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위조약 싸고 사흘 담판, 미군주둔을 반대하던 덜레스도 굴복공산침략과 일본 재침을 막는 2중봉쇄 장치...한미동맹 성공
  • [연재] 이승만史(2) 한미동맹의 탄생 ⑬ 덜레스와 담판 성공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이승만포럼 대표

    ‘서울공항’이라 불리던 여의도 비행장, 1953년 8월4일밤 10시 5분 시커먼 미군용4발기가
    어둠을 뚫고 한강 한가운데 내려앉았다. 예정보다 12시간 늦게 덜레스 미국무장관이
    서울에 내려섰다. 지난 6월 아이젠하워가 이승만에게 약속한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휴전조인 1주일만에 국무장관이 직접 이승만과 협상하러 날아온 것이었다.
    지난번 18일동안이나 이승만과 매일 협상을 해야했던 로버트슨 차관보도 동행하였다.
    육해공 3군 군악대가 미국 국가를 연주하고 예포(禮砲) 19발을 쏘아 국빈환영을 베풀었다.
    백두진 총리등 각료들과 3군수뇌가 출영하였고 한복차림의 소녀들이 증정하는 꽃다발을 받은
    덜레스는 짤막한 도착성명을 낭독하였다. 

    “워싱턴에 산적한 긴급용무들을 제쳐놓고 이승만 대통령과 회담하러 오게 된 이유는
    전세계에 대하여 미국은 대한민국의 견해를 더욱 존중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전쟁에서 협력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평화에서도 협력하여 한국통일이라는 공동목표에
    협력할 것”이라고 말한 덜레스는 백선엽 육참총장의 안내로 의장대를 사열하였다.
    워싱턴을 떠날 때 회견에서 그는 “한국전쟁이 종결된 지금 또다시 구우(舊友:old friend)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할 수 있음은 평생의 기쁨”이라고 말했다.
    덜레스는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1주일전에 서울을 방문했었고, 그후 전쟁중 재차 한국전선을 시찰한 바 있었다. 덜레스는 미국 기자들과 문답을 통해 이대통령과 한미방위조약을 협상, 조문에 관해 구체적인 토의를 하러 서울에 간다며 이승만의 휴전조약 수락을 얻어내기 위해 약속했던
    양국방위조약 약속을 꼭 지킬 것이며 그러나 “미군의 한국 주둔이 의무화되어선 안 될 것”이라고 재차 못박듯이 답변, 이승만에 선제카드를 날리고 온 것이다.
    여의도 행사가 끝나자 덜레스는 가로등도 희미한 밤거리를 달려 필동에 있는 미군의
    “영빈관‘(VIP숙사)에 여장을 풀고 첫 밤을 지냈다.

  • 덜레스 미국무장관의 입경 기사.ⓒ조선DB
    ▲ 덜레스 미국무장관의 입경 기사.ⓒ조선DB


▶ 한미방위조약의 탄생 진통 시작...경무대는 또 협상전쟁

이튿날 아침 9시 57분 경무대에 도착한 덜레스를 환영한 이승만 대통령은 15세 손아래
프린스턴대학 후배이자 아이크 정권의 실세 덜레스를 맞아 본격적인 ‘한미동맹’ 출범준비에
돌입하였다.
덜레스가 전해준 아이젠하워 대통령 친서에는 “3년간 전쟁에서 보여준 이승만의 영웅적 투쟁을 찬양하고 한국 국민의 의사를 존중할 것이며 한미방위조약과 한국통일방안 및 경제원조 등
한국과 최대한의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며 “강력한 한미유대관계를 전세계에 과시하고 싶다”는 등 요란한 말잔치 선물이 가득하였다.
첫 날 2시간 가까이 진행된 1차 회담은 ‘화기애애’하였다고 신문들이 보도하였다.
이날부터 꼬박 사흘 밤낮으로 계속된 회담은 경무대에서 이승만-덜레스가 단독협상을 진행하는 한편, 중앙청에서 변영태 외무장관등 한국팀과 로버트슨등 미국팀이 별도 실무회담을 병행하였다.
첫 대화는 먼저 로버트슨과 브릭스 주한대사의 항의 발언으로 시작되었다.
며칠전 이승만대통령이 발표한 ‘휴전 비난 성명’이 로버트슨과의 약속을 깬 것이고,
정치회담이 실패할 경우 미국과 유엔이 한국의 통일전쟁에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공언한 이승만의 주장은 미국정부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기선을 잡았다.
특히 아이젠하워는 ‘미국이 공약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비난에 격노하였다고 들이댔다. 
이에 대해 변 외무장관과 올리버 고문은 이승만의 입장과 원칙을 조목조목 설명하였다.
“미국과 유엔은 6.25 직후부터 공산침략을 격퇴하고 한국을 통일시키겠다는 거듭된 결의안들을 스스로 모두 파기하였음은 세계가 다 안다. 전쟁에 지쳤다고 세계와 함께 다짐한 공약을
이렇게 하루아침에 깨고도 화를 내는 것은 약소국을 묵살하는 적반하장이 아닌가. 
통일 목적을 협상에 의해 달성하겠다는데 이것도 실패한다면 전 세계는 공산주의 앞에 
비굴하게 무릎을 꿇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며 따라서 공산제국주의는 더욱 고무되어
미국이 그토록 염려하는 세계3차대전 가능성을 미국이 더 높여주는 결과가 된다.
이승만의 눈에도 보이는 엄연한 사실을 미국이 못 본다거나 외면한다는 속셈을
이승만은 물론 한국 국민들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날 밤 경무대에선 이승만대통령이 베푸는 만찬이 벌어졌다.
다음날엔 변영태 장관의 조선호텔 만찬, 브릭스 대사의 미대사관저 만찬,
덜레스가 초대한 만찬 등 날마다 밤마다 만날 때마다 모든 대화는 ‘한국통일’과 ‘한미동맹’을
중심으로 한 협상의 연장이었다.
  • 덜레스(왼쪽)와 로버트슨을 다시 만나 환담하는 이승만.(자료사진)
    ▲ 덜레스(왼쪽)와 로버트슨을 다시 만나 환담하는 이승만.(자료사진)

    ★ 올리버는 브릭스 대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고 그의 저서 [이승만의 대미투쟁]에 남겼다.
  • “이승만의 시각을 정확히 인식하는 일이 양국관계와 양국조약을 위해서 선행돼야 한다.
    이승만은 ‘오늘날 세계의 모든 문제는 군사적’이라고 본다.
    자유세계가 공산주의를 격퇴할 것이냐 말 것이냐, 싸울 것이냐 싸우지 않을 것이냐,
    이것이 지금 인류의 갈림길이다. 만약 싸우지 않을 것이라고 아시아인들이 판단하게 된다면
    그들은 공산주의에 굴복이외의 선택이 없다고 결론 지은지 오래이다.
    그러므로 이승만이 단독으로 한국국민을 이끌고 ‘자살작 공격’으로 통일하겠다는 주장이야말로 그의 진실로 진심이란 사실을 덜레스와 아이젠하워가 똑 바로 인식해야만 사태가 해결된다. 
    이승만의 ‘단독북진’ 소신의 밑바닥엔 이널 전략이 숨어있다. 남한 혼자서 끝까지 싸운다면
    소련 스탈린과의 직접 협상이 불가피하게 이어지게 될 것이고 그 협상에서 이승만은
    압록강-두만강을 회복하여 통일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20대시절
    고종을 품에 안은 러시아와 싸워서 국익강탈을 막음으로써 크게 이겨 본 경험을 갖고 있다.  
    만약 한반도가 다시금 분단상태로 강대국들에 ‘매수’되어 버린 휴전상태가 지속된다면
    한국은 대만신세가 되어 독립정신을 상실한 채 공산주의에 굴종하는 노예 사대주의로
    되돌아 갈 것이며 차라리 일본지배를 원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이승만은 절망하고 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미대사관에서 3년 근무했던 브릭스는 올리버의 말에 고개를 연신 주억거렸다. “맞는 말이오. 공산국가에 자유선거가 주어진다면 중국에서도 공산당은 쫓겨날 것이오.”

  • 덜레스가 이승만에게 전달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친서 내용과 한미 실무회담을 보도한 조선일보 1면ⓒ조선DB
    ▲ 덜레스가 이승만에게 전달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친서 내용과 한미 실무회담을 보도한 조선일보 1면ⓒ조선DB

     피 말리는 탁상 혈투! 이승만-덜레스 '운명의 담판'

    이승만-덜레스의 ‘담판’은 신문보도처럼 ‘화기애애’는커녕 피를 말리는 탁상 혈투였다.
    이들 양거두 회담을 전해주는 기록 가운데 올리버의 기억만큼 상세하고 생생한 증언이 없다. 
    주요대목을 간추려 옮겨본다.

    ★덜레스는 이승만 박사를 향해 능청스러운 웃음을 띠며 말했다.
    “최근에 내가 각하의 친구인 네루 수상알 만난 것을 알고 계시지요?”
    이 박사는 엷게 웃으며 전혀 아니라는 몸짓을 했다. “친구라니요!”
    덜레스가 말했다. “네루가 말하더군요. 이 대통령을 자제시키는게 좋을것이라구요.
    내가 말했지요.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음을 수상도 아실텐데요. 미국이 아시아 각국을
    어떻게 다루기를 원합니까? 꼭뚜각시처럼 취급할 까요? 이러니까 재빨리 말을 돌립디다.“
    덜레스는 이박사를 응시하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미국은 지금 한국등 여러나라와의 관계를 새로운 토대위에 정립하려 노력중이요.
    아시다시피 이제까지 미국은 언제나 일부 강대국들과 만나 한국에 관해 무엇을 할것인가를
    결정하고서 그것을 그저 한국에 통고만 해왔습니다. 더 이상 그렇게 하지않으려고 합니다. 
    나 자신이 여기 서울에 와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강대국 국무장관이 약소국의 대통령과 대화하고 우리정책을 약소국과 조율하기 위해
    지구를 반바퀴나 돌아 움직였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여기에서 내린 결정이 아니라 내가 한국에 왔다는 사실입니다.“
  • 한미상호방위조약 내용을 둘러싸고 담판을 벌인 이승만과 덜레스.(자료사진)
    ▲ 한미상호방위조약 내용을 둘러싸고 담판을 벌인 이승만과 덜레스.(자료사진)