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고 어떻게 나오든 승복 어려운 상황 벌어져...쌓이고 쌓인 사법 불신이 禍 키워
  • 16일 오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뇌물수수 등 혐의 80차 공판 출석을 위해 호송차량에서 내려 이동하고 있다. ⓒ 사진 뉴시스
    ▲ 16일 오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뇌물수수 등 혐의 80차 공판 출석을 위해 호송차량에서 내려 이동하고 있다. ⓒ 사진 뉴시스


    아마도 수 년 안에 새로 발행될 형법 기본서에는 우리 사법사상 그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드문, ‘피고인의 방어권 포기’라는 희귀사례가 수록될 전망이다.

    16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2부(재판장 김세윤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 뇌물수수 등 혐의 80차 공판은 ‘충격’ 그 자체였다.

    법정형이 단기 3년 이상에 해당하는 필요적 변론사건(변호인의 선임 없이는 재판이 열릴 수 없는 경우)에서, 변호인이 공판 도중 집단 사임한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항변을 포기할 경우 적어도 10년 이상의 중형 선고가 확실시되는 사건에서, 피고인과 변호인단이 ‘합의’에 의해 방어권을 포기한 사실은, 그 사유나 배경이 무엇이든 우리 사법사의 수치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

    무죄를 주장하던 구속 피고인과 변호인단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방어권 포기를 선언했다는 사실은, ‘공정한 재판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의 방어권 포기로, 앞으로 재판은 파행이 불가피해졌다.

    박 전 대통령이 심한 무력감을 호소하면서, “더 이상 재판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밝힌 이상, 그가 새 변호인을 선임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재판부 역시 이런 사정을 인식한 듯 19일 열리는 81차 공판에서 국선변호인 선정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선변호인이 선임된다고 해도, 재판 파행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짜인 각본에 따라 판결이 나올 것’이란 판단 아래, 재판부에 강한 불신을 드러낸 박 전 대통령이, 국선변호인의 조력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에 따라 남은 공판은 재판부와 특검의 뜻에 따라 속도감 있게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국선변호인이 10만여 쪽에 이르는 사건 기록을 단시간 안에 파악하는 것도 물리적으로 기대하기 힘들지만, 7명의 변호인이 나눠 맡았던 사건을, 국선변호인 혼자서 맡는다는 것 자체가 상식 밖이다.

    이런 사정을 고려할 때, 변호인의 탄핵(반박)이나 증인반대신문은 형식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박 전 대통령이 앞으로의 공판에 불출석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형사피고인은 구속 유무를 떠나 원칙적으로 공판에 출석해야 한다. 다만 단기 3년 이하 혹은 다액 500만원 이하의 벌금 혹은 과료에 해당하는 경미한 범죄를 범한 피고인은 예외적으로 불출석이 허용된다(형사소송법 33조).

    박영수 특검이 박 전 대통령에게 적용한 법정형은 단기 3년 이상이기 때문에 위와 같은 예외조항이 적용될 여지는 없다. 다만 박 전 대통령이 출석을 거부하고 교도관에 의한 강제 인치가 어렵다고 판단되면, 이른바 ‘궐석재판’도 가능하다. 다만 재판부는 궐석재판에 앞서 검찰과 변호인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위 같은 법 277조의 2).

    박 전 대통령의 방어권 포기는 상당한 후폭풍을 예고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재구속을 결정한 김세윤 부장판사는 박 전 대통령 변호인단의 사임계 제출에 당혹스런 반응을 보이면서 ‘재고’를 거듭 요청했다.

    김 부장판사는 16일 공판 도중 두 차례나 변호인단의 ‘재고’를 요구하면서, 박 전 대통령 측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를 썼다. 그는 “구속영장 발부는 유죄의 예단이 아니다”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김 부장판사는 17일 예정된 공판과 증인신문을 취소하고 19일 공판 속개를 명하면서, 이날까지 박 전 대통령 측이 뜻을 바꾸지 않는다면 국선변호인 지정 절차에 착수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 사건 내용을 가장 잘 아는 변호인단이 사임한다면 그 피해는 피고인이 받게 될 것”이라며, 이후 벌어질 상황에 대한 모든 책임은 박 전 대통령과 변호인단에게 있음을 밝혔다.

    박 전 대통령 측의 방어권 포기에 당혹스런 반응을 보인 곳이 법원만은 아니다.

    서울중앙지검 한동훈 3차장은 16일 오후 기자단 티미팅을 하면서, 박 전 대통령 영장 발부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재판부의 영장 발부는 적법절차에 따른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한동훈 차장은 그러면서도 “변호인이 사임한 건 유감으로 생각한다. 피고인 측도 협조해 주길 기대한다”고 했다.

    박 전 대통령 측이 ‘재판 보이콧’을 선언한 이상, 선고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논란은 피할 수 없게 됐다. 무엇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불신의 골은 더 깊게 패일 것으로 우려된다.

    10년 이상의 중형 선고가 확실시되면서, 선고 자체가 새로운 정치·사회적 혼란의 진앙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