다.

    지난 9년의 보수정권 동안 진보·좌파 세력의 이러한 약점에 대한 집중적인 공략이 있었다. 보수 세력이 우리 사회의 이념적 진지전에서 YS라는 최전방 '진지'에서 뛰쳐나와, DJ까지 바라보며 진보·좌파 세력을 거세게 몰아붙였던 것이다.

    한광옥·한화갑·김경재 등 김대중 전 대통령과 평생을 함께 했던 동지들이 보수정권과 새로이 함께 하며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역사적인 화해'라는 평가를 받았다.

    김무성 전 대표최고위원도 DJ 추도식에 직접 참석해 고인의 숭고한 뜻을 기리며, 민주화에 기여한 DJ의 뜻은 계승하되 민주화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좌경화 친노·친문 세력은 이로부터 분리하려 애썼다.

    DJ의 민주화 의지를 정통 계승한 국민의당이 창당하면서 진보·좌파 세력을 우리 사회에서 청산하는 노력은 거의 달성될 뻔 했지만, 지난해 4·13 총선에서 친박(친박근혜)계의 '막장 공천' 전횡과 올해 대선에서의 문재인 대통령 당선으로 이는 미완(未完)으로 남고 말았다.

  • 김영삼 전 대통령 영결식에 참석했던 당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최고위원과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의 모습.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김영삼 전 대통령 영결식에 참석했던 당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최고위원과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의 모습.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한동안 '깨어있는 시민, 행동하는 양심' 'DJ는 씨앗, 노무현은 꽃' '김대중과 노무현을 하나로 이해해야 한다'며 은연중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더 추어올리면서도 억지로 DJ와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수세를 보이던 진보·좌파 세력은 정권교체를 전후해 공세로 돌변했다.

    그간 보수 세력의 일익으로 여겨졌던 YS의 적통을 빼앗아오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이념적 진지전의 전선이 DJ에서 YS로 밀린 것이다.

    사실 친노·친문 세력의 정신적 지주인 노무현 전 대통령은 DJ와는 정치적 인연이 별로 깊지 않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인생의 대부분을 YS와 함께 했으며, 정치적 고향도 YS의 아성인 부산이다.

    부산을 근거로 하는 PK(부산·경남) 친문 세력의 시각에서, 고향의 정치적 거두인 YS는 포기할 수 없는 존재이며 내심 DJ보다 깊은 친근감을 느끼고 있는 대상이기도 하다.

    일례로 친문 강경파로 분류되는 손혜원 의원이 새정치민주연합 홍보위원장이던 시절, 당대표회의실 뒷편 현수막을 제작하면서 YS의 사진은 가장 눈에 띄는 정면 상단에 배치하고 DJ는 하단 구석에 배치한 적이 있다.

    당시 새정치연합의 일부 의원들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저 구석에 가 있고" "누가 당의 주인이냐"고 화를 냈었다. 지금이라면 그런 일이 다시 발생한다고 해도, 그게 문재인 대통령의 뜻이라면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는 분위기다.

    진보·좌파 세력의 YS를 향한 침노(侵擄)는 노골적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때 최형우 전 내무장관과 함께 YS의 최측근 가신이라 '좌덕룡 우형우'라 불리던 김덕룡 김영삼민주센터 이사장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민주평통) 수석부의장으로 임명했다.

    지난 대선에서는 YS의 차남 현철 씨의 지지 선언을 이끌어낸데 이어, 이날 추도식에 직접 참석해 추도사를 낭독했다. 추도식과 묘역 참배에는 보수정당에 당적을 둔 의원들도 많이 참석했지만, 김부겸·김영춘 장관 등 '넘어간' 인사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누가 봐도 보수 세력의 일익이었던 YS의 적통(嫡統)이 어디인지 아리송해지는 상황이다.

    이에는 보수 세력이 탄핵과 대선을 거치며 사분오열·지리멸렬해지고, 일부 극단주의 세력까지 득세하면서 건국·산업화와 함께 우리나라 역사 발전의 중요한 요소인 민주화를 상대적으로 등한히 한 책임도 있다는 분석이다.

    결국 YS와 DJ를 둘러싼 진지진 양상과 전선(戰線)의 후퇴가, 우리 사회에서 보수 세력이 현재 역력한 비세(非勢)에 처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지적이다.

    한국당 의원실 관계자는 이날 본지와 통화에서 "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당사에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진까지 내건 것은 보수 세력이 건국·산업화 뿐만 아니라 민주화도 선도해왔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라며 "민주화의 공을 대한민국의 역사 발전에 편승·기생해온 진보·좌파 세력에 거저 내주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